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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 - 노아 이야기

기사승인 2020.04.28  17: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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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4

지난 시간에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오늘은 ‘노아’라는 인물을 함께 알아보려고 합니다.

< 1 >

노아는 우리가 모두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시기 위해 선택하고 언약을 맺은 인물입니다. 노아는 라멕이 182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노아’, 곧 ‘위로’라는 뜻으로 지은 배경을 설명하는 창세기 5장 29절은 이미 노아의 미래를 예견합니다: ‘주님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창 5,29).

그렇습니다. 노아는 가인의 형제살인으로 시작된 인류의 폭력적 다툼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할 과제를 안고 태어난 것입니다.

노아의 아버지인 라멕은 폭력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라멕의 아들들에 대한 성경의 보도에서 우리는 당시 농업과 철기문화, 음악과 예술이 크게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 4,20-22). 그러나 폭력의 악순환도 깊어갔습니다. 최초 인간 아담과 하와의 타락, 최초의 형제 살해, 복수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신명기 32,35: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 이제는 복수의 수행을 인간 스스로 주장하고 나섭니다. 한 군데 상처를 입히면 한 사나이를 죽이고, 한번 손찌검을 받으면 한 아이를 죽이며,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었지만, 이제는 일흔 일곱 갑절로 보복했습니다. 라멕 자신도 자기 두 아내에게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고,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고 고백합니다(창 4,23-24).

결국 인간의 죄 때문에 대지는 저주를 받고, 인간은 저주받은 땅 때문에 수고하고 고통을 겪습니다. 이런 폭력과 고통의 시대, 라멕은 아들 노아에게서 피로 젖은 대지와 상처받은 인간을 위로할 인물을 기대한 것이지요.

구약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죄악이 땅 위에 가득차고 그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한 것만을 지어내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땅 위에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마음 아파하시며, 탄식하셨다고 합니다(창 6,6-7).

‘마음’은 성서에 따르면 단순히 감정의 자리가 아니라 지성과 의지의 자리입니다. 항상 악한 것만을 지어내는 ‘인간의 마음’과 인간에 대한 근심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마음’이 극명하게 대립됩니다. 인간처럼 창조주이신 하나님도 마음에 근심을 하시고, 또 기뻐하시기도 하고, 후회하시며, 분노하시기도 하고, 사랑하시기도 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위대성과 절대성을 축소시키거나 왜곡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그런 위험성을 무릅쓰면서까지 의인론적(擬人論的)으로 하나님을 표상한 것은, 하나님을 인간으로 끌어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 홍수를 앞두고 제작한 방주로 동물들을 이끌고 있는 노아 ⓒGetty Image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 형이상학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 사랑하고 분노하며, 구원하고 심판하시는 분, 기뻐하시기도 하고 근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강한 동요는 방관적이고 냉정한 무관심 속에서 인간을 심판하는 신(神)이 아님을 암시해줍니다. 하나님은 분노하시면서도 불쌍히 여기시고, 심판하시면서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 2 >

