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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용서를 모르는 비둘기

기사승인 2020.09.01  16: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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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22

< 1 > ‘요나’라는 예언자

요나라는 인물은 요나서 외에 열왕기하 14장 25절에도 언급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유다의 요아스 왕의 아들 아마샤 제 십 오년에, 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왕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마흔한 해 동안 다스렸는데,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에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그대로 본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국경을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하였는데, 이것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그의 종인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 요나 예언자에게 말씀하신 그대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나서에 등장하는 요나가 여로보암 2세 시대, 다시 말해 주전 786년부터 746년까지 활동한 아맛대의 아들 요나 예언자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 후기를 반영하고 있는 내용으로 미루어, 학자들은 이 둘이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요나서는 주전 5세기에서 4세기경에 기록된 책으로 봅니다.

그런데 요나서가 구약성서에서 ‘소예언서’로 분류되는 것은 열왕기하에서 그가 예언자로 소개되었기 때문인데, 요나서 자체는 예언서가 가지는 일반적인 특징인 신탁이 중심이라기보다는 요나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요나’라는 이름은 ‘비둘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비둘기로 상징되는 전통이 있었던 것에 비추어(호 7,11;11,11; 시 74,19), 요나는 한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2 > 요나서의 내용 전개

⑴ 요나서는 4개의 장으로 구성된 비교적 아주 짧은 예언서입니다. 요나서는 주님께서 요나에게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까지 이르렀다’(욘 1,1-2)고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요나는 스페인으로 도망가려고, 욥바로 내려가 스페인으로 떠나는 배를 탑니다.

니느웨는 어느 성읍이었을까요? 니느웨는 산헤립(주전 705년-681년) 시대 이후, 주전 612년에 메대와 바벨론 연합군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 앗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이것은 티그리스 강변에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 이라크의 모술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산헤립은 자신을 ‘위대한 왕’이라고 부른 사람이고, 이 말은 아카드 왕들의 칭호에 해당됩니다(왕하 18,28).

요나서에 의하면 니느웨 성은 둘러보는 데만 사흘길이나 되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고 합니다(욘 3,3). 니느웨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제국주의의 상징이 되어 왔었는데, 이스라엘에게 가장 잔인한 적이었습니다(사 10,5-15, 습 2,13-15, 나훔).

왜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했을까요? 다시스는 대게 스페인의 남서쪽 해변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인데, 니느웨와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세상의 또 다른 방향의 끝자락 도시입니다.

요나가 도망친 것은 젊은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위험이나 실패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나중에 비로소 밝혀지듯이(욘 4,2), 자신의 말로 인해 니느웨가 참회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보려고 한 요나는 서쪽 끝까지 도망침으로써, 하나님의 이교도 구원 계획을 무산시키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세상의 끝까지 가서 숨으면 하나님도 못 찾으시리라 생각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시편 139,7-8).

그런데 스페인으로 도망가기 위해 탄 배가 큰 태풍을 만나 거의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뱃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저마다의 신들에게 부르짖는데, 요나는 배 밑창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선장이 그에게 와서 ‘일어나서 당신의 신에게 부르짖으시오. 행여라도 그 신이 우리를 생각해준다면, 우리가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소?’ 말합니다.

태풍은 더 심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뱃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내리는지 알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마침 그 제비가 요나에게 떨어졌습니다.

요나는 정직하게 자기가 주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태풍이 더 사나워지자, 요나는 자신을 바다 속에 던지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 태풍이 가라앉을 것이라고. 희생 제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두려워, 선원들은 살인죄를 그들에게 지우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폭풍이 일던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욘 1,14-15).

마치 ‘심청전’을 읽는 것 같습니다. 바다의 폭풍의 신을 달래기 위해 인간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에 널리 알려져 있는 설화입니다. 또 물고기 뱃속에서의 체험 이야기도 그리스의 신화인 페르세스의 전설, 곧 티탄 크리오스와 바다의 여신 에우리비아의 아들인 페르세스 전설에도 나타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있은 후, 여러 다른 신들을 믿던 사람들이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주님을 섬기기로 약속하였다는 것입니다(욘 1,16).

요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태풍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한 것이지요. 이방인들에게 전도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인 요나는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방식으로 이방인들을 구원하신 것이지요.

▲ 요나 예언자의 이름은 비둘기라는 뜻이다. 비둘기는 늘 평화를 상징했지만 막상 요나는 하나님의 평화와 용서를 모르는 고집 쎈 예언자였다. ⓒGetty Image

⑵ 그 다음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큰 물고기 뱃속에 있는 요나 이야기입니다. 바다 속에 던져진 요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마련하여 두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요나는 사흘 밤낮을 그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습니다.

