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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심을 비껴 가는 사랑

기사승인 2024.07.25  02: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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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출애굽기 19,1-6; 골로새서 3,1-15)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은 탐심을 제어하고 사랑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다. ⓒGetty Images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그 의미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종교를 갖는다면 기독교를 선택하겠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인 시대입니다. 기독교가 좀더 매력적인 것처럼 보이기에 선택하고 목사를 비롯한 교회의 타락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태도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그 차원에 머무른다면, 언제든지 기독교인임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고,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상당한 정도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자기 안에 분명하게 새겨진다면 달라지지 않을까요? 물론 사람이 늘 깨어 있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러면 순간순간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가서 물을 수 있고 반성과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말들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사변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연히 그러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사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의 현재와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구원이라는 지극히 종교적인 말로 설명하려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설령 궁극적인 표현이 될 수 있을지라도 그의 현재와 관계되지 않는다면, 그 말은 자기를 배반하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맺은 저 관계 때문입니다. 그 관계는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믿음은 그가 우리의 주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관계를 통해 자기를 드러내려 하십니다. 그렇기에 그 관계의 표현이 곧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빛과 소금은 언제나 타자를 향하며, 사람들이 어둠을 깨닫게 하고 살 맛 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오시는 나라를 보게 할 것입니다.

이 비유적 표현을 본문은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위(프락시스)와 함께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되어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9b-10절)라고 설명합니다. 새사람으로 일컬어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기에 그의 새로움의 근원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를 따른 새로움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르는 목표 지점은 지식입니다. 여기에는 창세기 1-3장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탐심을 따라 획득한 인식 능력으로 자신의 결핍을 아는데 이르렀고 부족하나마 그것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 인식과 해결 능력은 무수한 폭력과 차별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을 위임 받았지만, 인간에게 착취당해온 세상은 지금 멸망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흐름을 뒤바꾸는 것이 새사람의 창조 목표일 것입니다.

그리스어 본문에는 단순히 ‘헬라인 … 등이 있지 않다’로 되어 있지만 역본에 따라 차별이라는 말을 넣어 옮긴 것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옛사람이 지배할 때 사람들 사이에는 갖가지 차이들이 차별과 폭력의 원인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본문은 인종의 차이를 한 예로 들며, 이를 넘어서기 위해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 안에 있다’는 말을 합니다. 오해의 위험을 무릅쓴 과감한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란 인종의 차이들을 뛰어넘어 모두를 포괄하는 말로 이해하고 그들 모두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말로 이해하면, 일단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을 따라 이 차이들을 보면 차이만으로도 무시하고 멸시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본다면 그러한 차이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모두 가운데 그리스도가 계심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종만이 아니라 종교와 이념의 차이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움으로 이르는 지식이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모두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만이 전부임을 아는 지식, 모두를 충만하게 하는 지식일 것입니다.

본문은 흥미롭게도 5절과 12-14절에서 옛사람과 새사람의 사람됨의 차이를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짤막하게나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옛사람의 모든 특징들의 근원인 탐심과 새사람의 모든 특징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의 대비입니다. 사람이 탐심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임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길이 사람에게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도 그가 사랑하는 자를 해할 수 없는 것은 일를 탐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의 사랑의 능력은 지극히 작습니다. 이를 넓힐 수 있다면, 탐심은 그만큼 우리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이와 관련하여 우리를 하나님이 택하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위함이며, 거룩함은 그 관계가 지향하는 목표이며, 사랑받는 자로서의 사랑은 그 관계를 실현시키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랑의 샘입니다.

막을 수 없는 그 샘을 막으려는 것이 탐심입니다. 그 샘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이유이므로, 그 샘물이 우리 안에서 강물을 이루고 우리가 그 안에서 강물과 하나 되기를 빕니다. 사랑의 샘이 평화의 강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그를 십자가에 매단 세상에 주는 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사는지요? 그는 하나님에게 사랑 받는 자로서 사랑으로 삽니다. 그 사랑의 실천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거룩하다고 인정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그 안에 머물게 하실 것입니다. 이를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되기를 빕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본문이 의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만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4-6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민족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 사랑을 드러내며 사는 사랑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빕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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