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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성전과 지방 산당의 거룩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기사승인 2021.04.15  14: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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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㉛

남색하는 자?

이번 글은 지난 두 주 동안 살펴보았던 남왕국의 왕 ‘아사’와 ‘여호사밧’이 시행했던 개혁 조치에 등장하는 ‘남색(男色)하는 자’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들에 대해 가볍게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최근 문제되고 있는 동성애 이슈를 떠나서, 이스라엘에서 행해졌던 종교의식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에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남색하는 자’는 히브리어로 ‘카데쉬(qadesh)’인데, 「열왕기」에는 이 단어가 네 번 나타납니다(왕상14:24; 15:12; 22:46; 왕하23:7). 이들에 관한 언급은 남왕국 ‘르호보암’ 때에 처음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14장 24절」은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들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카데쉬’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념은 『라이프 성경 사전』의 정의와 비슷할 것입니다. 『라이프 성경 사전』에서 ‘남색’을 찾으면 이렇게 나옵니다. “이방 신전의 남자 사제(male shrine prostitute)와 제사 의식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성행위를 비롯하여 동성끼리의 매춘(음행) 행위를 포함한 말. 성경에서는 이런 자를 일컬어, ‘남창’(男娼, 신 23:17; 욥 36:14), ‘남색하는 자’(왕상 14:24), ‘개 같은 자’(신 23:17-18) 등으로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카데쉬’는 이방 신전에 종사하며 성행위를 통해 제사 의식을 행하는 남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성의 경우에는 ‘커데샤(qədesha)’가 사용됩니다. ‘카데쉬’나 ‘커데샤’는 ‘구별하다’, ‘성별하다’, ‘거룩하다’는 의미를 가진 ‘카다쉬(קדשׁ)’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같은 어근을 가지는 단어로는 ‘거룩한’이라는 뜻의 ‘카도쉬(qadosh)’가 있습니다.

단어의 어원만 따지고 본다면, 이들은 ‘거룩한 자들’, ‘성별된 자들’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저희는 먼저 ‘거룩한 자들’로 번역될 수도 있는 ‘카데쉬’나 ‘커데샤’가 왜 ‘남색하는 자’ 또는 ‘창녀’로 번역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카데쉬’나 ‘커데샤’의 의미를 쫓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들을 ‘카데쉬’와 ‘커데샤’ 그대로 표기하겠습니다.

열왕기에 나타난 ‘카데쉬’

