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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이스라엘 남북 왕국의 왕들과 그 땅의 사람들

기사승인 2020.10.29  16:4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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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⑺

여호아하스(주전 609-608년)

‘여호아하스’는 「열왕기하 23장 30-34절」, 단 다섯 절의 기록만이 남아있는 왕입니다. 주전 609년 ‘요시야’가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네카우 2세)’에 의해 죽자 왕으로 세워졌다가 석 달만에 ‘느고’에 의해서 폐위된 인물입니다. ‘느고’가 북진했던 해가 주전 609년이었고, 이집트로 귀환한 때가 주년 608년이었기 때문에 ‘여호아하스’의 통치 연도는 주전 609-608년이 됩니다.

‘여호아하스’에 개인에 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23장 30-34절」에 나타난 이야기는 우리에게 몇 가지 생각할 만한 점을 주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23장 30절」에 따르면 ‘여호아하스’는 ‘백성들’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백성들은 히브리어로 ‘암-하아레츠(עם־הארץ)’입니다.

암-하아레츠, 땅의 백성들

‘암 하아레츠’를 직역하면 ‘그 땅의 백성’, ‘그 땅의 사람’ 정도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그 땅의 거주민’을 의미하고(창세기 23장 참고), 왕정 이후에는 ‘나라의 백성’을 의미할 때 사용됩니다(왕하15:5; 16:15; 25:19).

그런데 「열왕기하」에는 ‘암-하아레츠’가 어떤 집단으로 표현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이 처음 집단으로 나타난 때는 예후의 반란 이후 공석이 된 남왕국의 왕위를 ‘아달랴’가 자치했던 때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에 반역을 일으키는데, 이 반역에는 ‘온 백성(כל־עם הארץ)’의 도움이 있었습니다(왕하 11:14,18ff).

다음은 ‘요시야’가 왕위에 등극할 때에 ‘암-하아레츠’가 등장합니다. 「열왕기하 21장 23-24절」에는 ‘요시야’의 아버지 ‘아몬’의 죽음과 ‘요시야’의 등극에 관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아몬’은 신복들의 반란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그 신복들이 왕위 찬탈을 시도했던 것인지, ‘아몬’이 너무 악했기 때문에 살해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아몬’을 죽였다는 기록에 바로 이어서 그들이 ‘국민’들에 의해 처형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국민’으로 번역된 말이 ‘암-하아레츠’입니다.

「열왕기하 11장」에 나타난 ‘암 하아레츠’는 항상 앞에 ‘콜’이 붙어서 ‘모든 백성’, ‘모든 사람’으로 사용됩니다. 반면 ‘요시야’와 ‘여호아하스’를 왕위에 등극시킨 ‘암-하아레츠’는 ‘암’과 ‘하아레츠’ 사이에 ‘־’(마케프)가 있어서 일반적인 ‘암 하아레츠’와 구분하여 읽기를 요구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케프가 붙은 ‘암-하아레츠’가 나타나는 경우는 「열왕기하 24장 14절」에서 ‘느부갓네살’에 의한 1차 포로기가 있었을 당시 그 땅에 ‘비천한 자’ 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사용됩니다. 여기에서 ‘비천한 자’는 히브리어로 ‘달라트 암-하아레츠(דלת עם־הארץ)’인데, ‘하찮은 그 땅의 백성’입니다.

▲ 쿰란 제1 동굴에서 출토된 이사야서 전장이 담긴 두루마리의 이사야 53장 본문(사진 왼쪽)과 현재 히브리어 성서인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의 이사야 53장 본문(사진 오른쪽)

위의 그림은 「이사야 53」을 기록한, 왼쪽부터 ‘쿰란 사본’과 ‘마소라 본문’을 담은 ‘레닌그라드 사본’을 기반으로 한 BHS(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를 비교해놓은 것입니다. ‘쿰란 사본’은 주전 2세기에서 주후 1세기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반해 ‘레닌그라드 사본’의 기초인 ‘마소라 본문’은 대략 주후 8-9세기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조금 확대해서 보시면 쉽게 발견하시겠지만, ‘쿰란 사본’에는 히브리어 자음 이외에 아무 표시가 없습니다. 하지만 BHS에는 모음과 악센트 표시가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마케프는 기본적으로 악센트의 일종이기에 발음의 편의성 또는 음률을 위해 붙게 되었을 것입니다. 즉 마케프 표시는 후대의 성경 전달자들이나 필사자들, 특히 ‘쿰란 사본’이 기록된 한참 뒤의 사람들이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적어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소라 학자들이 ‘암 하아레츠’ 사이에 마케프를 붙였는지, 그 이전의 필사자들, 주후 700년 이전의 어떤 이들 중 누군가가 붙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단어 사이에 마케프를 붙임으로 「열왕기하 24장 14절」에 나타난 ‘남겨진 자들’과 ‘요시야’, ‘여호아하스’ 시절의 ‘백성들’을 연결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이들을 포로 귀환 때에 ‘이스라엘 땅에 남겨져 살고 있던 사람들’과도 연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70인역 성경은 「열왕기하 11장, 21장, 23장」의 ‘백성들’을 모두 같은 표현인 ‘호 라오스 테스 게스(ὁ λαὸς της γες)’, ‘그 땅의 백성들’로 적고 있고 「열왕기하 24장 14절」의 ‘비천한 자들’은 ‘호이 프토코이 테스 게스(οἱ πτωχοι της γες)’, ‘그 땅의 가난한 자’로 적습니다. 이 두 집단을 다른 표현으로 적고 있습니다. 다만 「에스라 4장 4절」에서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남아있던 사람들은 ‘호 라오스 테스 게스(ὁ λαὸς της γες)’로 적습니다.

