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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거나 교활하거나 - 야곱과 에서 이야기

기사승인 2020.05.26  1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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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8

< 1 >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특별히 에서를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성서는 사냥꾼인 에서가 잡아온 고기를 이삭이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장남을 더 귀하게 여기는 관습이나, 고기를 좋아하는 그의 특별한 취향 외에도 어쩌면 숨은 이유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송봉모 신부는 이삭의 그런 특별한 편애의 배경에는 이삭의 열등감을 두 아들에게 투사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삭과 그가 편애하는 에서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낳은 유일한 적자라는 이유로 어쩌면 지극한 보호와 사랑 속에서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갈등을 피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고, 집 안에만 있는 야곱보다 사냥꾼인 에서의 대범하고 외향적인 기질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삭이 이런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모리야 산에서 가졌던 공포와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혼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삭이 몇 살 때에 이런 경험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모리야 산으로 이삭과 함께 갈 때,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은 것으로 보아 아주 어린 아기가 아닌, 소년이었으리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놓은 아버지가 갑자기 날카로운 칼을 빼들고 자기를 잡으려고 했을 때, 이삭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성서는 이삭의 반응을 전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삭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어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진정한 장자이자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인 자신을 그동안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변한 것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했을까요? 아버지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 야훼는 장자를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는 신(神)인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과연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믿음 있는 사람이 할 짓인가?

물론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해피 앤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숫양 한 마리를 예비해 두셨고, 아브라함은 아들 대신 숫양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행복하게 모리야 산을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요청을 듣고 그 일을 그의 아내 사라와 상의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만일 그랬다면 사라의 반응은 어떠했을지도 우리는 단지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지요. 아마 기절했을지 모릅니다. 아니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저항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몰래 이삭을 데리고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 아닐까요?

그런데 성서는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일 후에 곧바로 ‘사라는 백 년 하고도 스물일곱 해를 더 살았다. 이것이 그가 누린 햇수이다. 그는 가나안 땅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에서 눈을 감았다. 아브라함이 가서, 사라를 생각하면서, 곡을 하며 울었다.’(창 23,1-2)고 합니다.

그리고 이삭은 어땠을까요? 아버지를 이전처럼 대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에게로 마음이 향하게 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삭은 마마보이로 자랐을지 모릅니다. 이삭이 리브가와 혼인한 것이 마흔 살이었다는 성서의 보도로 미루어, 그리고 혼인할 여자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에서 구해와 연애결혼이 아니라 일종의 중매결혼을 하게 된 것도, 이삭의 성격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삭이 왜 쌍둥이 아들들 가운데 특별히 에서를 더 사랑했는지, 그 이유를 심리적으로 설명하는데 그쳐야 할 것 같습니다.

< 2 >

에서와 야곱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사십 세에 맞이한 아내 리브가에게서 60세에 얻은 쌍둥이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이 이미 태속에서부터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우리 말 ‘싸우다’로 번역된 히브리 동사는 ‘두개골을 부수다’(판관기 9,53; 시편 74,14) 또는 ‘갈대를 찢다’(이사야 36,6)는 매우 거칠고 잔인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속에서부터 이렇게 에서와 야곱이 싸웠으니,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면서, 이 일을 알아보기 위해 주님께로 나아갔다고 합니다(창 25,22).

▲ Jan Victors(1619-1679), 「Jacob blessing Isaac」 ⓒGetty Image

그러자 야훼 하나님은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 25,23)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장자가 아니라 차남인 야곱이 야훼의 구원사의 주역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십니다.

어쨌든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큰 아들은 몸이 붉고 전신이 털 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에사오: 털이 있는)라고 했고, 후에 나온 동생은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야곱’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창 25,25-26). 그러나 에서의 신체적 특징을 가리키는 단어들은 에서라는 이름과 사실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살결이 붉다’에서 ‘붉다’를 가리키는 ‘아드모니’는 에서의 왕국 ‘에돔’을 준비시키고, ‘온몸이 털투성이다’에서 ‘털투성이’를 가리키는 ‘세아르’는 에돔 땅에 있는 산악지역 ‘세이르’를 준비시킵니다. 그러므로 에서라는 이름은 아마도 에돔과 세이르를 합성 축약시키면서 생겨난 이름일 수 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민중적 어원에 의하면 야곱이라는 이름을 ‘발 뒤꿈치를 잡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아켑’에서 유추하기도 하지만, 사실 ‘야곱’은 ‘야아코벨’의 약자로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장성한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고, 조용한 성격의 야곱은 장막에 거주했다고 합니다(창 25,27). 송봉모 신부에 의하면, 야곱이 천막 안에 살면서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는 것은 야곱이 ‘마마 보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천막은 여성의 세계, 어머니의 세계를 표현한다면, 들판은 남성의 세계, 아버지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성격이 차분하고 주로 집에서 살았던 야곱을 어머니 리브가가 사랑했고,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인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다고 합니다(창 25,28).

