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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웃게 한 여인 - 사라 이야기

기사승인 2020.05.12  17: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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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6

< 1 >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경에 살았던 인물로, 갈대아 지방 우르 지역의 다신교 신앙을 지닌 부족에게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그곳은 달(月)의 신인 ‘신’(Sin) 숭배의 중심지로 오늘날 페르시아 만(灣) 근처의 텔 무가야르(Muggayar)입니다. ‘텔 무가야르’는 ‘석수장이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현재 이라크의 바벨론 유적으로부터 약 224킬로미터 남쪽에, 그리고 페르시아 만에서 북서쪽으로는 약 2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은 대부분 다신(多神) 사회였고, 도시와 왕권에 뿌리를 두었지만,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은 반유목민인 히브리라는 변두리 집단의 유일신 신앙이었습니다. 가나안에는 약 150여개의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바알’은 ‘하늘의 주’로서 폭풍우와 비의 신인데, 최고의 신인 엘과 아세라의 아들로서 풍요를 관장합니다. ‘아세라’는 ‘바다의 귀부인’, ‘다간’은 ‘농작물의 신’, ‘모트’는 ‘죽음의 신’, ‘라세프’는 ‘지하세계의 신’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주일을 나타내는 요일은 수메르의 일곱 신들의 이름을 따른 것인데, 수메르의 가장 중요한 신들은 하늘, 바람, 산, 물, 달, 해, 금성의 신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르를 특별히 ‘갈대아 우르’라고 부르고 있는데, 여기에서 ‘갈대아’(아카드어는 kaldu; 히브리어는 ‘카스딤’)는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주변의 늪지대나 호수 지역에 거주하였던 유목민들을 지칭하며, 그들은 아람족에 속하는 한 분파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상인 히브리 민족은 기원전 4,000년 경, 극히 작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노아의 후손이자 셈의 후손인 데라가 70세에 난 아들인데(창 11,26),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며느리 사래,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아내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했다(창 11,27-32)고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이미 사래와 결혼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공주’를 뜻하는 오래된 형태의 이름입니다.

< 2 >

사래가 등장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그 곳에 기근이 들자 아브라함은 곧바로 이집트로 피난을 갑니다. 피난길에 아브라함은 이집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인 아리따운 사래를 빼앗아 갈 것이 두려워, 사래가 자기 누이라고 말하라고 합니다(창 12,10-13). 그 후의 일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결혼한 남편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자기를 누이라고 말하라고 하는 데도, 사래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마침내 이집트 바로가 자기를 취했을 때에도 사래는 무대의 뒤편에 서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의 혼인은 ‘족내혼’ 혹은 ‘동족혼’(endogamy)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자손의 계보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를 통하여 가부장적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버지는 같으나 어머니는 다른 사실상 형제자매였습니다(창 20,12). 이런 이유로 아브라함이 사라를 아내이면서 여동생이라고 주장한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지만(창 12,13; 20,2. 12), 어쨌든 아브라함의 태도는 약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하나님의 천사들을 대접하고 있는 아브라함과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라 ⓒGetty Image

사래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자기 여종 하갈을 취하게 하고, 임신한 하갈이 자기를 깔보는 것에 고통을 받아 아브라함에게 판단을 맡기는 장면입니다(창 16,16). 당시, 여자가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이중의 불명예스러운 낙인을 찍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하나는 가부장적이고, 높은 사망률을 보인 노동집약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실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에게 했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장애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후손을 보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몸종, 하갈을 붙여 주었고,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자유로운 신분이었던 사래와 달리 하갈은 가족 안에서 낮은 위치에 있던 노예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래의 몸종이었습니다. 사래가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었을 때에도, 여전히 하갈은 사래의 책임 아래 있었습니다. 하갈은 이집트에서 온 이방인이기도 했습니다. 하갈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이 이야기에서 예고된 긴장을 야기합니다. 만일 이방인인 하갈이 약속된 아들을 낳는다면, 이것은 족내혼을 시행해온 히브리인들의 전통과 갈등을 일으키는 혼외결합에서 생겨난 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임신한 하갈에 대한 사래의 시기와 질투는 하갈을 사막으로 도망치게 합니다(창 16,6). 그러나 후에 이삭을 얻은 사래는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추방시키라고 합니다. 이스마엘도 자기 아들인지라 아브라함은 몹시 괴로워했지만,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이 너의 씨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아들도 너의 씨니, 내가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추방합니다(창 21,11-13). 그리고 후일, 이스마엘은 트랜스 요르단과 북 아라비아 열두 지파의 시조가 되었습니다(창 25,12).