그런데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창 6,8). 노아는 저주받은 땅 때문에 고통 받는 인류에게만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시는 하나님에게도 위로가 된 것입니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창 6,9)이었기 때문입니다.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 구약성서의 관점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바르게 갖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의로움’은 법률적 개념이 아니라 신학적인 관계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한 사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도덕적 무결함이나 무죄가 ‘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도무지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의 약속을 도저히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 3 >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도 쓸어버릴 것을 결심하십니다. 모든 세상이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쓸어버리다’는 히브리어로 ‘마하’인데,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리다’(출 17,14; 32,32-33) 혹은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없애다’(왕하 14,27)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주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죄를 묻는 분’(출 32,34)이십니다. 그리고 심판은 단지 ‘쓸어 없애는 것’, ‘멸절’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리는 것, 하늘 아래에서 그 이름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 그 자체보다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는 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것이야말로 죽음보다도, 아니 사람들이 기억하지 않는 것보다 더 참혹한 심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신약성경에서도 믿음의 조상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노아는, 하나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하여 경고하셨을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가족을 구원하였다’(히 11,7)고 증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노아가 의로운 사람이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홍수 심판 의도를 모르면서 방주를 완성했다는 데서 드러납니다. 마른 땅 위에 배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히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순종과 신앙에 대한 시험이었고, 노아는 하나님의 계획을 모른 채 다만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증언했듯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입니다.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앞이 캄캄할 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거대한 방주를 만듭니다. 대략 길이가 150미터, 폭이 25미터, 높이가 15미터에 이르는 전나무로 만든 방주 안으로 노아는 식구들과 함께 ‘모든 정결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그리고 부정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두 쌍씩, 데리고 들어가야 했습니다.’(창 7,1-2)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옛 질서, 이른바 ‘적폐’(積弊)를 완전히 청산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 깨끗하고, 흠이 없고, 훌륭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만을 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노아에게 ‘정결한 짐승’만이 아니라, ‘부정한 짐승’도 함께 데리고 방주에 들어가도록 명령하십니다.

홍수로 온 세상을 쓸어버린 후, 다시 시작될 새로운 세상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정결한 짐승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부정한 짐승도 함께 새로운 창조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비밀입니다.

노아의 방주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들어갔던 것처럼, 이 세상의 그 어느 조직과 달리 교회라는 공동체는 그 누구든지, 그 어떤 자격과도 관계없이 모두 초대받은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집단도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격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동창회는 같은 학교를 입학하고 졸업했다는 조건이, 스포츠 동호회에도 스포츠를 좋아하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심지어 가족도 혈연이라는 조건이 있지만, 오직 교회만은 – 이단을 제외하고는 – 그 누구의, 그 어떤 자격도 따지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용서받은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주장은 정당합니다.

< 4 >

홍수가 끝나고 땅이 다 말라 방주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의 표징으로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십니다. ‘무지개’로 번역된 히브리어, ‘케쉐트’는 본래 ‘활’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창 27,3; 사 5,28). 무기로 사용된 활을 하늘에 걸어 놓음으로써, 더 이상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홍수심판이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와 평화의 관계가 맺어졌다는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홍수심판은 결국 인간의 폭력 때문에 비롯된 것이고, 폭력으로 생명을 파괴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입니다: ‘생명이 있는 피를 흘리게 하는 자는, 내가 반드시 보복하겠다. 그것이 짐승이면, 어떤 짐승이든지, 그것에게도 보복하겠다.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에게도 보복하겠다.’(창 9,5)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계약이 일방적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의 계약,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 등 다른 계약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공동의 의무 규정을 수긍하는 형태로 체결됩니다. 오직 노아와의 계약만이 인간의 고백적인 수긍 없이, 인간의 의지에 선행하는 은혜의 보증으로서 일방적으로 주어집니다. 언약을 기억하고, 언약에 충실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인간 편에서의 어떠한 조건적 행동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인간 편에서의 약속 파기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은혜인 것입니다.

< 5 >

예수님도 노아 이야기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마도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시각에서 노아 이야기를 해석하십니다. 노아 시대에 홍수 심판이 오리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듯이, ‘인자’가 올 때도 아무도 모른다. 노아와 그 가족만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종말과 심판의 때에도 오직 일부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는 시각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36-44)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둑처럼 온다는 말씀이지요. 예고 없이, 뜻밖의 시각에, 갑작스럽게 온다는 것입니다. 그 시각을 모르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만 깨어 준비하고,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위기는 기회라고 말하지만, 모든 사람이 기회를 깨닫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깨어 때를 분간할 수 있는 사람, 빛의 갑옷을 준비한 사람, 주님의 빛 가운데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만 위기는 기회일 수 있는 것입니다. 격변하는 우리 시대, 우리도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시대의 위기를 깨닫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사람,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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