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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힘들게 하는 열왕기의 왕들 역사 연대

기사승인 2020.10.15  17: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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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⑸

열왕기 연대표의 수정(예후 이전)

우리는 이스라엘 분열 왕국 처음과 마지막 연대를 추정해 보았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멸망은 분명 주전 586년이 맞습니다. 다만 ‘르호보암’이 왕위에 등극한 때가 주전 929년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쇼생크 1세’의 비문 내용에 의해 이 시점을 잡기는 했지만, 지난번에 지적했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아직 고민할 사항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선 저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북왕국 연대와 남왕국 연대, 분열왕국의 시작과 끝의 연대를 정리한 표를 살펴보겠습니다.

▲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 간의 연표 대조

위의 표는 열왕기 기록에 따른 남·북왕국 연대표입니다. 즉위 시점과 통치 기간은 모두 열왕기의 기록을 따른 내용입니다. 이 표를 보면 우리가 추정한 연대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추정 연대인 주전 929년에서 주전 586년은 총 344년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남왕국 왕들의 통치 기간을 전부 합치면 중첩된 1년씩을 뺀다고 하더라도 총 378년이 나옵니다. 최소 34년의 차이가 생깁니다.

르호보암 연대

만약 우리가 추정한 ‘르호보암’ 등극 시점이 잘못되었고 성경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주전 929년에 34년을 더한 주전 963년이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열왕기상 14장 25절」에 나타난 ‘시삭’은 ‘쇼생크 1세’가 아니라 이집트 제21왕조의 ‘시아문(주전 978-959년)’이 됩니다.

▲ 애굽(이집트) 왕 ‘시아문’ 부조

위의 그림은 타니스에 있는 ‘아문 신전(Temple of Amun at Tanis)’에서 발견된 조각으로, 대부분의 학자는 이 부조에 그려진 인물이 ‘시아문’임을 확실시합니다. 다만 문제는 오른쪽 아래에 표시되어 있는 쌍도끼를 든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일부 학자는 팔레스타인 점령 장면이라고 말하고 일부 학자는 블레셋 점령 장면이라고 말해왔는데, 팔레스타인이나 블레셋에서 쌍도끼를 쓰는 지역이 없다는 점에서 해석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최근의 학자 중에는 실제 역사가 아닌 가상의 승리 장면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시아문’을 ‘솔로몬’ 시대의 파라오로 보고, 이 단편이 「열왕기상 9장 16절」에 나타난 ‘바로의 게셀 탈취와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준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해석이 분분한 이 단편 조각 외에 ‘시아문’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공격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기 때문에 ‘시아문’을 ‘시삭’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왕기의 연대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무언가를 발견해낼 수 있지는 않을까요? 이런 생각으로 열왕기의 연대를 살펴보면 좌절감을 금치 못하게 됩니다. 일전에 언급했던 ‘연차’와 ‘햇수’의 문제도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그보다 앞서 숫자 자체가 맞질 않습니다.

조금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남북왕국의 분열은 ‘르호보암’이 즉위한 해에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르호보암’의 통치 기간이 17년인데, 그의 아들 ‘아비얌’이 ‘여로보암’ 18년에 왕위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여로보암’이 이미 17년 이상 북왕국을 다스리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지난번에 살펴보았던 고대 히브리 달력에서 한 해가 끝나는 ‘아다르’에 ‘르호보암’이 죽고 ‘니산’에 ‘아비얌’이 왕위에 등극했다면, 이때는 ‘여로보암’ 18년이 맞습니다.

아사와 북왕국 왕들의 연대

‘아비얌’의 뒤를 이은 ‘아사’는 ‘여로보암’ 20년에 왕위에 등극했기 때문에 ‘아비얌’ 통치 3년은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1년이 중첩되고 있음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사’는 ‘여로보암’ 20년에 왕위에 오릅니다. ‘여로보암’은 22년을 통치했기 때문에 ‘여로보암’의 뒤를 잇는 ‘나답’의 즉위 시점은 ‘아사’ 3년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바아사’, ‘엘라’, ‘시므리’의 즉위 시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1년씩 더해져야 합니다.

「열왕기상 16장 16절」에 나타난 ‘시므리’의 모반으로 북왕국은 또 두 개로 나뉩니다. 한쪽은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랐고, 한쪽은 ‘오므리’를 따랐습니다. 「열왕기상 16장 23절」은 ‘오므리’가 ‘아사’ 31년에 왕이 되어 12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열왕기상 16장 29절」에 나타난 ‘아사’ 38년에 ‘아합’이 왕이 되었다는 기록과 충돌합니다.

