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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자를 위한 땅의 외침 - 가인과 아벨 이야기

기사승인 2020.04.21  17: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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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 목사의 성경 인물 탐구 3

< 1 >

낙원에서 추방당한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여 가인을 얻었습니다. ‘동침하다’는 히브리어는 ‘야다’인데, 이는 ‘안다’, ‘이해하다’ 등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이 말은 ‘성관계를 갖다’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만, 성관계가 인간적 친밀감과 온전한 앎의 방식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출산한 하와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가인, 곧 ‘얻음’이라는 의미로 붙인 것인데, 이 말은 동시에 ‘창’(槍)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삼하 21,16).

우리말 성경에는 ‘남자 아이’로 번역되었지만, 원문에는 ‘한 남자’(이쉬)를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남자라는 말을 신생아에게 사용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요. 그래서 주석학자들은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으나, 가인 이야기에서는 여자에게서 남자가 나온 것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녀평등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 후 아담과 하와는 아벨이라는 이름의 동생을 낳았는데, 아벨은 히브리어로 ‘헤벨’인데, 그 뜻은 ‘숨’, 또는 ‘허무’를 의미합니다.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설명이 없지만, 이 이름의 뜻에서 우리는 그가 짧은 생을 살 것이라는 암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창 4,2). 이로써 전혀 다른 생존방식을 갖는 개별적인 직업들에로 인류의 분열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분열은 제단의 분열로 이어졌고, 인류의 형제애가 파괴될 만큼 심각해질 것을 암시합니다.

< 2 >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고 합니다. 약 7만 년 전에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고, 약 12,000년 전에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고, 약 500년 전에 시작된 과학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 수도 있는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롭게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 Peter Paul Rubens, 「Cain Slaying Abel」(1608년 혹은 1609년) ⓒWikipedia

오늘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성경의 창세기,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12,000년 전에 발생한 농업 혁명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농업혁명 이전, 인간은 250만 년 간 야생식물을 채취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사는 방식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이 대략 1만 년 전 달라진 것이지요. 인간은 씨를 뿌리고, 작물에 물을 대고, 잡초를 뽑고, 좋은 목초지로 양을 끌고 갔습니다. 인류가 농업으로 이행한 것은 기원전 9,500-8,500년경 터키 남동부, 서부 이란, 에게 해(海) 동부 지방에서였습니다. 밀을 재배하고 염소를 가축화한 것은 기원전 9,000년경이었습니다. 완두콩과 렌즈 콩은 기원전 8,000년경, 올리브나무는 기원전 5,000년, 포도는 기원전 3,500년에 재배가 시작되었고, 밀은 기원전 4,000년부터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농업혁명은 인구의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기원전 13,000년경, 사람들이 야생식물을 채취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면서 먹고 살던 시기에 팔레스타인의 여리고 오아시스 주변 지역이 지탱할 수 있는 인구는 기껏 1백 명 정도의 건강하고 영양상태가 비교적 좋은 방랑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기원전 8,500년 야생식물이 밀에게 자리를 내어준 뒤, 이 오아시스에는 1천 명이 사는 마을이 생겼다고 합니다.

< 3 >

농부였던 가인이 목자였던 아벨을 살해한 이 사건은 바로 이런 농업혁명기의 사회적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에게 땅에서 거둔 곡식을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습니다. 주목할 것은 가인과 아벨이 따로 따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제의의 차이는 단지 제물의 차이가 아니라, 공동체의 종교와 생활의 차이도 드러냅니다.

농부는 정착생활을 하지만, 유목민은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토지와 집에 대한 큰 집착이 없었습니다. 유목민에게 집은 언덕과 시내, 숲과 열린 하늘을 포함하는 땅 전체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종일 작은 밭이나 과수원에서 일했고, 가정생활은 나무나 돌, 진흙으로 지어져 면적이 몇 십 제곱미터에 불과한 비좁은 구조물, 즉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내 집에 대한 애착과 이웃으로부터의 분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자기중심적이 된 존재의 심리적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편애의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곡식제물보다 동물제물을 더 좋아하셔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른바 유목 문명과 농경 문명 사이의 문화적 충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두 문명 사이의 우열을 다투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땅을 경작하는 일을 맡겼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히브리서 11장 4절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보도한 것을 근거로, 종교개혁자들은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마음이 가인보다 아벨이 더 낫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성경이 아무런 이유를 밝히지 않는 것은, 제물을 받아들일지 말지, 어떤 제물을 반기실 것인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지 인간이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스스로 계신 분이신 하나님은 ‘은혜롭고 싶은 자에게는 은혜롭고, 자비롭고 싶은 자에게는 자비를 베푸시는 분’(출 33,19)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자신의 제물을 반기지 않으신 것에 대해 가인은 몹시 화가 나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얼굴이 아우에게 향하는 것을 시기했던 것이지요.

사람만이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물론 자기감정을 잘 감출 수 있어 도무지 얼굴을 보고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지만, 사람의 얼굴은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1890-1981)이 말한 것처럼, ‘얼골’, 곧 ‘얼이 들어있는 골짜기’와 같아,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나는 자리이지요.

