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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

기사승인 2020.04.14  17:4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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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2

< 1 >

성경인물탐구 첫 번째 시간에 우리는 창세기가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벨론 포로기 동안 유대인들은 ‘에누마 엘리쉬’ 같은 창조설화를 비롯하여 여러 측면에서 바벨론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나라를 잃고 성전도 무너져, 제의공동체로서의 정체성마저 사라질 위기감, 그들의 문화적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에 비견할 만한 엄청난 지적 노동에 착수했는데, 바로 거룩한 책, ‘토라’를 편찬하는 일이었습니다. ‘편찬’되었다는 말은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편찬자가 과거로부터 자신에게 이른 여러 가닥을 가져와, 그것들을 비교하고, 정정하고, 조각을 잘라내고, 조각을 붙이고, 조정하고, 최대한 능력을 발휘해서 서로 모순이 일어나지 않게 다듬고, 함께 엮었다는 뜻입니다.

토라는 히브리인을–매우 취약한 특정 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부족민을-유대인으로 바꾸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이제 히브리인은 ‘책의 사람들’(암 하세페르/Am HaSefer)이라고 부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토라의 첫 번째 책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로 시작한 것이지요.

< 2 >

유대인들은 비록 바벨론의 창조설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바벨론과 주변 근동의 창조설화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차이: 바벨론 창조설화에 의하면 창조는 신들의 짝짓기와 투쟁, 폭력과 살인에 의해 이루어졌고, 인간의 창조는 신들이 쉴 수 있기 위한 노동력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함으로써,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단순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창조 후, 신의 휴식이라는 같은 모티브가 성경과 바벨론 창조설화에 모두 등장하지만, 성경은 신의 휴식을 위하여 인간에게 노동이 부여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노동은 동산을 가꾸라고 위임된 풍성한 삶을 위한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서 이해됩니다.

두 번째 차이: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함으로써, 인간에게 신적 위상을 부여했습니다. 인간을 단지 신들을 위한 노동력으로 보는 바벨론 창조설화와 다른 점이지요.

세 번째 차이: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의 이름을 붙이게 하여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를 설정한 것도 성경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의 독특성입니다.

< 3 >

자, 그러면 이제, 아담과 하와 이야기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보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오해는 하나님을 ‘의인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는 성경의 하나님이 인간과 대화를 하시고, 때로는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때로는 슬퍼하시고 기뻐하시는 모습 등으로 표상되는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형태의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이성, 양심 등에서 찾기도 합니다.

▲ 1015년경에 만들어진 베른바르트 청동문 한 부분에 있는 ‘하나님의 아담과 하와 심판’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 ⓒGetty Image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증언을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품성에 참여하고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단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타락과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와가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를 뱀의 유혹에 넘어가 따먹고 남편에게도 먹게 했기 때문에 동산에서 추방당했다고 말합니다. 이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가 ‘선악과’로 불리게 된 것은 뱀이 이 열매에 대해서 언급한 말 때문입니다: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 3,4-5)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를 다룬 회화에서 선악과는 대부분 ‘사과’ 혹은 ‘석류’로 그려져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석류’는 다산을 상징하고, ‘사과’도 그리스 신화에서 ‘아름다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유혹자인 ‘뱀’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뱀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서 가장 간교하였다’(창 3,1)고 합니다. 뱀은 간교했을 뿐, 뱀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말이지요. 전통적으로 뱀은 인간을 유혹하는 사탄으로 이해되었는데, 문제는 그렇다면 사탄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인 욥기에서도, 사탄은 그 유래를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악과 사탄을 만드실 수는 없기에 유대교와 이슬람은 사탄을 타락한 천사로 이해했습니다.