아마 23절의 기록은 ‘오므리’가 ‘디브니’를 이긴 시점이 ‘아사’ 31년이고 ‘오므리’의 재위 기간은 ‘시므리’의 죽음 이후부터 계산한 결과로 보입니다. 즉 ‘오므리’는 ‘아사’ 31년 이전에 4년간 분열된 북왕국의 한 편을 다스렸고, 북왕국을 통일한 후 8년간 왕위에 올랐던 것입니다. 23절의 기록에 따르면 ‘오므리’가 ‘디르사’에서 6년을 다스렸다고 말하는데, ‘아사’ 32년까지 ‘디르사’에서 통치를 했고, ‘아사’ 33년에 ‘사마리아’로 수도를 옮긴 것으로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아사’의 연대에서 북왕국 왕들의 즉위 시점이 ‘나답’부터 ‘시므리’까지는 1년씩 더해야 하고, ‘오므리’와 ‘아합’의 즉위 시점은 맞습니다. 이 정도의 오류는 연대를 역산하면서 실수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가볍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의 경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아합’ 4년에 왕위에 올랐고, ‘아합’는 22년간 북왕국을 통치했기 때문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열왕기상 22장 51절」과는 다르게 ‘여호사밧’ 19년에 왕위에 오르는 것이 맞습니다. 만약 ‘아합’이 ‘아다르’에 죽었다면 한 해가 지나서 ‘여호사밧’ 20년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면 북왕국의 ‘여호람’은 ‘여호사밧’ 21년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를 수정해야 이어지는 남왕국 ‘여호람’이 북왕국 ‘여호람’ 5년에 즉위했다는 내용도 맞게 됩니다.

두 사람의 여호람

여호사밧 다음으로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볼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여호람’입니다. ‘여호람’이라는 이름은 열왕기에서 거의 동시대에 남왕국과 북왕국에 각각 나타납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쓴 ‘밀러’와 ‘헤이스’는 자신들이 만든 연대표에 따라 이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들이 작성한 연대표는 나중에 더 살펴볼 것입니다.

여호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가설은 1) 「열왕기하 1장 17절」에서 북왕국의 ‘여호람’이 등극한 시점을 ‘여호사밧’ 18년 혹은 21년이 아니라 남왕국 ‘여호람’ 2년이라고 기록하며 완전히 다른 연대표 작성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 2)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 왕 역대지략’이라는 표현이 북왕국의 ‘여호람’과 남왕국의 ‘아하시야’ 본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3) 이 둘을 동일 인물로 보았을 때, 이후에 나타나는 몇 가지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세워지게 됩니다.

남왕국에서 왕위에 오르고 ‘아합’의 딸인 ‘아달랴’와 결혼한 ‘여호람’은 자신의 처남인 북왕국의 ‘아하시야’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자, 북왕국의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가설입니다. 이에 따르면 남왕국의 ‘여호람’의 뒤를 이은 ‘아하시야’도 실제는 북왕국 ‘아하시야’와 동일 인물이 됩니다. 즉 ‘~왕 역대지략’이라는 표현이 나타나지 않은 북왕국의 ‘여호람’과 남왕국의 ‘아하시야’는 가공의 인물이거나 열왕기 역사가가 역사를 잘못 이해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열왕기에 나타난 ‘유다 왕 역대지략’이나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이 어떤 책인지, 혹은 비문이나 토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겨진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도 있지만, 열왕기의 기록 외에 비교 대상이 전혀 없기에 이를 재구성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밀러’와 ‘헤이스’의 가설이 맞다고 말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역대지략’이라는 책에 어떤 기록이 실려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열왕기 역사가가 무엇을 혼동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역대지략’에 따라 이렇게 기록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린 이를 전혀 알 수 없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또 같은 이름의 왕이 동시대에 활동한 기록은 ‘요아스’에서도 나타납니다. ‘여호람’의 즉위 시점이 서로 다르게 두 번 나타나는 문제는 열왕기에 즉위 시점에 관한 오류가 너무도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오류만을 가지고 동일 인물 가설을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해 보입니다. 다만 이는 성경의 기록만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후에 주변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이들의 가설을 따르게 될 가능성도 충분히 열려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잠시 정리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북왕국과 남왕국의 왕이 같은 해에 죽는 사건은 딱 한 번 나타나는데, ‘예후’에 의한 왕위찬탈 과정에서 나타납니다. 남왕국 ‘아하시야’와 북왕국 ‘여호람’은 같은 해에 ‘예후’에 의해 죽기 때문에 여기까지 수정한 내용을 먼저 표로 살펴보면 이렇게 됩니다. 정확한 연도는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에 비워놓겠습니다.

