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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공의, 생명의 하나님을 찾으라

기사승인 2020.09.08  16:4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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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23

< 1 >

예언자 아모스는 남 왕국 유다에서는 웃시야 왕(주전 783-742)이,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왕이 지배하던(주전 786-746) 주전 8세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아모스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는 유다 사막의 경계 지역,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7km, 베들레헴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위성도시 드고아 출신의 양을 치는 목자이며 돌 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였습니다(7,14). 그는 직업적으로 교육을 받은 예언자도 아니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었습니다. 양 떼를 몰던 곳에서 그를 붙잡아 내셔서, 그를 자기 민족에게 심판과 파멸을 선언해야 했던 비극의 예언자로 삼은 분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아모스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해야 했습니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누가 겁내지 않겠느냐?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3.8)

하나님은 불가항력적인 권능으로 아모스의 삶에 개입하여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신 것이지요. 그러지 않고서야, 과연 어떤 예언자가 자기 백성에 맞서고, 과연 어떤 선지자가 최고의 권력자에게 맞설 수 있겠습니까!

주전 760년,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이스라엘은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유다 왕 아마샤가 북이스라엘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이 실패한 후(왕하 14,8-14), 북왕국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어 무거운 조공을 바쳐야 했고, 이스라엘은 친아시리아 정책으로 정치적 안정과 솔로몬 당시에 버금가는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아모스가 남왕국 출신인데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와 베델 성소에서 예언활동을 한 것은 유다가 이스라엘의 속국으로서 무거운 조공을 바쳐야 했고, 백성은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든 것은 과중한 세금만이 아니었습니다. 가뭄이나 메뚜기 떼의 공격, 산불 같은 자연재해는 유다 백성을 더욱 괴롭혔습니다.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의 왕립 성소인 베델에 간 것도 유다의 조공을 바치러 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베델 성소 제사장 아마샤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아모스가 왕에 대한 반란을 선동하고, 이 나라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말을 하고 다닌다고 거짓 고발합니다(7,10). 여로보암 왕의 성소요 왕실이 있는 베델에서 왕과 이스라엘 백성의 비참한 최후를 예견하는 아모스를 그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샤 제사장은 말합니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7,12).

예언이 밥벌이가 된 직업적 예언자들처럼 살지, 무엇 때문에 왕과 지도층이 듣기 거북하고, 참을 수 없는 심판과 파멸을 예언하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예언이 밥벌이가 된 직업적 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점성술이나, 창자로 치는 점, 제비 점 등과 같이 고대 중동에 널리 알려져 있던 신탁 기술을 학습하여 사용하는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사제직이 밥벌이가 된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라가 곧 망해가도, ‘잘 된다, 잘 된다’며 권력자의 눈치를 보거나 비위를 맞추다가 오히려 이들 권력자들보다 더 백성을 억압하면서 사익을 챙기는 집단이었습니다. 이들은 권력의 안보보다 백성의 안위를 더 걱정하고, 사실과 진실을 밝혀 백성이 바른 길을 가게하고,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하는 지식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은 먼저 이스라엘과 유다를 둘러싼 열방에게 내려야 했습니다. 다마스쿠스, 가사, 두로, 에돔, 암몬, 모압 등 이스라엘 주변국들이 저지른 “서너 가지 죄”를 주님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서너 가지 죄”, 죄는 결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지 않습니다. 죄는 언제나 구체적입니다.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이방 민족들은 다른 민족들을 쇠도리깨로 타작하듯이 파멸시키고, 포로들을 다른 민족에게 노예로 팔아넘기고, 동맹국을 서로 배신하고, 심지어는 형제 사이의 정마저 끊으며, 전쟁 책임도 없는 무고한 여인들을 살육하여 아이 밴 여인들의 배를 갈랐습니다(암 1,13).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왕에 대한 예의는 지키는 법, 그러나 모압 족속은 에돔 왕의 뼈를 불태워 재로 만들었습니다(암 2,1).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유다와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배타적 특권으로 오해했습니다. 선택신앙이 이방민족들보다 이스라엘이 더 우월하다는 근거로 이용되거나, 하나님을 거역하는 주장을 관철시키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유다는 주님의 율법을 업신여기고, 주님이 정한 율례를 지키지 않았고, 거짓 신들에게 홀려서 그릇된 길로 들어섰습니다(암 2,4). 이스라엘은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아넘기며,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아넘겼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했으며,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에게 드나들며,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습니다(암 2,6-7).

“신 한 켤레 값”, 지극히 사소한 빚 때문에 노예로 팔리고 참혹하게 유린당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현실, 돈 때문에 의로운 사람들이 팔려가는 현실보다 더 가증스런 일은 이들에게서 저당물로 취한 옷 위에 눕고,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권력자들의 이른바 ‘제의적 간음’이었습니다. 종교와 일상의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지요. 종교적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무관심하면서도,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제의적 간음입니다. 제의적 간음은 우상숭배로 구체화됩니다.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 기간에 아버지와 아들이 신전 창녀들과 교제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기 백성의 죄악을 아모스는 가차 없이 폭로하고 비판합니다(암 5,21-24).