「열왕기상 15장 12절」을 보면 남왕국 ‘아사’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며 ‘카데쉬’를 그 땅에서 내쫓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22장 46절(히브리어 성경에서는 47절)」은 남왕국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가 다 내쫓지 못한 ‘카데쉬’를 그 땅에서 내쫓았다고 기록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열왕기상 22장 46절」의 기록이 잘못된 반복이며 후대의 첨가라고 보기도 합니다. ‘아사’가 이미 내쫓은 ‘카데쉬’를 또 내쫓았다는 점은 실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열왕기상 22장 46절」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때에 남은’이라는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점을 보았을 때, 꼭 후대의 첨가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들의 존재는 당시 남왕국에 존재했던 ‘산당’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산당’과 ‘카데쉬’는 둘 다 남왕국 내에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남왕국 곳곳에 존재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14장 23절」은 남왕국 ‘르호보암’ 때에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이 세웠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땅에 ‘카데쉬’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열왕기상 15장 12-14절」은 이 목록을 역순으로 나열하며 ‘아사’의 개혁을 보여줍니다. ‘아사’는 ‘카데쉬’를 내쫓았고, 우상을 없앴으며, 어머니가 만든 아세라 상을 찍어 불살랐습니다. 다만 그는 산당을 없애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산당을 없애지 않은 것은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열왕기상 22장 43절」은 그가 야훼 앞에 정직하였으나 여전히 산당은 폐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호사밧’에 대한 기록 속에 우상과 아세라 상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카데쉬’가 남아 있었기에 그들을 내쫓았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카데쉬’가 산당이나 우상 숭배와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는 점은 이들을 단순히 ‘남색하는 자’라고 번역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열왕기상」의 기록 속에서 ‘카데쉬’는 우상 제의와 관련된 어떤 집단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아사’의 종교개혁에 의해 우상과 아세라 상은 사라졌습니다. 그는 ‘카데쉬’ 집단도 내쫓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카데쉬’는 그의 아들 ‘여호사밧’ 때까지 남왕국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폐하지 않은 산당과 연결됩니다. 이들의 정확한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산당이 존재할 때, ‘카데쉬’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지방 제의 장소와 연관이 있는 특정 제의 집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70인역 성경의 경우 「열왕기상 22장 47-50절」이 없습니다. 또 「열왕기상 14장 24절」에도 ‘카데쉬’가 나타나는 문장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15장 12절」은 이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텔레테(τελετη)’로 적습니다. ‘텔레테’는 본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의 딸로, 신비주의 종교 집단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70인역 성경은 「열왕기」에 나타난 ‘카데쉬’를 이방 종교 집단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카데쉬’에 대한 언급은 이후로 한동안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열왕기하 23장 7절」에 다시 등장합니다. 「열왕기하 23장」은 남왕국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담고 있습니다. ‘요시야’는 성전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 제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제거하였는데, 그때 성전 가운데 있던 ‘카데심(카데쉬의 복수형)의 집’을 헐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남창의 집’이라고 번역했고, 70인역 성경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고유명사로 사용하여 ‘카데심(kadhsim)’으로 적었습니다. 본래 히브리어 성경은 상․하의 구분이 없지만, 우리 성경의 구분에 따라 보자면, 「열왕기상」에서 내쫓은 것으로 보였던 ‘카데쉬’ 집단은 「열왕기하」에서 지방 산당이 아닌 성전 안에 나타납니다.

「열왕기하 23장 7절」은 ‘카데심의 집’이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라고 말합니다. 이런 추가 설명으로 인해 70인역 성경은 ‘카데심’을 따로 번역하지 않고 고유명사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공간을 만든 사람은 아마도 남왕국 ‘므낫세’였을 것입니다. 「열왕기하 21장 4-7절」은 ‘므낫세’가 갖가지 우상과 우상을 섬기는 제단을 성전에 들여놓았고 우상을 향한 제의를 행했다고 말합니다. 「열왕기」는 ‘카데쉬’들을 위한 공간도 ‘므낫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읽어가도록 만듭니다.

「열왕기하 23장 7절」의 본문 자체는 ‘카데쉬’가 어떤 집단인지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지만, 이 집단이 아세라 제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열왕기상」에 나타난 ‘카데쉬’와 조금 다른 형태로 보이는데, ‘카데쉬’라고 불리는 집단에 의한 제의가 지방 산당에서만 이루어지다가 아세라 제의와 혼합되고 성전 안으로까지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열왕기」의 내용만으로 보았을 때, ‘카데쉬’는 우상 숭배와 연결된 어떤 집단입니다. 「열왕기상」에서는 이들이 어떤 우상과 연결되어 있는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열왕기하」에서는 이들이 아세라 제의와 연결된 집단이라고 말합니다.

남왕국의 왕들 중에서 야훼 신앙을 되살리려고 했던 왕들은 ‘카데쉬’를 그 땅에서 제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야훼 신앙에 있어서 ‘카데쉬’는 악한 존재, 가증스러운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열왕기」만을 보았을 때, 이들이 정확하게 어떤 역할을 했던 이들인지는 명확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커데샤’

성경을 한 권의 두꺼운 책이라고 생각하고 창세기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갔을 때, ‘카데쉬’를 처음 읽게 되는 책은 「창세기 38장 21-22절」입니다. 정확하게는 ‘카데쉬’가 아니라 여성형인 ‘커데샤’입니다.