▲ 남북왕국 대조 연표 수정 1

예후 이후의 남북왕국 연대

이제 우리를 혼란과 좌절로 이끄는 표를 보게 됩니다. 북왕국 ‘예후’로부터 ‘호세아’에 이르는 시기의 남왕국 연대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가장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북왕국 ‘예후’에서 ‘호세아’까지 통치 기간을 중첩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합쳤을 때, 모두 144년입니다. 그런데 남왕국 ‘아달랴’에서 북왕국이 멸망한 시점인 ‘히스기야’ 6년까지를 마찬가지로 중첩 없이 모두 합쳤을 때, 165년이 나옵니다. 둘 사이에 21년의 오차가 있습니다.

‘예후’ 이전까지는 즉위 시점을 수정하는 것만으로도 남북왕조 연대 사이의 오류를 고칠 수 있었는데, ‘예후’ 이후로는 왕 중 누군가의 통치 기간을 수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긴 연대를 추구한다면 북왕국 왕의 통치 기간을 늘려야 할 것이고, 짧은 연대를 추구한다면 남왕국 왕의 통치 기간을 줄여야 합니다.

사실 처음에 우리는 이전에 추정했던 연대에 비해 남왕국의 통치 기간이 약 34년 더 길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기에 북왕국의 짧은 연대가 맞다고 보고 연대를 맞춰갈 수도 있지만, 그런 방식보다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씩 비교하면서 잘못된 연대를 수정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눈에 띄는 오류는 북왕국 ‘요아스’가 남왕국 ‘요아스’ 37년에 왕위에 올랐다는 점입니다. 이는 북왕국 ‘여호아하스’의 통치기간 17년과 맞지 않고, 남왕국 ‘아마샤’가 북왕국 ‘요아스’ 2년에 왕위에 올랐다는 점과도 맞지 않습니다. 북왕국 ‘요아스’는 남왕국 ‘요아스’ 39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입니다.

아사랴 연대

가장 큰 문제는 남왕국 ‘아사랴’입니다. ‘아사랴’는 북왕국 ‘여로보암 2세’ 27년에 왕이 됩니다. ‘여로보암 2세’는 41년간 왕위에 있었기 때문에 북왕국에 다음 왕이 등극하는 시점은 남왕국 ‘아사랴’ 15년입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15장 8절」은 이때가 ‘아사랴’ 38년이라고 말합니다.

이후 북왕국 왕들의 즉위 시점은 ‘아사랴’ 38년을 기준으로 맞춰져 있습니다. 만약 ‘아사랴’ 38년이 맞다면 ‘여로보암 2세’가 64년간 왕위에 있었거나 23년간 북왕국에 왕이 없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혹은 ‘아사랴’에 앞선 ‘아마샤’의 통치 기간이 잘못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사랴’가 ‘여로보암 2세’ 27년이 아니라 5년에 왕이 되었다면 ‘아사랴’의 통치 기간과 나머지 북왕국 왕들의 즉위 시점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아먀샤’의 통치 기간이 7년으로 줄어버리게 됩니다. 또 이는 「열왕기하 14장 17절」의 기록,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죽은 후에도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15년간을 생존하였다’라는 기록을 무시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15장」은 분명 ‘아사랴’가 52년간 통치했다는 점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생각할 점은 있습니다. 「열왕기상 15장 5절」은 ‘아사랴’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하였고, 그의 아들 요담이 남왕국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아사랴’는 때로 ‘웃시야’로도 나타나는데(왕하 15:13,30,32,34 참고), 「역대하 26장 16-23절」에는 그가 나병을 얻게 된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어쩌면 ‘아사랴’는 16세에 왕위에 올라 52년이 지난 67세에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별궁으로 가고 그의 아들 ‘요담’이 즉위한 시점은 더 빨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열왕기하 15장」이 ‘아사랴’ 52년을 중심으로 북왕국 왕의 즉위 시점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아사랴’의 직접 통치 기간이 더 줄어든다면, 북왕국 왕의 즉위 시점도 더 빨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북왕국을 중심으로 시점을 재조정해본다면, ‘아사랴’ 15년에 북왕국 ‘스가랴’가 등극하여 6개월을 통치합니다. 이 6개월은 아마 해를 넘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사랴’ 16년에 ‘살룸’이 왕에 올라 한 달간 다스리고, 같은 해에 ‘므나헴’이 왕이 됩니다. 「열왕기하 15장 17절, 23절」의 39년과 50년은 12년의 기간인데, 이는 분명 오류로 보입니다. ‘므나헴’이 연말까지 해를 꽉 채워 재위했고, ‘브가히야’가 다음 해에 왕위에 올랐다면, 이 시기는 ‘아사랴’ 26년입니다. ‘브가히야’는 2년간 통치했기 때문에 다음 왕인 ‘베가’는 ‘아사랴’ 27년 또는 28년에 왕위에 오릅니다.

