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 자신 안에 목표가 분명할수록 성찰은 사라지고 기존의 방법을 따르게 된다. 성찰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Getty Images |
히스기야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창고의 금은과 향품과 좋은 기름과 그의 무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그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여주지 않은것이 없었다.(열왕기하 20,12) |
앗시리아의 포위를 견뎌내고 기적적으로 앗시리아의 퇴각을 경험한 히스기야는 죽음의 위기에서도 하나님의 기적적으로 생명의 길이가 연장된 히스기야입니다. 그의 곁에는 이사야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사야 때문에 그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존재 위기에서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존재의 심연에서 존재자와의 만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는 그로 인해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라는 물음이 생기지만 직접 답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 소문이 저 멀리 바빌로니아까지 전해졌습니다. 아마도 앗시리아라는 대제국 변방에서 새로 생겨난 신흥국가이기 때문에 앗시리아의 대공세를 견뎌낸 유다에 큰 관심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보도는 없지만 유다와 반앗시리아 동맹을 맺고 싶어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빌로아는 그를 위문하고자 사절단을 보냅니다. 위문차 온 사절단이 격에 맞게 예우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사절단에게는 유다에 온 또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맹의 가능성과 동맹으로서의 효율성 등을 파악하고자 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히스기야가 그의 보문 창고와 무기 창고를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자랑과 과시로 밖에는 설멍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가볍고 생각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기적의 경험이 그를 무모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기적을 경험하는 과정은 하나님과 그의 만남이 오히려 그가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되는 결과를 나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그가 자기와 유다의 모든 것을 사절단들에게 보여준 것은 반앗시리아 동맹에 대한 지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는 앗시리아에게 두 번의 굴욕을 당했기 때문에 반앗시리아 동맹에 기대 앗시리아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 더 적극적으로는 보복을 원했을 수 있습니다. 그가 자기의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은 동맹의 자격이 충분함을 입증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바로 이사야의 말입니다. 히스기야가 사절단에게 보여준 모든 것이 바빌론으로 옮겨가고 그의 후손들이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고 사실상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인지요? 히스기야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일까요? 그는 다윗의 길을 갔다고 칭송받았고 하나님을 의지했다고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덤으로 더받은 그의 생을 정반대의 모습으로 마감하는 것은 아닌지요?
신생국 바빌로니아와 동맹을 맺으려 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대단히 불쾌한 일이었나 봅니다. 그 동맹이 곧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될 수 있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도움과 기적이 고난과 위기와 불행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러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 가운데 오시고 그 안에서 함께 계시며 그로부터 건져내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히스기야는 그 큰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와 지략과 동맹으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이러한 시도를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좀더 신중하게 좀더 겸허하게 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는 그 순간 이사야를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를 성찰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심코 한 그의 선택과 행동은 하나님과 충돌을 결과했습니다.
자기를 성찰하는 믿음의 길 가는 오늘이기를. 겸손과 용기로 하나님 앞에 나를 세우는 이날이기를. |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