사람이 사흘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지요. 큰 물고기는 여기에서 어둠과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구원의 수단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둠과 죽음까지도 구원의 방편으로 이용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신약성경에서도 표징을 요청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요나의 표징’을 언급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 12,38-41)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 주님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님께서 내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스올 한 가운데서 살려 달라고 외쳤더니, 주님께서 나의 호소를 들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바다 한 가운데, 깊음 속으로 던지셨으므로, 큰 물결이 나를 에워싸고, 주님의 파도와 큰 물결이 내 위에 넘쳤습니다.”(욘 2,2-3)

요나의 기도는 출애굽 후, 홍해에서 이집트 병사들이 모두 물에 빠져 죽은 후, 부른 모세의 승리의 노래와 아주 유사합니다: “내가 주님을 찬송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빼어난 장교들이 홍해에 잠겼다. 깊은 물이 그들을 덮치니, 깊은 바다로 돌처럼 잠겼다.”(출 15,1-5)

고대인들에게 바다는 두려움과 신비와 공포의 장소였습니다. 신이 거하는 곳으로 여겨지기도 하였고, 바다 자체를 신으로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다가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임을 분명히 합니다(창 1,10; 시104,6-9; 잠 8,29).

⑶ 그런데 주님은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고, 물고기는 요나를 뭍에다가 뱉어냅니다. 요나의 생명을 구하신 하나님은 요나에게 다시 과제를 주십니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고 외치라”고 하십니다(욘 3,1-2). “니느웨 성읍에 사는 사람들의 죄악이 하나님 앞에까지 이르러”(욘 1,2),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선포하라는 것이지요. 니느웨 성읍 사람들의 죄악을 규탄하고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자기 목숨을 위협하는 일일 수 있기에 스페인으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요나의 속 마음에는 한 편으로는 두려움이,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도시 니느웨가 멸망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지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니느웨 성읍 사람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왕도 걸치고 있던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 모든 니느웨 성읍 사람들이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 노여움을 푸실지 모르고, 그러면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선포합니다(욘 3,6-9).

니느웨 성읍 사람들이 뉘우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욘 3,10).

하나님은 어느 민족이라도, 비록 그 패덕으로 멸망당할 지경에 있는 성읍이라도, 영원히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그에게로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무한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언제라도 솔직하게 후회하고 참회하면서 그것을 갈망할 때는 언제나 나타난다는 것이 요나서의 메시지입니다.

⑷ 놀란 것은 니느웨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요나는 더 놀랐습니다. 이방인들인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도 놀랐지만, 그렇다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니느웨 성읍은 앗시리아의 수도인데, 앗시리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잔인했던 원수였습니다. 요나는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습니다(욘 4,1). 그래서 말합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으로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욘 4,2)

‘이방인은 심판받고 망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인 이스라엘만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온 요나가 이방인도 구원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고, 아니 그런 하나님에게 화가 난 것이지요.

그래서 말합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욘 4,3)

이방인도 구원받는다면, 선민인 이스라엘의 특권은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회개하면 다 구원받는다면, 애써 율법을 지키면서 힘들게 신앙생활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과연 누가 어려운 신앙생활을 일찍부터 하겠느냐는 항의투의 불만입니다.

성읍을 빠져나온 요나는 성읍 동쪽에 가서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았습니다. 그 성읍이 어찌 되는가 볼 셈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마련하여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습니다. 요나의 기분이 무척 좋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이 벌레를 한 마리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박 넝쿨을 쏠아버리니, 그 식물이 시들고 말랐습니다. 해가 뜨자 찌는 듯이 뜨거운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요나는 기력을 잃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대답합니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욘 4,9)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욘 4,10-11)

자기가 심지도, 키우지도 않았지만, 뜨거운 햇볕을 가려준 박 넝쿨 하나 죽었다고 그처럼 아까워하는 요나를 나무라시면서 하나님은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은 물론 짐승들까지도 구원하십니다.’

< 3 > 요나서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⑴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참회한 이방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개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짐승들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과 생태성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점에서 요나서는 선교를 위한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한 책이 되었습니다.

⑵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이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나타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요나는 아주까리 덩굴 체험으로 자신이 이방인 도시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얼마나 부당하고 편협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뉘우치게 됩니다.

요나서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배타적 분리주의와 종교적 이기심에 젖은 신앙의 편협성을 규탄하면서,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지의 무한한 포용성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⑶ 그렇다면 죽기 전에 회개하면 되지, 미리부터 어려운 신앙생활 할 필요가 있을까? 이방인도 구원받는다면, 하나님의 선택받는 백성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방인이나 선택받은 백성이나 차별 없이 대하신다는 말일까요?

독일 여성 신학자인 도로테 죌레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의 자녀를 더 사랑하신다는 답변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외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의 피로 사신 그의 자녀들을 더 사랑하시고, 지키십니다. 이방인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선교의 사명을 주시고,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신다는 약속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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