어쨌든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지요. 그 어떤 유혹과 시험보다 피조물인 인간이 신적 존재가 된다는 것만큼 강력하고 치명적인 유혹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인간이 본 것은 하나님처럼 된 자신이 아니라, 벌거벗은 자신이었습니다. 눈이 밝아진 인간은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고 합니다(창 3,7). 고대 교부들은 벗은 몸을 성적 욕망이 없는 상태, 타락 이전의 순수한 상태로 해석했고, 벗은 몸인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을(창 3,10) 죄의 결과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벗은 인간에게서 수치를 보았고, 성적 욕망을 원죄로 이해했고, 몸을 가린 무화과나무 잎을 ‘남근’의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거의 대부분의 회화작품들은 아담과 하와가 성기를 가리고 있는 것으로 형상화한 것도 그런 전이해 때문입니다.

< 4 >

전통적으로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원죄’론의 시각에서 해석되어 왔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는 ‘불순종의 죄’이고, 인간이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성적 결합을 통해 유전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의 성적 욕망 자체가 죄악시된 것입니다. 이런 시각이 그리스도교를 지배하게 된 것은 누구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relius Augustinus, 354-430)의 영향이 큽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시대 인물이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동시에 역겹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는데, 브리튼 태생의 수사 펠라기우스(Pelagius, 360?-420)였습니다. 기원후 390년에 로마에 도착하여 학식의 폭, 웅변, 금욕적인 소박한 생활로 모든 사람에게 감명을 준 펠라기우스는 도덕적 낙관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순수하게 태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갓난 아기들이 특별한 덕성을 부여받고 세상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악의 오점을 안고 들어오지도 않는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 악이 아닌 선을 선택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며, 그들의 최초의 불복종 행동의 결과가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하지만 먼 과거의 그 행동이 불가피하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우리를 빠뜨리지는 않는다. … 우리는 사람이 늘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짓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가 타고난 죄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고, 갓난아기의 순수를 강조한 것은 이 자유를 방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경악했습니다.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의해서 태어날 때부터 타락하여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는 그의 관념 전체가 공격을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공격하여 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길고 신랄한 신학논문을 써서 로마로 보내면서, 교황궁에 누미디아의 종마 80마리라는 큰 선물도 보냈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유죄선고를 받고 파문을 당하여 이집트로 추방되어 420년경에 죽었습니다. 이 교리 싸움에서 만일 펠라기우스가 승리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아우구스티누스가 승리했고, 그의 신학이 서구 그리스도교의 정통을 형성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승리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성을 죄악시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 혐오의 흐름이 쏟아져 나오게 될 수문을 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쓰고 나서 몇 년 뒤에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은 것에서 ‘자만, 신성모독, 간통, 탐욕, 심지어 살인’까지 죄의 목록 전체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 5 >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형상화한 작품 가운데, 1015년경에 만들어진 베른바르트 청동문이 있습니다. 이 청동문의 한 부분에는 ‘하나님의 아담과 하와 심판’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이 있는데,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아담을 가리키시고, 아담은 한 손으로는 하체를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와도 한 손으로 하체를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뱀을 가리킵니다. 죄의 책임은 자신이 아니라, 타자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책임전가, ‘그건 너’, 요즘 말로 하면 ‘내로남불’도 호모 사피엔스의 원초적인 특징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벗은 몸’은 원죄로서의 성욕이나 수치심이 아니라, ‘보호받지 못함’의 상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옷은 취향과 신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옷의 원초적 의미는 보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후에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던 것입니다(창 3,21).

그렇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인간의 타락과 실낙원 이야기의 초점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에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처럼 되어, 자기 생명의 주인이 되려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었으나, 눈이 밝아져 그들이 본 것은 하나님처럼 된 자신이 아니라, 벗은 몸, 곧 보호받지 못하는 자신의 운명을 본 것이지요. ‘보호받지 못함’은 두려움을 야기합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 없이, 홀로 서기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이것이 낙원에서 추방당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창 3,22)고 생각하시고, 낙원에서 추방하십니다. 죽음은 축복입니다. 죄 가운데서, 두려움 가운데서 끝없이 산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생명의 완성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있다는 것, 고통스런 삶에 끝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구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 다시 말해 우리 삶에 끝이 있다는 것은 죄의 결과, 타락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이자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낙원에서 인간을 추방하시는 하나님은 그러나 인간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 주십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보호를 거절한 인간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이 성경의 창조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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