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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찾는 하나님’ - 아브라함 이야기

기사승인 2020.05.05  17: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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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5

< 1 >

아브라함은 홍수 심판(창 6장-9장)과 바벨탑 사건(창 11,1-9) 이후, 노아의 후손이자 셈의 후손인 데라가 70세에 난 아들이었습니다(창 11,26). 데라는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다(창 11,27-32)고 합니다.

셈에서 아브라함에 이르는 족장들의 이름(창 11,10-28)들은 사람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북서 메소포타미아와 북 시리아의 도시 지명들을 반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하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란은 그의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습니다(창 11,28). ‘하란’은 ‘달(月)의 신’의 제의장소로서 일찍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도시들은 기원전 2천 년 대 말경에 아람인들이 이주해 들어갔던 지역들인데,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 있는 ‘우르’도 기원전 4천년대서부터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데라의 맏아들 아브라함은 처음에 ‘아브람’ 또는 ‘아비람’으로 불렸는데, 이는 ‘나의 아버지(신)는 존귀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왕후’라는 뜻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서는 특별한 것이 없고 고대 이스라엘과 근동의 작명 관습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갈대아인들의 우르에서 아브라함이 살고 있을 때,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창 12,1).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떠나라는 요구와 함께 시작합니다.

우선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왜 이런 하나님의 선택이 함이나 야벳이 아니라, 셈에게, 그리고 셈 인종 가운데서도 아르박삿에게, 그리고 아르박삿의 후손 가운데서 아브라함에게 내려졌는지 성경이 아무런 해명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의 삶에서 어떤 영웅적인 모습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런 인물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을 찾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를 떠나야했습니다. 고향, 곧 땅과 친척과 아비의 집은 사람의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자연적 기반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은 야훼가 장차 보여줄 땅에 대한 약속,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뿐입니다. 보여줄 땅, 약속은 아직 현실이 아닙니다. 이 땅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에게 보여주시려 한다는 것뿐이고, 그의 아내는 아직도 출산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에 아브람이 야훼의 말씀을 따라갔다’(창 12,4)고 간단하게 보도합니다.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이방인이었던 조상들이 어렵게 정착했던 땅에서 아브라함은 다시 이방인의 삶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알 수 없고 불안한 미래, 그러나 전적으로 야훼의 손 안에 있는 특별한 길로 자신이 인도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일까요?

또 다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아브라함 개인이나 그의 부족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야훼의 구원계획에 의해 아브라함에게 ‘지상의 모든 족속들’을 위한 ‘축복의 매개자’라는 역할이 주어진 것입니다(창 12,3).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났고(창 12,5), 그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겜 땅 모레에 도착합니다. 그곳에 있는 상수리나무 옆에 제단을 쌓고(창 12,7), 그는 점차 남방으로 옮겨갑니다. 세겜은 이집트의 파라오 세소스트리 3세(주전 1887년-1849년 재위)가 이미 언급한 도시라는 점에서 가나안의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의 하나였으리라 추측합니다. 상수리나무는 ‘신탁의 트레빈 나무’로 알려져 있는데, 이 나무는 가나안 제의 장소의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말로 ‘상수리나무’로 번역된 트레빈 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수의 총칭입니다.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상수리나무는 참나무의 일종으로, 도토리가 열린다 하여 도토리나무라는 별명도 주어져 있습니다. 성경 식물학자들은, 상수리나무라고 번역된 이 나무는 참나무나 트레빈 나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상수리나무로 번역된 것은 중국어 성경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참나무류는 성경시대에서 수목식생의 9할을 차지하리만치 가장 많은 나무였습니다. 그 중에서 트레빈 나무는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틴, 아라비아 등 지중해 연안에 널리 분포하는 비교적 많은 큰 낙엽수로서 대개는 독립수로 구릉지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절에는 야훼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에서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를 보내 아들을 낳을 것을 예고해 주었다고 합니다. 사무엘하서 18장 6절부터 14절은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아들 압살롬이 전쟁에서 패하자 노새를 타고 도망치다가 큰 트레빈 나무의 무성한 가지에 긴 머리가 걸려서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을 때, 요압이 그를 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보도합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돌로 쳐 죽인 곳도, 트레빈 나무의 골짜기입니다(삼상 17:19).