「창세기 38장」은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이며 형사취수제에 관해 다루고 있는 본문입니다. ‘다말’과 결혼한 ‘유다’의 장자 ‘엘’이 죽고, 둘째 ‘오난’까지 죽자, ‘유다’는 그의 셋째 아들 ‘셀라’도 죽을까 염려하여 그를 ‘다말’에게 보내지 않습니다.

이에 ‘다말’은 ‘유다’를 유혹하여 관계를 맺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데, 「창세기 38장 15절」은 ‘유다’가 ‘다말’을 보고 창녀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창녀는 히브리어 ‘조나(zonah)’로 일반적인 매춘을 업으로 삼는 여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자나(zanah)’로 쓰이면 ‘매춘을 행하다’라는 동사가 됩니다.

▲ 렘브란트, 「유다와 다말」 ⓒ위키피디아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워낙 많은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 본문만 살펴보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합니다만, 여기에서는 ‘카데샤’에 대한 내용만을 집중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유다’는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갔습니다. 그가 ‘다말’을 만났을 때 혼자였는지 ‘히라’와 함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유다’는 ‘다말’을 ‘조나(창녀)’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녀와 성관계를 맺습니다.

얼마 후 ‘유다’는 함께 딤나에 갔던 자신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주고 담보물을 찾아오도록 합니다. ‘히라’는 딤나에서 그 여인을 찾지 못하자 주변 사람들에게 그 여인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데, 이때 히브리어로 보면, ‘커데샤’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이를 ‘조나’와 똑같이 창녀라고 번역한 후에 ‘가나안 이방 성소의 창녀’라는 각주를 달아놓았습니다. ‘히라’의 질문에 마을 사람은 이곳엔 ‘커데샤’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히라’가 ‘조나’가 아닌 ‘커데샤’를 찾았다는 점은 이 둘이 동의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래서인지 70인역 성경은 이 둘을 모두 ‘창녀(포르네, po,rnh)’로 적습니다. 「창세기 38장」은 ‘커데샤’를 ‘조나’와 같은 행위를 했던 사람들로 표현하며 이 둘을 동의어처럼 적어놓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내용을 좀 더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몇몇 학자는 아둘람 사람 ‘히라’가 왜 ‘조나’가 아닌 ‘커데샤’를 찾았는가에 관해서, 그가 ‘유다’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서 ‘조나’가 아닌 ‘커데샤’를 찾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해석은 기본적으로 ‘조나’와 ‘커데샤’가 다른 집단이라는 이해를 전제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조나’와의 성관계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커데샤’와의 성관계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유다’는 ‘조나’라고 생각한 ‘다말’과 동침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38장 24절」에서 ‘유다’는 ‘다말’이 ‘자나(매춘 행위를 함)’ 했으므로 불살라 죽이라고 말합니다. ‘다말’의 상황은 ‘매춘’이 아니라 ‘불륜(나아프 נאף)’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지만, 본문은 앞선 ‘조나’와 연결하여 ‘자나’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유다’는 이 ‘자나’의 행위자 중 한 명이 자신으로 드러났을 때 ‘다말’을 용서합니다.

만약 「창세기 38장 21절」의 ‘커데샤’를 70인역과 마찬가지로 ‘창녀’라는 의미이고 ‘조나’와 동의로라고 생각한다면, 이 본문은 유부녀 또는 과부가 행한 매춘 행위가 죄악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이때 매춘 행위는 남성인 ‘유다’에게는 떳떳한 행위가 되고 여성인 ‘다말’에게는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가 됩니다.

