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역사 알기 ⑹
지금까지 연대 추정 작업이 조금 혼란스러웠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연대의 윤곽을 찾기 위해 출애굽 시대, 분열 왕국 초기, 바벨론 포로기를 오락가락하며 살펴보았기 때문에 생각해야 할 기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꼼수가 통하지 않는 이스라엘 왕들의 연대기
분열 왕국 시기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윤곽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열왕기의 기록을 살펴보는 가운데,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너무도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솔직히 열왕기에 나타난 북왕국과 남왕국의 연대와 즉위 시점을 맞춰보면 연대가 적당히 맞아 떨어지리라 생각했지만, 아직도 17년 이상의 연도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열왕기의 기록만으로 판단하기에 어려운 점들도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맞출 수 있지 않을까?’라는 꼼수는 버리고, 분열 왕국 시대의 왕들에 대해 한 사람, 한 사람 차근차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연대를 추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정확한 연도를 알고 있는 ‘여호야긴’ 즉위년인 주전 598년부터 위로 올라가며 작업을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열왕기에 나타난 남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다윗 혈통을 이은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남왕국의 마지막 왕은 ‘그달리야’일 것입니다. 「열왕기하 25장 22-26절」은 ‘느부갓네살’이 ‘그달리야’를 왕으로 세웠으나 다윗 혈통을 이은 이들의 반란으로 죽임당했다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열왕기 역사가는 ‘그달리야’를 ‘왕’이라 표기하지 않습니다.
‘시드기야’와 ‘그달리야’에 관한 이스라엘 외부 자료는 거의 없습니다. 이들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예레미야’나 ‘에스겔’을 함께 살펴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에 관한 내용은 분열 왕국에 관한 내용이 정리된 후에 ‘에스라’, ‘느헤미야’ 연대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호야긴(주전 598-597년)
우리가 이미 한 번 살펴보았지만,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시점은 ‘바벨론 연대기’에 따라 ‘느부갓네살’ 7년 ‘아다르 둘째 날’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때는 주전 597년 2월 중순이 됩니다.
단 석 달만 남왕국의 왕위에 올랐던 ‘여호야긴’이지만, 그의 이름은 성경 곳곳에 나타납니다. 바벨론에서 예언자 활동을 했던 ‘에스겔’은 자신이 하나님을 만난 순간이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5년’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야긴’의 이름은 조금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역대상 3장 16,17절」에는 그의 이름이 ‘여고냐’로 나타납니다. 이 이름은 「에스더 2장 6절」, 「예레미야 24장 1절」에도 나타나고, 신약의 「마태복음 1장 11,12절」에도 나타납니다. 다만 역대기 역사가가 역대기서 내에서도 서로 다른 자료를 사용했는지, 「역대하 36장」에서는 ‘여호야긴’으로 기록합니다.
예레미야의 경우는 ‘여호야긴’의 이름이 더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예레미야 22장 24,28절; 37장 1절」은 ‘고니야’로, 「예레미야 27장 20절; 28장 4절; 29장 2절」은 ‘여고니야’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여호야긴’은 ‘יהויכין’, ‘여고냐’는 ‘יכניה’, ‘고니야’는 ‘כניהו’, ‘여고니야’는 ‘יכניה’인데, 얼핏 보기에 유사한 음가를 사용합니다. 이는 ‘여호야긴’을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여고니야’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있고, 당시 남왕국은 바벨론, 이집트에 의해 끊임없이 침략 당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여러 나라의 언어가 혼용되면서 발생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여호야긴’의 호칭이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야긴’의 이름은 바벨론의 기록에도 나타납니다. 앞서 언급한 ‘바벨론 연대기’에는 ‘유다 성의 그 왕’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지만, 1900년 초에 발견된 소위 ‘여호야긴 토판’이나 ‘여호야긴 배급 토판(Jehoiachin's Rations Tablets)’이라고 불리는 토판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여호야긴’과 그의 아들들, 유다 백성에게 배급한 내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여호야긴 배급 토판 ⓒGetty Image |
이 토판은 현재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museum)’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미지를 확대해 보시면 독일어로 번역된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여호야긴’이 나타나는 첫부분만 살펴보자면 이렇습니다. ‘레스터 L. 그래비’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 319페이지에 번역된 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야후두(Yahudu) 땅의 왕, 야우킨(Ya’u-kin)에게, 야[후두] 땅의 왕 야우키누(Ya’u-kinu)를 위하여 2분의 1, 야후두 땅의 왕의 다섯 아들을 위하여 2와 2분의 1 sila, 유다인 8명을 위하여 4 sila, [각각] 2분의 1 [sila]”
이 토판은 ‘여호야긴’을 ‘야우킨’과 ‘야우키누’라고 부르는 데, 이는 앞서 히브리어에서도 ‘고니야’의 이름 마지막에 ‘ו’가 들어가 있는 점을 봤을 때, 봐브를 붙여서 부르기도 안 붙여서 부르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미 ‘여호야긴’이 주전 598년 말에 왕위에 올랐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야긴’의 재위 기간은 주전 598년 말부터 주전 597년 초까지가 됩니다.