참나무는 그리스나 로마신화에서도, 신성하게 생각하여 많은 전설이 전해져 오며, 여러 종교에서 힘과 장엄함의 상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야훼께 처음 제단을 쌓은 곳, 트레빈 참나무는 이교도들의 성소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교적 성소로 여겨진 트레빈 참나무를 잘라 없애고 거기에 야훼에 바치는 제단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참나무 옆에 제단을 쌓음으로써 이교적 전통과 공생(共生)의 길을 걸었던 것이지요.

그 때에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갑니다(창 12,10).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회의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약속의 땅임에도 불구하고(창 12,7)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한 것이지요. 그는 신앙의 사람이 아니라, 의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래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 누이라고 소개하고, 그 때문에 아내를 애굽의 바로에게 빼앗기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소심하고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창 12, 11-16). 그런데 이런 일은 아브라함이 가데스와 술 사이의 그랄에 거류할 때도 반복됩니다(창 20,1-18).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래를 데려갔을 때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랄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사래를 내준 것입니다.

조카 롯과 헤어질 때에도 아브라함은 목자끼리 다투게 하지 말자고 제안하면서, 롯이 좌하면 그는 우하고, 롯이 우하면 그는 좌하겠다고 말합니다(창 13,8-9). 좋게 보면 양보의 미덕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지만, 부족의 족장으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아기를 출산하지 못하는 사래가 애굽 사람 여종 하갈을 첩으로 주고, 하갈이 임신하여 본부인인 사래를 멸시하자, 사래는 임신한 하갈을 i아냅니다. 임신한 첩이 쫓겨날 때에도 아브라함은 일부다처제가 공인된 사회에서 무력하기만 합니다. 물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가 이 이야기의 핵심이지만, 가장으로서의 아브라함의 모습은 결단력 있는 인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땅 산에서 번제로 드리는 사건이었습니다(창 22, 1-14). 이 이야기는 고대 가나안의 어린이 희생제사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가정되어 왔습니다. 당시 신에 의해 요구된 어린이 희생 제사를 동물희생제사로 바꾸는 것을 정당화시켜준 설화라는 것이지요.

이런 요구를 들었을 때, 아브라함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게 준 외아들을,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후계자를 번제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에 그의 ‘모든 과거와 현재’(고향과 친척과 부모)로부터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 이제는 그의 ‘모든 미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지요.

▲ 평범한, 너무 평범한 아브람을 부르셔서 믿음의 조성 아브라함으로 성장시키신 하나님.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Getty Image

물론 성경은 처음부터 분명하게 이런 요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한 것임을 밝힙니다. 사람의 신앙과 충실성을 알아보기 위해 하나님께서 교육적인 시험을 내린다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시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냉혹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성경이 이런 상황에 처한 아브라함의 내면을 전혀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3일 동안 길을 갔습니다. 그의 복종은 확실했고 일시적인 동요도 없었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깊은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이르러서도 아무 말 없이 행동만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잔혹한 이야기의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막 죽이려고 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그를 불러 막습니다. 그리고 ‘네가 네 아들 독자까지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삭 대신 수풀에 뿔이 걸려있던 숫양을 아들 대신 제물로 바칩니다.

자,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 시험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선물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선물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재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선물을 참으로 선물로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전승했던 후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들처럼 역사 속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신의 권리 주장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자유로운 역사의지에 의해 이삭을 살게 하셨던 하나님의 의지에서만 찾았습니다.

후대의 유대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돌아온 다음 이 사건에 대하여 들은 사래가 여섯 차례 소리를 지르고 죽었다고 합니다. 사래는 127세에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었고, 헷 족속인 에브론의 소유인 밭과 굴을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산 아브라함이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했다고 합니다(창 23,19). 그 후 아브라함도 175세에 죽어 자기 열조에게 돌아가는데,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사래가 매장된 막벨라 밭 굴에 그를 장사합니다(창 25,7-10).