하지만 ‘조나’와 ‘커데샤’가 다른 집단이고 「창세기 38장」이 둘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본다면 이와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유다’는 자신이 직접 담보물을 찾으러 가지 않습니다. 또 그의 친구 ‘히라’는 ‘조나’가 아닌 ‘커데샤’를 찾습니다. 이는 ‘유다’ 역시도 매춘(자나)이라는 죄에서 떳떳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동시에 ‘조나’가 아닌 ‘커데샤’와 맺는 성관계는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할 수 있을 정도로 당당하게 행해지던 일이라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8장」 본문에서는 ‘커데샤’가 우상 숭배와 연결된 여성이라는, 「열왕기」와 같은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조나’와 같이 성적인 일을 수행했다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호세아에 나타난 ‘커데샤’

사실 ‘커데샤’에 대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은 「호세아 4장 14절」입니다. 「호세아 4장 11-19절」 본문은 북왕국의 우상 숭배를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호세아 4장 13절」에 나타난 이야기는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영목(靈木) 주변에서 행해지던 제의에 대한 비판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이런 제의를 비판하며 너희의 딸들이 매춘(자나)하고, 너희 며느리(아내)들은 불륜(나아프)을 행한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이 「호세아 4장 14절」에도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는 딸들이 매춘하고 며느리(아내)들이 불륜을 해도 벌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남자들이 ‘조나(창녀)’와 함께 어울리고 ‘커데샤’와 함께 희생 제사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호세아」를 보면 ‘조나’와 ‘커데샤’가 확실히 다른 집단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커데샤’는 제사와 관련된 역할을 행한 집단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만 보았을 때, ‘조나’와 성행위를 한 후에 ‘커데샤’에게 가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석할 여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기에 ‘커데샤’는 이방 제의에 관련된 사제 집단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 4장 13-14절」은 분명하게 성행위와 연결된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커데샤’ 역시 그중 하나로 나타납니다.

최근 「호세아」에 관한 연구를 포함해서 예언서에 관한 연구들은 예언자들이 은유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고 봅니다. 우리가 실제 현상에 대한 비판이라고 여겼던 많은 본문을 은유적 표현일 뿐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에 나타난 음행과 관련된 구절들은 대부분 은유적 표현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때 발생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학자가 어디까지 예언자의 은유이고 어디까지 현실 비판인지의 구분을 확실하게 내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또 은유는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빗대어, 당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수사법입니다. 따라서 어떤 본문이 은유라고 해서, 그 은유에 담긴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 ‘호세아’가 음행이라는 주제로 수많은 은유를 사용하여 예언을 전하고 있다면, 그 음행이 당시 북왕국 사회에 상당히 많이 퍼져있는 현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호세아’가 예언을 선포했던 북왕국 ‘여로보암 2세’ 시기에 사회 정의가 무너졌다는 점은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㉑ ‘역사가와 예언자의 차이’」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자면, ‘카데쉬’와 ‘커데샤’는 이방 제의에 관련된 이들이었고, 제의와 연결된 성행위를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매춘을 하던 ‘조나’와 구분되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38장 21-22절」과 「호세아 4장 14절」에 나타난 ‘커데샤’와 「열왕기」에 나타난 ‘카데쉬’가 다른 집단일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신명기 23장 18절」에서 하나의 집단으로 표현됩니다.

「신명기 23장 18절」에는 이스라엘의 딸들은 ‘커데샤’가 되지 말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카데쉬’가 되지 말라는 명령이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신명기 23장 19절」에 나타난 창녀(조나)의 수입과 개의 값은 성전에 가져오지(보 בוא) 말라는 구절과 연결하여 ‘커데샤’는 창녀이고 ‘카데쉬’는 개 같은 자라고 말합니다. 처음에 살펴본 『라이프 성경 사전』에서 ‘개 같은 자’라는 표현이 나온 이유입니다.

하지만 ‘카데쉬’와 ‘커데샤’가 이미 어떤 제의에 동참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들의 수입을 성전에 가져오지 말라는 표현은 이상해 보입니다. 이들이 「열왕기상」에 나타난 바와 같이 지방 성소의 우상 숭배와 연결된 이들이라면, 굳이 야훼 성전에 수입을 바칠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열왕기하」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들이 이미 성전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성전에 그 수입을 바치러 간다는 점이 맞지 않습니다.

