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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살피시는 하나님 - 하갈 이야기

기사승인 2020.05.19  17: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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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7

< 1 >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소유인 이집트 출신의 여종입니다. 사래가 아기를 출산하지 못하자, 사래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동침하여 집안의 대를 이어가라고 합니다. 그 때가 아브라함과 사래가 가나안 땅으로 이주해온지 10년이 지난 뒤라고 하니, 아브라함이나 사래도 무던히 아기를 기다려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임신 가능성을 기대할 수도, 또 기다릴 수도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아브라함과 자신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약속을 잊은 하나님 대신에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취하게 합니다. 하갈은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갈은 자신의 사랑과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사래의 몸종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갈이 임신을 합니다. 부족장의 대를 이을 맏아들을 임신하자, 하갈이 본부인이며 자기 여주인인 사래를 깔보기 시작합니다. 사래는 남편에게 따지듯 항의합니다. ‘내가 받은 이 고통은, 당신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나의 종을 당신 품에 안겨 주었더니, 그 종이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서, 나를 멸시합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나 사이를 판단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창 16,5)

하갈이 임신한 것으로 봐, 불임의 책임은 사래에게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보면, 사래는 본부인으로서의 권위와 권한을 지키는 당당한 여인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소극적인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래에게 말합니다: ‘하갈은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창 16,6)

< 2 >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래는 하갈을 학대합니다. 학대를 못 견딘 하갈은 임신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사막으로 도망갑니다. 수르로 가는 길 목, 사막 우물가에서 임신하여 무거운 몸을 쉬고 있는 하갈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며 살라고. 그리고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이스마엘’,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 여종 하갈이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고통 받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집트 여인인 하갈은 처음으로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엘로이’, 곧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지어서 불렀습니다.

‘보시는 하나님’, 이방인 여종이 붙인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갈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난 곳,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는 샘의 이름도 그래서 ‘브엘라해로이’, ‘나를 보시는 살아계시는 분의 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는 분이신가? 하나님은 우리의 절규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신가? 우리의 대부분의 일상은 하갈의 이런 고백을 승인할 수 없게 합니다.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보다, 우리를 보지 않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무관심한 하나님을 우리는 더 많이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다면, 과연 ‘하나님은 어떻게, 어디에서 우리를 보고 계시는 것’일까요?

▲ Francesco Cozza, 「Hagar and the Angel in the Wilderness」(1665) ⓒWikipedia

마틴 루터는 이 말씀을 ‘분명히 나는 나를 뒤에서 보신 분을, 여기에서 보았습니다’(Gewiss habe ich hier gesehen den, der mich hernach angesehen hat)로 번역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내가 여기서 뒤에서 나를 보시는 분을 보았단 말인가!’ 또는 ‘나는 나를 뒤에서 살피시는 그 분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독일어 ‘sehen’과 ‘ansehen’은 ‘본다’는 의미는 같으나, ‘ansehen’은 훨씬 더 가까이, 직접적이고, 능동적이고, 인격적으로 본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더 직접적이고, 능동적으로, 인격적으로 보신다는 것이지요.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보시는 하나님’, 다시 말해 ‘뒤에서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우리를 보시면서 인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우리 뒤에서 우리를 보시고 보살피면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빛은 앞에서 비추면 눈이 부시어 볼 수 없습니다. 우리 등 뒤에서 비출 때 오히려 우리는 앞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등 뒤에서 비추면 길 위에 우리 자신의 그림자가 생깁니다. 빛이 인도하는 길 위에도 그림자는 있는 법, 그 누구의 그림자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그림자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갑니다.

< 3 >

우리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언제나 빛나고 환한 것은 아닙니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도 있는 법, 아니 빛이 있어야 그림자도 있는 법, 믿음이 언제나 밝고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불행을 없애거나 피해갈 수 있는 비밀스런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하갈은 다시 여주인인 사래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사래의 질투와 학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그러나 하갈은 이미 혼자가 아닙니다. 배 안에는 아브라함의 가문을 이어갈 아들, 이스마엘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여종의 몸을 통하여 또 다른 위대한 한 부족을 이룰 것을 약속하십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히 11,1). 바라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아직 현실이 아니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이미 본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를 이미 이루어진 현재로 확신하고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하갈은 다시 사래의 질투와 학대가 기다리는 일상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녀가 만난 하나님은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손으로 만든 우상은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시편 115,5-7),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방인 여인인 하갈의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고(출 3,7), 모세를 보내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고통 받는 우리를 뒤에서 보시는 하나님,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도 들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을 보지 못할 때에도, 아니 우리를 보고 계시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에도, 그 분은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 뒤에서!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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