< 2 >

우리는 잠시 아브라함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은 세계 3대 종교가 믿음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로 경외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늘의 별처럼 그렇게 많습니다. 인류의 다수를 차지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무슬림이 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고, 그에게 땅을 약속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거의 4천년이 지난 지금도 이 약속을 증거로 이스라엘 땅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무슬림도 아브라함을 그들의 믿음의 조상으로 생각합니다. 무슬림인 아랍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느낍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메카에 성전을 지었고, 대순례의 기간에 모든 무슬림들이 지나가는 카바(Kaaba: 메카에 있는 회교의 네모진 영묘)의 한쪽 구석에 있는 돌도 언젠가 아브라함이 세운 성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무슬림들도 자신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교 역사상 위대한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과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그리스도교를 다른 많은 종교들로부터 구별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3대 종교가 모두 믿음의 조상이라고 고백하는 아브라함의 삶을 우리가 위에서 살펴봤듯이, 우리는 그의 삶에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만큼 존경할만한 믿음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의 삶은 언제나 빛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짙은 어둠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가나안으로 들어간 후에, 가뭄이 들자 그는 재빨리 그 곳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그렇게 일찍 떠나는 것은 그의 불신앙의 표징입니다. 그는 의심이 많고 하나님의 약속을 회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어려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입니다. 자기 아내를 왕에게 빼앗길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는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면서 가슴만 태우는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태도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절대로 이상적인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영웅의 모습도 성자의 모습도 우리는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류의 3대 종교들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고백하는 것일까요? 그의 인격의 비밀은 그의 경건한 삶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비난받지 않을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는 데 있지도 않습니다. 또 그가 종교적인 영웅이나 초인으로서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능가했다는 데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증언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인격의 비밀은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다는데, 다시 말해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거나, 한번 가지면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매 순간 하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잠재력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능력이 없어지면 믿음도 사라질 것입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주고 싶은 분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때에만 우리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선물인 까닭, 내가 내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내가 나를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나를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확실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까닭은 하나님 자신이 이 사랑을 유지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우리 자신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안에 있습니다.

우리말에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할 때, 이것은 ‘나는 네가 나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임을 확신 한다’, 혹은 ‘나는 너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기대와 능력과 관계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믿음은 우리의 기대와 능력과는 무관합니다. 우리말 ‘믿음’을 다석 유영모 선생은 ‘밑 소리’라고 풀이했습니다. 믿음이란 바닥 소리,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이지요. 내 귀, 내 입, 내 눈을 막아야 들리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그 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 이것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히브리서 기자가 증언하듯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고,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것들만 따라갑니다. 미래가 보장되었다는 확신이 들 때만 현재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갔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입니다. 치밀하고 현실성 있게 계산되고 계획된 미래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열려있고, 그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희망과 절망, 기대와 실망, 환희와 좌절의 가능성이 교차하는 불확실성의 한 복판에 자신을 무작정 던지는 것은 쉬운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건곤일척’(乾坤一擲), 하늘과 땅을 걸고, 즉 결과를 오직 하늘에 맡기고 승패와 명운을 걸어 마지막으로 거는 승부입니다. ‘건곤일척’, 홍구(鴻溝) 강을 사이에 두고 휴전했다가 마지막 전쟁에서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유방을 노래한 당나라 최고의 문장가 한유(韓愈)가 기원전 203년에 쓴 ‘과홍구’(過鴻溝)라는 칠언절구에 나오는 말이지요. 유방에게 건곤일척은 천하통일을 위해 항우에게 던진 승부수였지만, 아브라함에게 건곤일척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건 승부수이자, 동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건 승부수’였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100세에 겨우 얻은 유일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할 것인가, 건곤일척의 기로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은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선택하셨던 아브라함을 포기하고, 자신의 약속을 실현하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져야 하시게 된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승부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이름을 걸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자신의 믿음을 걸었습니다.

삶의 매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건곤일척’해야 할 상황에 처한다는 것은 사실 힘들고 불행한 일이고 또 아무리 신앙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살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에게 승부수를 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건곤일척’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신앙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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