사냥꾼인 에서와 목자인 야곱의 삶은 오랫동안 병존한 두 삶의 방식이었지만 언제나 긴장관계에 있었습니다. 방랑하는 야성적인 사냥꾼은 정착하여 보다 개화된 거주상태에서 사는 목자에게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야곱을 차분하고 얌전하다고 평가하는 시각은 정착한 농부와 목자의 시각입니다. 목자와 농부는 사냥꾼보다 잘 짜여진 도덕적 규율을 지닌 공동체적 삶을 산 것이지요. 이 이야기가 전해진 시대는 떠돌아다니는 수렵생활보다는 정주해서 가축을 치거나 농사를 짓는 것에 더 가치를 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죽을 정도로 허기져서 들어온 에서는 동생 야곱이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에서는 그 붉은 죽이 선지국인 줄 착각합니다. 나중에 그것이 선지국이 아니고 불콩죽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에서가 속았다고 생각했지만(창 27,36), 그 때는 따질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배고픈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불콩죽에 팔 것을 요청하고 야곱은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 것을 맹세하게 합니다.

에서가 왜 장자의 직분을 불콩죽과 떡과 교환했는지 그 이유가 한 문장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그것은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는 것입니다(창 25,34). 맹세는 맹세하는 당사자에게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는다는 것을(여호수아 9,19 참조) 에서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흔쾌하게 맹세하고, 죽과 떡을 ‘먹고 마신 후 나갔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에서의 성급하면서도 무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이 왜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사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장자상속권 때문이었는지, 선조들의 약속이 장자에게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장자 상속권을 팔고 살 수 있었던 당시 풍습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장자를 통해서 상속되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장자권에 집착했다는 것은 히브리 성경 원문에서 드러납니다. 허기진 에서가 팥죽을 요구했을 때, 새번역 성경은 야곱이 ‘형이 먼저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파시오’(창 25,31)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히브리 성경에 의하면, ‘형이 오늘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파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33절도 새번역은 ‘나에게 맹세부터 하시오’라고 했는데, 히브리 성경은 ‘오늘 나에게 맹세하시오’라고 하여, 야곱이 오랫동안 장자직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야곱 이야기에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에서와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의 편애입니다. 왜 같은 배 속에서 그것도 쌍둥이로 태어난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인 에서보다 차남인 야곱을 리브가가 더 사랑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거친 사냥꾼으로서 집을 거의 떠나 사는 에서보다 목축과 농업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야곱을 더 사랑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창 26,34-35).

마찬가지로 이삭도 에서를 편애했습니다. 성서는 이삭이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 맛을 들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이삭의 아버지 컴플렉스가 작용했을지 모릅니다. 자기를 희생 제물로 바치려던 아버지 아브라함을 이삭은 어떻게 이해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 후, 어쩌면 이삭은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약하고 소심한 성격의 이삭이었기에 어쩌면 자기의 반대 모습, 자기가 되고 싶었던 모습을, 거칠고 통이 큰 사냥꾼인 에서에게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마마보이 같은 야곱보다 더 사랑했을지 모릅니다.

< 3 >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장자권을 산 야곱과 장자권을 판 에서의 그 이후의 삶입니다. 형에게서 장자권을 샀다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다고, 마치 큰 일이라도 벌인 양 호들갑을 떠는데도, 야곱은 현실에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평생을 험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반면에 동생에게 두 번이나 속임을 당한 듯이 보였던 에서는 사실상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고,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땅에 삽니다. 아버지의 귀중한 유산인 우물들 덕분에 그는 더 이상 족속을 이끌고 유랑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에서의 성격을 우리는 더 잘 파악하게 되는데, 그는 동생에게 속임 당한 것을 곧바로 잊어버립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에게 유화의 제스처를 보이기 위해 재산을 미리 보내고, 만난 후에도 재산을 주겠다고 하지만, 에서는 전혀 야곱의 재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형제가 만났을 때 껴안고 우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오히려 에서가 통이 크고, 장남으로서의 기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를 놀라고 당황스럽게 합니다. 장자이며 사냥꾼으로서 건장한 체격에 선한 마음을 가진 에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모순덩어리이고 교활하고 매우 이기적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잔머리를 굴리는 비열한 야곱을 왜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 약속의 계승자로 증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비밀을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성경이 참으로 비열하고 교활하며 이기적이고 매우 현실적이며 모순으로 가득 찬 야곱의 인격을 전혀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품이나 인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누가 하나님을 찾느냐는 데 있습니다. 누가 과연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하나님과 씨름하느냐는 것입니다.