에스라의 경우 ‘암-하아레츠’는 「에스라 4장 1절」에서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으로 표현됩니다. 즉 이들은 북왕국 출신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라의 기록을 따르면 본래 남왕국 출신의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갔거나 남왕국 멸망 때에 죽었기에 비어있던 남왕국 땅에는 북왕국 출신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열왕기하」와 「예레미야」의 기록에 따르면 남왕국 멸망 이후에도 ‘그달리야’와 ‘예레미야’를 비롯하여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북왕국 출신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쫓아내었다는 에스라의 기록은 땅의 소유권에 따른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에스라 4장 4절」의 ‘암-하아레츠’는 「열왕기하 24장 14절」의 ‘암-하아레츠’와 같은 집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들이 이 집단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했습니다. 「열왕기하 11장」의 ‘여호야다’시절에 나타난 ‘콜-암 하아레츠’의 이미지는 분명 좋은 이미지입니다. 그들은 ‘여호야다’를 도와 ‘아달랴’를 몰아내었으며, 「열왕기하 12장 2절」과 「역대하 24장 2절」의 기록으로 보아 ‘여호야다’는 ‘요야스’를 하나님 안에서 바르게 이끈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21장」의 ‘암-하아레츠’는 다른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이들은 반란을 일으킨 이들을 처형하고 ‘요시야’를 왕으로 세웠지만, ‘요시야’가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종교 개혁 활동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들은 「열왕기하 23장」에서 ‘요시야’가 죽은 후에 다시 등장하여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우는데, ‘여호아하스’는 「열왕기하 23장 32절」에 따르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왕이었습니다.

열왕기 역사가의 의도로 보이지는 않지만, 성경을 전달하는 이들은 왕위 등극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암-하아레츠’를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암-하아레츠’와 충돌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요시야’는 자신이 왕이 되는데 기여한 ‘암-하아레츠’와 함께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종교 개혁을 일으킵니다. 그렇기에 그는 뛰어난 왕으로 평가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또다시 ‘암-하아레츠’의 영향으로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악한 왕으로 평가되며 동시에 ‘암-하아레츠’의 평가도 함께 떨어지게 됩니다. 열왕기를 전달한 이들은 이 ‘암-하아레츠’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으며, 이스라엘 땅에 비천하게 남겨졌다고 말합니다. 바벨론에 의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와 함께 남겨진 이들은 결국 남왕국의 멸망을 이끈 이들이기도 합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에스겔 8-1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결국 에스라에 이르러서 이들은 바벨론 포로들의 땅에 멋대로 자리잡고 살아갔던 이들로 표현되며, 추방된 이후에는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인물들로 읽어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암-하아레츠’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갖도록 유도하는 데에는 정치적, 경제적 이유가 가장 컸을 것입니다. 정치, 경제적인 이유는 땅의 소유권 분쟁에 있습니다. 「열왕기하 24장 14절」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들이 지도자, 용사, 장인, 대장장이였다고 말합니다. 어느정도 지위와 부를 가진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반면에 남겨진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대부분의 지주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소작농들만 땅에 남겨진 상황입니다. 남겨진 소작농들은 지주가 없는 상황 속에서 농사 지으면서 잘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끌려갔던 지주들의 자손이 그 땅에 되돌아왔기에 문제가 생겨납니다. 지주의 자손들은 땅을 되돌려받는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기에 남겨졌던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듭니다. 그것이 에스라에 나타난 ‘암-하아레츠’입니다.