화가 난 가인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걱정이 되었는지 하나님은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절박해지셨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위기에 처한 아들에게 퇴로를 열어주려는 아버지다운 말씀입니다. 비록 제물이 받아드려지지는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가인이 버림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떳떳한 사람은 얼굴빛이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이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했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했다는 올바르지 못한 일이 무엇인지 성경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반기지 않으신 이유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후 가인은 아우 아벨을 들로 꾀어내 쳐 죽였습니다. 오래 전에 독일에서 사람은 어떻게 죽는가? 라는 질문을 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사람은 맞아 죽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영상매체의 영향이겠지만, 사람이 총에 맞아죽든지, 칼에 맞든지, 주먹으로 맞아 죽는 것만 보아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다른 죽음의 형태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가인에게 묻습니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에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벨이 죽은 것을 몰라서 물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위치를 물은 것이 아니라, 가인의 마음과 행동을 물은 것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위치’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상태’에 대한 질문이지요.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은 타자(동생)에 대한 책임을 묻는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아담은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당돌하게 대답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형으로서 동생을 지키는 것은 가부장적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은 동생에 대한 책임을 타자 혹은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의 피, 곧 생명은 여전히 살아서 울부짖고 있다는 것이지요.

인류 역사상 최초의 형제살인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우를 죽인 형 가인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형벌을 내리십니다: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농사를 생업으로 삼은 가인에게 가혹한 형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 가혹한 것은 가인이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공동체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는 것은 곧 살해당할 운명이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가인은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고 말씀하시며,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에덴의 동쪽 어디에 놋이라는 지역이 있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놋’이라는 지명에서 히브리어 ‘nod’, ‘떠도는’(12절)이라는 뜻을 재발견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놋’이라는 지역은 ‘휴식이 없는 땅’을 상징합니다.

< 4 >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 이야기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왜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반기시면서, 형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을까? 곡식 제물보다 피 흘리는 동물 제물을 더 좋아하셨기 때문일까?

둘째, 하나님께서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으시자, 몹시 화가 난 가인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르셨단 말인가? 하나님은 가인의 아우 살인을 막으셨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치 아담과 이브가 금지한 열매를 먹을 것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을 수도 있었는데 왜 막지 않으셨느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셋째,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후, 죽은 아벨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무고한 사람의 피를 받아 마신 땅도 더 이상 효력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의 죄악이 땅, 곧 자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 5 >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 가인과 아벨은 농경문화와 유목문화 사이의 역사적 갈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시기와 폭력, 화와 (형제)살인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원형론적으로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시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1) 악의 또는 적대감, 반감, 적의, 원한. (2) 적극적인 해악, 위해, 가해. (3) 다른 사람이 소유한 이점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야기되는 반감과 억울한 감정.

‘시기’에 대하여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인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시기는 고유한 인간본성으로, 시기심에 사로잡힌 자는 고통과 고뇌에 빠질 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행복을 파괴하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린다. 시기는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스스로에 대한 도리에도 어긋나는 감정이다. 또한 시기가 자기 자신에게도 해로운 이유는 자기 장점이 다른 이의 장점에 비해 하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기는 사람들이 가장 부정하고 싶은 욕망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시기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 좁고, 비열하며, 쩨쩨하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기는 ‘결코 공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시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밀리에 계획되는 음모의 성격을 띱니다. … 뭐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악의, 냉혹하고도 은밀한 적의, 이룰 수 없는 열망, 숨겨진 증오와 원한이 시기의 중심에 덕지덕지 매달려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에서 일단 벗어난 인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데, 그것은 형제 살인이었습니다. 인간은 불가항력적인 힘(악마적인 세력)에 사로잡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인간 본질의 일면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벨 살해는 당시에 알려져 있던 인신(人身) 제사였다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서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바로 그 자리에서(제사), 즉 제단에서 죄를 저질렀다는 데 가인이 저지른 죄의 가공(可恐)스러움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가인 존 도미닉 크로산은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을 당시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장남이 상속권을 가지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대항문화의 시각에서 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형 이스마엘(창 16,11) 대신에 동생 이삭을 선택하시고(창 17,19), 형 에서(창 25,25) 대신에 동생 야곱을 선택하셨다는 것이(창 25,26) 그것이지요. 하나님이 강력한 가부장제를 뒤집어엎는 결정은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창 25,23)라는 선언에서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형인 가인보다 동생인 아벨을 선호하신 사건은 바로 그런 문화적 도전을 예비적으로 경고하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가인의 아벨 살해 이야기는 농부가 목자를 살해하고, 첫 번째 도시를 세웠으며, 그 후 폭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된 사실의 반영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은 인간이 죄를 지을 수도 있지만, 죄를 다스릴 수도 있는 자유의지와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죄는 피할 수 있습니다. 폭력이 점차 확대되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그런 폭력의 확대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인간문명이 정상적인 것이라고 간주하는 폭력은 인간 본성에서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폭력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며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아벨 살해는 최초의 형제살인의 사례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폭력의 원초적 기원을 죄로 간주한다는 성경의 증언입니다. 죄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동생을 살해한 가인을 하나님께서 처벌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땅이 농부 가인을 저주한 이유는 그가 동생의 피를 뿌려 땅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농부로부터 다시 수렵채취 생활자로 전락했습니다. 인간 행위로 인한 귀결이 하나님의 처벌로 잘못 해석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넷째,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가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인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이, 바로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불순종하여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 더 이상 보호받을 수 없게 된 것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신 것처럼, 유랑하는 신세가 된 두려움에 사로잡힌 가인에게 하나님은 표를 찍어 주셔서,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표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문신 또는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표는 동생을 살인한 죄인인 가인도 하나님에 의해 보호되는 신비스런 보호관계를 지시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핵심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피의 외침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 억울한 희생은 자연이 보복한다는 것, 하나님은 살인자도 보호하시면서 새로운 출발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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