에서가 축복의 계승자가 되지 못한 이유를 성경은 그가 장자의 권리를 가볍게 여긴데서 찾지만(창 25,34), 우리는 에서가 꼭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장자직이라는 것이 도대체 판다고 팔아지는 것인가? 또 판다고 약속했다고 해서 팔려지는 것인가? 장자직이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질서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변경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닌가!’ 장자로서의 기득권은 생득적으로 결정된 운명이었고, 에서는 그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으며, 굳이 지켜야 할 것으로, 또는 쟁취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운명으로 보장된 자신의 삶을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은 사실 아무 것도 없으며, 단지 주어진 기득권 안에 머물러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사람, 세상이 나를 바꾸는 대로 순응하기는 하지만,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 운명에 도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세상이 물결치는 대로 휩쓸려 떠내려가기는 해도, 결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에서가 축복의 계승자가 되지 못한 것은 그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선하게 인격적으로 산다는 것이 아무 쓸모없는 일이란 말일까요? 야곱처럼 교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스럽게 이기적으로 살아도, 마지막에 하나님만 찾고 믿으면 결과적으로 복 받은 삶을 사는 것이 된단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은 인격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이었고, 야곱은 그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 야곱은 기도 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이 모든 은총과 온갖 진실을, 이 종은 감히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창 32,9-10).

그리고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인 죄과에 대한 벌을 죽을 때까지 받았습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속임수에 빠져 7년의 노동 착취와 20여 년의 종살이를 감수해야 했고, 천사와 씨름하다가 불구가 되었습니다. 세겜에게 자기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고(창 34,2), 베냐민을 낳다가 자기 아내 라헬은 목숨을 잃었으며(창 35,18),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노예상인에게 잃고(창 37,28), 기근 때문에 굶어죽게 되자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자식들을 보내야 하는(창 42,1-2),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는 이집트 왕 바로 앞에서 한 고백에서 드러납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 묻는 바로 왕에게 야곱은 이렇게 말 합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 47,9).

그렇습니다. 야곱은 130여 년 동안 진실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죄에 대한 보응을 그는 충분히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불안하고 왜곡된 인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의 인격의 심층부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했고, 그의 삶의 깊이에서부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자기에게 호소하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번뇌에 몸부림치며, 불안해하고, 도피하고 싶어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살아야만 하는 생의 과제를 부둥켜안고 고민하는 사람,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역사 안에 들어와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 하나님의 은총 없이도 스스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야곱 이야기의 숨은 뜻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야곱의 얼룩진 인격을 전혀 감추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은 도덕적 완전과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기 삶을 사는 인간,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운명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도전하여 운명을 바꾸는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사가 계승된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의 인격은 그의 생애의 가장 위기의 순간에 결정적으로 변화됩니다. 그 변화는 환도 뼈가 위골되는, 그리하여 절름발이가 되고, 남자로서의 힘의 근원이 무너지는 것을 대가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닙니다. 새 이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듯이, 야곱을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운명 같은 현실에 도전한 것은 야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도저히 바뀔 수 없는 것 같은 현실, 운명을 변화시킨 것은 야곱 자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기도할 때, 옷을 찢고 재를 뿌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감동시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야곱은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했고, 그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 그 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고, 또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죽었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목숨을 잃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창 32,30). 그래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붙였고, 야곱이 절뚝거리며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 그를 비춥니다(창 32,31). 천사와 목숨을 건 투쟁에서 바뀐 것은 야곱 자신만이 아닙니다. 해가 솟아올라 밝아진 세상도 이미 옛 세상이 아닙니다. 운명을 이긴 사람에게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 아닙니다. 현재는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가능성입니다. 이 약속을 의지하여 자신의 삶과 현실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야곱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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