성경을 전달한 이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신앙적 의미를 덧붙입니다. 이 ‘암-하아레츠’는 본래 왕을 세우는데 어떤 역할을 했으며, 이들이 세운 왕은 악하였고, 왕이 이들을 버렸을 때에야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었다는 의미를 담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뜻에 따랐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를 읽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성경을 전달한 사람들, 특히 마소라 학자들의 이런 노력으로 인해 최근에는 오히려 ‘암-하아레츠’를 불쌍하게 쫓겨난 ‘민중’으로 바라보는 경향도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에 기록된 ‘암-하아레츠’는 분명 어떤 집단들로 표현될 수는 있지만, 사상이나 특성을 계승하는 단일 집단이 아닙니다. ‘콜-암 하아레츠’, ‘암-하아레츠’, ‘달라트 암-하아레츠’ 모두 다른 사람들입니다.

폰 라드(G. von Rad) 이후로 「열왕기하 21장, 23장」에 나타난 ‘암-하아레츠’에 대해 상당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이에 관해서는 2008년 「구약논단」에 게재된 이동규의 “요시야 개혁과 암 하아레츠: 요시야 개혁의 사회 정치적 이해”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암-하아레츠’가 어떤 집단이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는 이 논문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아하스와 시드기야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간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 ‘맛다니야’를 남왕국의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꿉니다. 「열왕기하 24장 18절」에 따르면 ‘시드기야’는 립나 출신 ‘예레미야’의 딸인 ‘하무달’의 아들입니다.

‘하무달’은 ‘여호아하스’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앞선 ‘암-하아레츠’의 내용과 연결되는 내용이고 앞선 논문을 보시면 설명되어 있기도 합니다만, 왕위 등극에 영향을 미친 ‘암-하아레츠’는 왕의 어머니(게비라)의 출신 지역을 따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개입된 ‘요시야’나 ‘여호아하스’의 어머니는 둘 다 남왕국 지역인 보스갓과 립나 출신입니다(왕하 22:1; 23:31). ‘암-하아레츠’가 개입하지 않고 바로 ‘느고’에 의해 왕으로 세워진 ‘여호야김’의 어머니 ‘스비다’는 북왕국 지역인 ‘루마’ 출신입니다.

▲ 이스라엘 남북 왕국

보스갓과 립나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보스갓은 라기스와 같은 지역으로 추정되며, 립나는 라기스보다 조금 북쪽에 있던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북왕국 멸망 이후 북왕국 주민 일부는 남왕국으로 유입되었다는 점이고, 이들 중에는 왕비가 된 사람도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북왕국 출신의 인물들을 탐탁치 않게 여긴 집단도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암-하아레츠’는 남왕국 출신 왕비의 소생을 왕으로 세웁니다. 이는 그들이 다윗 왕조 정통성과 남왕국 정통성을 지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에게 이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왕의 어머니가 남왕국 출신이든 북왕국 출신이든 그에게 중요한 점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것인지 아닌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 ‘여호야김’은 바벨론에 의해 속국이 된 후에도 이집트와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이집트 전쟁 이후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한 점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왕을 세운 기준도 ‘느고’와 같을 것입니다. 바벨론에 충성을 다할 왕을 세웠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세운 왕 ‘시드기야’는 ‘느고’에 의해서 폐위되고 이집트로 끌려간 ‘여호아하스’의 형제였습니다. 어머니가 같은 형제입니다. 어쩌면 이는 ‘느부갓네살’의 실수였는지도 모릅니다. ‘시드기야’는 자신의 형제, 어쩌면 형의 상황을 보며 이집트에 반감을 갖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느부갓네살’이 그를 선택한 데에는 이런 점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벨론을 향한 충성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결국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시야’ 이후 우리는 열왕기의 본문 속에서 ‘누구를 왕으로 세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여러 집단을 보게 됩니다. ‘암-하아레츠’, 이집트 파라오 ‘느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나타납니다. 이들의 모습은 다윗 왕조가 단순하게 장자 계승 구조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게 합니다. 때로는 종주국의 명령에 따라 왕을 세워야 했고, 때로는 백성 중 일부 집단의 선택에 따라 왕을 세웠습니다.

왕을 세우는 데에 어떤 집단의 선택이 개입되었다는 점은 왕이 세워지는 과정이 그 집단의 이익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게 합니다. 열왕기 역사가는 왕이 세워지는 과정을 짧게나마 기록함으로 그 선택에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았고 사람의 뜻만이 채워져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왕정 체계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열왕기 역사가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단 다섯 절밖에 안되는 ‘여호아하스’의 기록으로 너무 많은 지면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요시야’, ‘여호야다’, ‘요아스’, ‘시드기야’와 연결된 부분이기 때문에 나중에 이들을 다룰 때에 겹치는 내용은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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