저는 「신명기 23장 18절」은 ‘카데쉬’와 ‘커데샤’가 어떤 집단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신명기 23장 19절」이 이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보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더러운 돈이나 저열한 방식으로 얻은 돈을 성전에 바치지 말라는 규정으로 보입니다. 창녀와 개라는 표현은 「열왕기하 22장 38절」에 ‘아합’의 죽음을 묘사한 장면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관용적 표현으로 보입니다.

고대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제의

우가릿에서 발견된 문서들에는 가나안 남성 신과 여성 신의 결합에 따른 풍요 신앙이 나타납니다. 우가릿 지역은 신석기 시대부터 인구가 정착한 것으로 보이는데, 우가릿에서 발견된 기록들은 주전 15-1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신들의 결합에 따른 풍요라는 신앙을 제의의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21일간 진행되는 바알과 여신 피드라유(Pidrayu)의 결혼 제의는 마지막 3일간 바알 역할을 맡은 왕과 여신의 역할을 맡은 특정 여성이 소위 ‘거룩한 결혼’이라고 불리는 성행위를 하면서 끝맺게 됩니다. 이런 제의는 수메르 신화의 이난나(Inanna)와 두무지(Dumuzi)의 결혼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 「이난나와 두무지」 ⓒ위키피디아

전통적으로 이런 풍요제의가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최근 학자 중에는 이런 제의가 왕의 재연 의식에서만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고대 제의에 관한 기록이 성창(聖娼, Sacred Prostitution 또는 Temple Prostitution)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저도 이런 제의에 관한 기록이 ‘성창’이라고 불리는 직종에 대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가나안 지역에서 종교 행위는 왕실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사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다양했고, 왕실에서 대표적으로 행했던 제의 예식은 당연히 다양한 제의 장소에서 재현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 직업적으로 성행위를 하는 사제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반인들 사이의 성행위를 통한 제의는 충분히 존재했다고 봅니다.

주전 9세기 이후 이스라엘 지역 유물 중에는 가슴을 강조한 여성의 모습이나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조각한 작은 인형들이 자주 발견됩니다. 학자들은 이 여성 인형이 아세라 여신상이라고 판단하는데, 이 여신상들 역시 성창이라는 직업에 대한 증거는 아닐지라도 당시 민간 신앙 행위 속에 성적인 요소가 퍼져있었다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 「기원전 8-7세기 이스라엘 여인상」 ⓒ메트로폴리탄 미술관(www.metmuseum.org)

성경 안에서도 이런 가나안 제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 거의 정확하게 담고 있는 본문은 「민수기 25장 1-3절」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머물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여인들과 성관계를 맺었다고 말합니다. 「민수기 25장 2절」은 그녀들이 자신들의 제사에 이스라엘 남성들을 초대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의 성관계가 제의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앞선 가나안 풍요제의와는 다른 형태의 성적 제의의 형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전 5세기에 기록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바빌론의 성적 제의에 관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바빌론 여성들은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낯선 남성에게 자신의 처녀를 바쳐야 했다고 말합니다. 이 제의는 아프로디테의 신탁에 의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풍요와 연결되긴 하겠지만, 바빌론 여성들은 무조건 거쳐 지나야 하는 관습처럼 여긴 것으로 보입니다.