남왕국의 ‘요담’, ‘아사랴’의 아들인 ‘요담’은 북왕국 ‘베가’ 2년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아사랴’는 28년간 왕위에 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의 기록보다 24년이 줄어들게 됩니다. 「열왕기하 15장 33절」의 ‘아사랴’의 아들 ‘요담’이 25세에 왕위에 올랐다는 점을 보았을 때, ‘아사랴’의 통치 기간 28년은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문제는 분명 있습니다. 「열왕기하 15장 33절」은 ‘요담’의 통치 기간이 16년이라고 말하는데, 만약 ‘아사랴’가 28년째에 별궁으로 가고 아들 ‘요담’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24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면, ‘아사랴’는 자신의 손자가 왕이 될 때까지 살아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15장 7절」은 ‘아사랴’가 ‘요담’ 때에 죽은 것으로 기록합니다.

요담과 호세아 연대

또 혼란을 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5장 30절」은 ‘웃시야’의 아들 ‘요담’ 20년에 ‘호세아’가 반역하여 ‘베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 말합니다. 이는 「열왕기하 17장 1절」에 나타난 유다왕 ‘아하스’ 12년에 ‘호세아’가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과 충돌합니다. 또 요담의 통치 기간 자체도 충돌합니다.

‘아하스’ 12년에 ‘호세아’가 왕이 되었다는 것도 문제는 있습니다. ‘아하스’는 북왕국 ‘베가’ 17년에 왕이 되는데, ‘베가’는 20년간 통치했기 때문에 ‘아하스’ 4년에 죽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아하스’ 12년에 왕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호세아’가 ‘아하스’ 4년에 왕이 된다면, 북왕국이 ‘히스기야’ 6년에 멸망했다는 「열왕기하 18장 9-10절」의 기록은 잘못된 것이 됩니다. 하지만 북왕국 멸망 시점에 관한 오류가 있으리라 생각되진 않습니다.

북왕국이 멸망한 시점부터 생각을 해본다면, 「열왕기하 18장 9-10절」의 기록에 따라 ‘호세아’ 7년은 ‘히스기야’ 4년입니다. 즉 ‘호세아’ 3년에 ‘히스기야’가 즉위했다는 「열왕기하 18장 1절」의 기록은 잘못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호세아’ 4년에 즉위합니다.

만약 북왕국의 연대가 조금 더 신빙성이 있어서 남왕국 ‘아하스’가 ‘베가’ 17년에 즉위했다면, ‘호세아’는 ‘아하스’ 4년 또는 5년에 왕위에 오른 것이 됩니다. 만약 「열왕기하 15장 30절」이 북왕국의 기록이고, 북왕국 역사가들이 ‘요담’의 통치가 끝나고 ‘아하스’의 통치가 시작된 사실을 몰랐다면, 이 시점은 ‘요담’ 20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요담’과 ‘아하스’는 4년간 공동 통치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몇 년간의 공동 통치는 왕위 계승에 따른 자녀들 간의 다툼을 없애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가설일 뿐이지만, 공동 통치가 있었다고 한다면, ‘아하스’는 ‘베가’ 17년에 ‘요담’과 공동 통치를 시작하여 4년간 국정을 배우고, 북왕국 ‘호세아’와 같은 해에 왕위에 등극하여 ‘호세아’ 4년까지 총 8년간 남왕국을 통치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가정일 뿐입니다.

내용이 길어지기 때문에 우선 지금까지의 내용을 다시 표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표가 어느정도 정리되었기 때문에 연도도 계산해서 함께 넣습니다.

▲ 남북왕국 대조 연표 수정 2

이전에 계산했던 연대와 17년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르호보암’ 5년이 ‘쇼생크 1세’ 재위 기간 안에 들어와 있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연대표도 아직 문제가 많습니다. 성경의 내용에 따라 임의로 수정한 내용이고, 주변국의 자료와 비교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북왕국 멸망 이후 남왕국의 연대는 손대지도 못했습니다.

이후에는 주변국의 자료들과 함께 비교하면서 연대의 세부적인 수정 작업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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