사래와 하갈은 사실, 모두 그들이 살고 있던 가부장 사회의 희생자이자 가해자입니다. 사래는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능력으로 판단 받는 가부장제도의 희생자였고, 하갈은 성과 신분에 의하여 이중적으로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사에서 사래가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어느 날,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곁, 자기 장막 어귀에 앉아 있는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가 나타나 사래의 출산을 예언합니다(창 18,1-15). 물론 이 사건 전에 이미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면서(창 17,1),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창 17,16)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표징으로 본래 ‘사래’라는 이름을 가졌던 아브라함의 아내의 이름을 ‘사라’, 곧 ‘여러 민족의 어머니’로 바꾸게 했습니다(창 17,16).

그 후 세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아내의 출산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자 말을 합니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창 17,17).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은 이집트 출신의 몸종, 대리모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으면서 살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에게 비아냥거리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체면을 살려주는 웃음입니다.

< 3 >

신약성경에서도 사래는 여러 번 등장합니다. 로마서 4장 19절은 사래의 불임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각시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 11절은 아브라함에서 사래로 초점을 옮기는데, 사래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할 능력을 얻게 된 것이 약속하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래는 가부장제도와 남편에 대한 여성의 종속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고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3장 6절은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면서 그를 주님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에 하갈은 율법 아래 사는, ‘지금의 예루살렘’에 사는 노예들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알레고리칼하게 해석되고, 사래는 본처로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유로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어머니로 묘사됩니다(갈 4,22-31).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내이자 이삭의 어머니인 사래 이야기에서도 드러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히 11,11)라고 말하지만, 사실 창세기의 사래는 천사들의 약속을 믿을 수 없어서 웃었던 여인입니다.

웃음에도 수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가가대소(呵呵大笑: 껄껄 웃음)부터 가소(假笑: 거짓웃음), 건소(乾笑: 건성으로 웃는 웃음), 경소(輕笑: 남을 업신여겨 웃음), 냉소(冷笑: 비웃는 웃음. 업신여겨 웃음), 대소(大笑: 소리를 내어 크게 웃음), 미소(微笑: 소리를 내지 않고 가볍게 웃음), 박장대소(拍掌大笑: 손뼉을 치며 크게 웃음), 실소(失笑: 참아야 할 자리에 툭 터져 나오는 웃음), 염화미소(拈華微笑: 붓다가 영산회에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보이자, 제자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하므로 그에게 불교의 진리를 주었다는 데서 나옴), 파안대소(破顔大笑: 활짝 웃음), 폭소(爆笑: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 등 정말 많은 웃음이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너털웃음, 눈웃음, 비웃음, 선웃음, 소웃음, 쓴웃음, 억지웃음, 찬웃음, 코웃음, 함박웃음, 헛웃음 등이 있습니다.

사래의 웃음은 어떤 웃음이었을까요? 여자였으니 분명히 너털웃음은 아니었을 것이고, 어쩌면 쓴웃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래에게 천사의 말은 덕담으로조차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고향을 함께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 아기를 가질 수도 없었는데, 임신할 수도 없는 나이에 웬 아들? 아니 고향을 떠날 때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키시지 않았는데, 이 천사들은 웬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웃음, 냉소였을지 모릅니다. 사래도 분명 아브라함 같은 신앙의 인간(homo fides)이 아니라, 불신의 인간(homo diffidentiae), 의심하는 인간의 전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 상식과 가능성을 넘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삭을 낳은 후, 사래는 혼자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나와 같은 늙은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듣는 사람마다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지’(창 21,6).

어쩌다 실수하여 늦동이를 본 늙은 여인의 웃음이 아닙니다. 이 웃음은 하나님이 주신 웃음입니다. 사래의 첫 번째 웃음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본 불신의 웃음이었다면, 두 번째 웃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본 믿음과 기쁨의 웃음입니다. 믿음은 ‘이미’의 삶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사는 삶,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기도할 때, 이미 기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하는 기도가 참 기도인 것처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단 한번만이라도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과 승부수를 건 경험이 신앙을 배우는 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과 씨름한 경험이 없는 신앙은 종교적 관념이거나 교양이고, 관념과 교양으로 만나는 하나님은 더 이상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신 승부수, 이해하기도 수용하기도 어렵고 힘든 그 승부수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처럼, 냉소가 미소로 변하는 길입니다. 이런 믿음의 길, 우리가 함께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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