‘카데쉬’, ‘커데샤’와 이스라엘 종교 제의

고대 가나안 지역에는 성행위를 통한 종교 제의가 존재했습니다. 이것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행해진 성행위인지, 성행위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사제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런 제의 자체는 존재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늦어도 예언자 ‘호세아’가 활동했던 주전 8세기에는 ‘커데샤’라고 불리는 특정 사제 집단이 등장합니다. 「열왕기」에 따르면 이들이 남왕국에 등장한 시점은 ‘르호보암’ 통치 시기인 주전 10세기가 됩니다. 다만 「열왕기」는 분명 「호세아」보다 늦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르호보암’ 시기에 성행위를 하는 사제들을 ‘커데샤’나 ‘카데쉬’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창세기 38장」과 「신명기 23장」이 「열왕기」보다 늦은 시기에 기록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이를 기록한 이들은 ‘카데쉬’와 ‘커데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 호칭과 의미도 당시 사회 속에서 이미 통용되었다고 봅니다. ‘카데쉬’가 나타나는 또 하나의 본문인 「욥기 36장 14절」은 워낙 후대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굳이 다룰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열왕기」에 따르면 이들은 본래 지방 성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이었는데, 이들의 성적 제의 형태가 아세라 제의와 결합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유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학자 중에는 ‘카데쉬’와 ‘커데샤’가 그저 이방 신전 사제였을 뿐이지 성행위를 하진 않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가나안 제의 풍습이 ‘성창’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합니다. 또 성경 각각의 책을 살펴보았을 때, ‘카데쉬’와 ‘커데샤’가 성행위를 했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고대 가나안 제의에 관한 주장은 받아들일 수 있는 점도 있지만, 성경에 나타난 단어의 의미를 따질 때, 각각의 책을 따로 구분해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 손에 놓인 전체적인 구약성경은 이들이 성행위에 참여했던 이방 신전 사제 집단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지금 개역개정 성경에 나타난 번역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많은 부분에서 이런 오류가 발견되지만, 하나의 고유명사를 너무 다양하게 번역해놓았습니다. ‘카데쉬’는 ‘남색하는 자’, ‘남창’으로 번역합니다. ‘커데샤’는 ‘창녀’, ‘창기’, ‘음부’로 번역합니다.

다양한 번역도 문제이지만, ‘남창’, ‘창녀’, ‘창기’는 이들이 이방 제의와 연결된 점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남색하는 자’라는 번역은 아마도 킹제임스버전의 동성애자(sodomite)를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말에서는 주체가 남성인지 여성인지도 구분되지 않습니다. 또 신전에서 일하던 사제들은 수동적인 입장이지, 능동적으로 남색을 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또 이들의 성행위 대상이 이성에 한정되었는지, 동성 간의 성행위도 이루어졌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가나안 풍요제의 형식만을 따랐다면, 이성간의 성행위로 한정할 수 있겠지만, 성경 안에서도 이들의 형태는 조금씩 변합니다.

최근에 ‘카데쉬’와 ‘커데샤’의 성행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학자 중에 예언자 ‘아모스’가 이 단어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모스 2장 7-8절」에는 ‘커데샤’와 거의 유사한 형태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어린 여성에게 가며 제단 옆에 전당 잡은 옷을 펴서 눕는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아모스’는 ‘커데샤’나 ‘카데쉬’라는 단어를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또 ‘아모스’는 이런 성적인 신앙 행위 자체를 비판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모스’는 이런 행위 뒤에 감춰진 폭력을 비판합니다. 「아모스 2장 6-8절」에서 ‘한 어린 여성’을 신발 한 켤레에 팔려간 가난한 자, 옷을 전당 잡힌 자와 연결하여 읽는다면, 이방 신전에서 벌어지던 성행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갔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상에 대해서는 근거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명쾌한 해답을 내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신전에서 성행위를 통한 제의가 벌어졌고, 이를 맡아서 수행하던 이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의 형태가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는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따라서 ‘카데쉬’나 ‘커데샤’가 가진 의미를 모두 담고, 변화되는 형태까지도 담을 수 있는 표현은 ‘제의 창기(娼妓)’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말에서 사용되는 ‘창기’와 관련된 모든 단어의 한자는 여성을 뜻하기 때문에 언어의 한계는 있습니다. 그래도 특정 산당, 신전, 성전에 국한되지 않고, 특정 성별에 국한되지 않는 포괄적인 의미로는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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