사마리아의 지도층은 폭력과 강탈로 탈취한 재물을 요새 안에 쌓아놓았고(암 3,10), 상아로 꾸민 별장에서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저희 남편들에게 마실 술을 가져오라고 조르는 이른바 “바산의 암소들”의 사치도 극에 달했습니다(암 4,1). “공의를 쓰디쓴 소태처럼 만들며, 정의를 땅바닥에 팽개치는 자들”(암 5,7), “법정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말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암 5,10), “의로운 사람을 학대하고, 뇌물을 받고 법정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한 자들”(암 5,12), “상아 침대에 누우며 안락의자에서 기지개를 켜며, 양 떼에서 골라잡은 어린 양 요리를 먹고, 우리에서 송아지를 골라잡아 먹는 자들,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서, 헛된 노래를 흥얼대며, 다윗이나 된 것처럼 악기들을 만들어 내는 자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며,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의 집이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는 자들”(암 6,4-6), 아모스는 이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말들이 바위 위에서 달릴 수 없고, 사람이 소를 부려 바다를 갈 수 없는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공의를 뒤엎어 독약을 만들고, 정의에서 거둔 열매를 쓰디쓴 소태처럼 만들었다”(암 6,12)고 규탄합니다.

사마리아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윗물이 흐린데 아랫물이 맑기를 기대할 수 없는 법, “초하루 축제가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 수 있을까?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낼 수 있을까?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면서, 가짜 저울로 속이자. 헐값에 가난한 사람들을 사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사람들을 사자. 찌꺼기 밀까지 팔아먹자”(암 8,5-6)고 합니다.

< 2 >

이스라엘 지도층과 백성의 죄악의 결과는 베델 성전의 붕괴와 민족의 전멸이었습니다. 그리고 심판은 자연재해, 특히 지진으로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불을 보내겠다. 그 불이 요새들을 삼킬 것이다”는 반복적인 주님의 선고는 아모스가 예언활동을 시작한지 2년 후에 일어난 지진을 반영합니다(암 1,1).

오래 전 인도네시아에 일어난 쓰나미는 무슬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발언해서 물의를 일으킨 대형교회 목사가 있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아니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를 특정 종교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식하고 위험한 일입니다. 인간 때문에 일어났다는 개연성이 있는 기후변화에서 촉발된 재난은 인간에 대한 심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진처럼 언제, 어떤 규모로 일어날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재난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전 8세기 예언자 아모스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지진만이 아니라, 가뭄과 메뚜기 떼의 습격 같은 자연재해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과학시대 이전에 살았던 인간의 어리석음, 견강부회(牽强附會: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함)로 치부할 수 있을까요? 가뭄이 들거나 재난을 당하면 왕이 부덕해서 그렇다고 회개하며 하늘에 제사를 드린 것도 덕치를 이상으로 한 옛 왕정사회의 일이지, 지금은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서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일어난 지진을(암 4,11), 예언자 아모스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여로보암 2세의 통치를 받던 기간에 일어난 지진(암 1,1)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지진을 비롯한 천재지변을 한 나라의 지도층의 부정부패와 백성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는 것은 정신 나간 열광주의자들이거나, 누구의 책임도 아닌 재난을 빌미로 권력층을 비판하려는 악의적인 정치세력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시기도 하시고, 비를 내리게도, 내리지 않게도 하시고(암 4,7), 메뚜기도 보내시고, 잎마름병과 깜부기병도 내리시고(암 4,9), 기근도 보내신다고 합니다. 천재지변도 한 나라의 지도층과 백성의 윤리적 타락과 부패의 결과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형식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심판의 마지막은 심판 그 자체가 아니라, 심판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 주가 이스라엘 가문에 선고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라. 그러면 산다”(암 5,4;6). 사람들이 밥이 없어 배고프고, 물이 없어 목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리고 목말라하기 때문입니다(암 8,11).

부정부패로 번역되는 ‘corruption’의 어원적 의미는 ‘관계의 왜곡’ 혹은 ‘관계의 단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권력이 부정부패했기 때문에 국민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의 관계가 왜곡되거나 단절되었기 때문에 부정부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 자공이 국가경영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BC 551 - BC 479)도 같은 의미로 대답했습니다. 한 국가를 운영하는 데는 족식(足食), 족병(足兵), 민신(民信) 해야 하는데, 마지막까지 남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신’, 곧 백성의 신뢰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지도층이 부패했기 때문이고, 이들이 부패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패했기 때문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부패하게 되고, 죄를 짓고, 마침내 심판과 파멸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회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충만함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그 날이 오면,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고, 그 터진 울타리를 고치면서 그 허물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 집을 옛날과 같이 다시 지어놓겠다.”(암 9,11)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 생명의 하나님을 찾으면 살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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