여호야김(주전 608-598년)
‘여호야긴’의 등극 연도로 인해 ‘여호야김’이 주전 598년에 죽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바벨론의 침략과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열왕기상 23장 36절」에 따라 그는 남왕국에서 11년간 왕위에 있었습니다. 왕의 재위 기간은 특별한 상황이 없는 한 1년씩 중첩된다는 점을 앞선 글에서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야긴’의 즉위 시점은 주전 608년이 됩니다.
‘여호야김’의 연대는 거의 정확해 보이기 때문에 크게 따질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예레미야 25장 1절」은 ‘여호야김’ 4년이 ‘느부갓네살’ 원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는 ‘느부갓네살’은 ‘느부갓네살 2세’이고 주전 605년부터 주전 562년까지 신흥 바벨론을 다스린 왕입니다. ‘예레미야’의 기록을 통해서도 ‘여호야김’의 즉위 연도를 주전 608년이라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의 경우, 즉위 연도와 폐위 연도만으로 끝내기엔 조금 아쉬움이 남습니다. 「열왕기하 24장 1절」에는 남왕국이 ‘느부갓네살’의 침공으로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가 3년 뒤에 배반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야김’의 바벨론 배신이라는 결정으로 인해 남왕국이 멸망한 것처럼 「열왕기하 24장 2-4절」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23장 34절」에 따르면 ‘여호야김’은 이집트 제26왕조의 ‘네카우 2세(주전 610-595년)’에 의해 왕으로 세워집니다. ‘네카우 2세’는 성경에 ‘바로 느고’로 나타나며, ‘요시야’를 죽이고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킨 왕이기도 합니다.
▲ 네카우 2세 부조 ⓒGetty Image |
‘요시야’와 ‘여호아하스’를 살펴보면서 더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네카우 2세’는 왕위에 오른 다음 해인 주전 609년에 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나게 됩니다. 「열왕기하 23장 29절」에는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열왕기 역사가의 오해로 보입니다.
이집트 제26왕조는 아시리아의 원조로 세워졌고, 아시리아와 동맹 관계에 있었습니다. 제26왕조 초대 왕으로 불리는 ‘프삼텍 1세(주전 664-610년)’는 재위 후반에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하여 자력으로 이집트를 통일하였지만, 동맹 관계를 끊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네카우 2세’는 아시리아의 구원 요청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지나던 ‘네카우 2세’는 자신의 군대를 막아선 남왕국의 왕 ‘요시야’를 죽입니다. ‘네카우 2세’의 목적은 아시리아 원조였기 때문에 ‘요시야’를 죽인 후 남왕국을 점령하지 않고 그대로 북진해 갑니다. ‘네카우 2세’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는 바벨론에 정복당합니다. 이후 다시 이집트로 향하던 ‘네카우 2세’는 귀환하는 길에 남왕국을 속국으로 만듭니다. 이때 남왕국의 왕이 ‘여호아하스’였는데, 그는 ‘네카우 2세’에게 끌려가게 됩니다.
‘네카우 2세’는 요시야의 아들 중 한 사람을 남왕국의 왕으로 세우는데, 그 사람이 ‘여호야김’입니다. 정리하자면, ‘네카우 2세’는 주전 609년 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북진하면서 ‘요시야’를 죽입니다. 아시리아가 패배한 이후 다시 이집트로 귀환하던 그는 주전 608년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웁니다.
주전 608년 ‘여호야김’의 등극과 함께 이집트의 속국이 된 남왕국은 ‘느부갓네살’의 등장과 함께 주전 604년에 바벨론의 속국이 됩니다. ‘바벨론 연대기’에 따르면, ‘느부갓네살’ 4년(주전 601년)에 바벨론 군대는 이집트 침공을 단행합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은 ‘네카우 2세’와의 전쟁에서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바벨론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호야김’은 이 전쟁 이후 이집트가 바벨론보다 더 강하다고 여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왕기하 24장 1절」은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3년간 섬기다 배반하였다고 말하기 때문에 남왕국의 독립 선언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섬길 국가를 바벨론에서 이집트로 바꿨을 뿐입니다.
바벨론으로 돌아가 군대를 재정비한 ‘느부갓네살’은 2년 뒤 주전 599년에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보복을 시작하였고, 주전 598년에는 남왕국을 점령합니다. ‘여호야김’은 이 해에 죽는데, 전쟁 중에 죽었는지 병으로 인해 죽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열왕기하 24장 7절」에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다’라는 말은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한 이후 이집트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정리하자면, ‘여호야김’은 이집트 ‘네카우 2세’에 의해 주전 608년에 왕위에 오릅니다. 주전 604년 느부갓네살의 침공으로 인해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가, 주전 601년에 있었던 ‘느부갓네살’과 ‘네카우 2세’의 전쟁 결과로 바벨론을 버리고 이집트를 선택합니다. 3년 뒤인 주전 598년 군사를 재정비한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남왕국은 완전히 바벨론의 속국이 되고 ‘여호야김’은 그 해에 죽었습니다.
여호야김과 포로 70년
‘여호야김’에 대해 한 가지 더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다니엘’에 ‘여호야김’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는 점입니다. ‘다니엘’이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에 관한 신학 서적들은 ‘다니엘’이 실존 인물이 아닐 수 있다거나, 실존했더라도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바벨론 포로기 이후 여러 왕을 섬겼던 재상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에스겔’이 ‘다니엘’을 고대 사람들인 ‘노아’와 ‘욥’과 함께 엮어서 언급하고 있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에스겔 14:14, 20; 28:3).
‘다니엘’에 관해 판단하는 일은 지금 우리가 하려는 작업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에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생각할 점은, 「다니엘 1장 1절」이 ‘여호야김’ 3년에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갔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비록 ‘다니엘’이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허구의 이야기일지라도 「다니엘 1장」에 나타난 바벨론 포로 사건은 실제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바벨론 1차 포로기는 ‘여호야긴’ 시대로 봅니다. 하지만 다니엘서의 기록은 그보다 앞서 ‘여호야김’ 시대에 이미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 있었다는 증언입니다. 물론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다니엘 1장 1절」의 기록은 잘못되었습니다. ‘여호야김’ 3년(주전 606년)에 ‘느부갓네살’은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와 함께 예레미야와 스가랴의 예언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라고 말합니다(예레미야 25:11; 29:10; 스가랴 1:12; 7:5). ‘예례미야’는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예언했기 때문에 포로기의 기간에 대한 예언이 틀릴 수도 있지만, ‘스가랴’는 포로기를 거치고 이스라엘에 귀환한 예언자입니다. 자신들이 바벨론 포로로 있었던 기간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만약 ‘여호야긴’ 시대에 1차 포로기가 있었다고 한다면, 주전 597년부터 고레스 칙령이 있었던 주전 538년까지 60년입니다. 하지만 ‘여호야김’ 4년, ‘느부갓네살’ 원년에 1차 포로기가 있었다고 한다면 주전 605년부터 주전 538년까지 68년이 됩니다. 거의 70년에 가까운 숫자가 됩니다.
어쩌면 68년이나 60년이나 비슷하기 때문에 다 70년이라고 쓸 수도 있지 않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고작 8년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여러 번 봐서 알고 있지만, 성경에서 6과 7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완벽함’과 ‘완벽하지 않음’을 나눌 때 7과 6을 사용합니다.
물론 예언자들이 완벽한 회개의 기간으로 70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이사야 23장 15-17절 참고).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바벨론 포로기가 정확히 60년이었다면 이방 민족에 의해 사로잡혔던 기간을 완전한 기간으로 말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실제 고레스 칙령 이후 귀환한 이들이 제2 성전을 건축하는 데까지 몇 년이 걸렸기 때문에, 포로기가 60년이었다면, 불완전한 포로기 60년과 성전 건축 기간 10년을 붙여서 70년이라는 완전수를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가랴’는 포로기만을 70년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예언자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포로기 70년을 말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회개를 위해 필요한 완전한 기간의 의미로 70년을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당시 근동 지방에서는 흔히 한 성읍이 초토화되어 버려지는 기간을 70년이라고 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서에 나타난 ‘여호야김’ 시대의 1차 포로기는 없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다니엘서에 나타난 상황은 주전 604년 남왕국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속국이 된 후, 종주국에 일부 왕자와 귀족 자제들을 포로로 보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종주국과 속국 사이에 흔히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습니다. 종주국에 왕자를 포로로 보내는 것은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충성 계약이기도 했습니다.
다니엘서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도 바벨론을 배반한 ‘여호야김’은 조금 매정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속국이 배반했는데도 포로를 살려두고 교육시키고 중용한 ‘느부갓네살’이 대단한 인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