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7(요한계시록 21:3)
▲ 「John of Patmos watches the descent of New Jerusalem from God in a 14th-century tapestry」 ⓒWikipedia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계 21:3) |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하나님의 집’, 이런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루 일을 마친다는 것, 하루를 마감한다는 것은 곧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날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울 수 있습니다. 오늘 주어진 삶의 무게를 잘 감당했고, 삶의 과제를 잘 마무리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집은 우리에게 ‘당신 정말 대견해.’ 말해주는 기쁨과 환대의 공간입니다. ‘저는 혼자 사는데요?’ 이런 분도 계시겠지요? 그래도 집만큼 마음껏 기뻐하고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는 공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아내나 남편은 무뚝뚝한데요?’ 이런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마음 편히 생색은 낼 수 있지 않습니까?
또 어떤 날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울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지 못한 일, 실수, 후회스런 일들이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어서 그렇겠지요. 그때 집은 우리에게 ‘괜찮아, 당신 할만큼 했어, 이런 날도 있지 뭐. 내일이면 또 다른 기회가 생길 거야’ 말해주는 위로와 격려의 공간입니다. 너무 바빠 정신없이 일만 하다 녹초가 된 날에는, 우리가 돌아가는 집은 우리에게 힘 다 빼고 미끄러지듯 누워서 두 다리, 두 팔 쭉 펼 수 있는 쉼과 안식의 공간이 되어 줍니다.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날에는, 우리가 돌아가는 집은 우리에게 성찰과 결단의 공간이 되어 줍니다. ‘잘해낼 수 있을까, 앞으로 어떻게 될까’ 걱정에 사로잡히는 날에는, 우리가 돌아가는 집은 소망과 기대의 공간이 되어 줍니다. ‘뭐가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난 이게 뭔가’ 싶은 날에는, 우리가 돌아가는 집은 소소한 것으로 만족하며 감사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를 마무리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집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일 매일 돌아가는 그 집이 때로는 불완전하고, 때로는 위태롭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거공간 자체가 불안정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다음달이면 전세일이 만료인데, 전세금을 올려주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습니까? 결혼하는 자녀, 집을 마련해 줘야 하는데, 자금이 부족하면, 어떻습니까?
집은 때로 우리에게 고통입니다. 가족관계가 불안정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대화가 끊어진 부부, 취업에 번번히 실패하는 자녀, 빠듯한 생활비, 이런 것들로 집은 때로 우리에게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안하고 우울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돌아갈 집이 필요한데, 그 집이 부재하는 순간이나 상황이 발생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원하고 완전한 집이 필요합니다.
하루 하루를 마무리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우리 인생 전체, 우리의 전 존재, 우리 삶의 전 영역을 갈무리하고 새롭게 할 집이 필요합니다. 그런 집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마무리하며 집으로 돌아가듯, 성경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전 생애를 다해 궁극적으로 돌아갈 집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집이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집은 우리가 죽음 이후에나 돌아갈 수 있는 집입니까? 눈에 보이는 이 현실 세계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집입니까? 아니면 교회당이 하나님의 집입니까? 교회당 바깥은 하나님의 집 밖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하나님의 집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특정한 물리적 공간을 말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모든 시공간, 모든 차원과 영역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가 터접고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 당장에는 우리가 인정하기 쉽지 않고 납득하기 쉽지 않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시편 104편 기자는 2-5절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6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시리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 세계 어디든 하나님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우리에게 명하신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창세기 2장 15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그런데 이 에덴 동산은 어떤 곳입니까? 창세기 3장 8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거니시는 곳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9절에 의하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0절 이하에 의하면, 생명의 원천수가 흘러 나가는 곳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은 온 세계의 중심이자 온 세계를 관장하는 정부가 있는 마치 수도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에 사람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이곳을 경작하고 지키라 명하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계를 하나님의 집으로 삼고, 이 세계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주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의 원리과 방식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이 세계를 번성하게 하고 돌보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대사로 지은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에덴 동산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원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덴 동산을 뛰쳐나온 게 바로 우리었습니다. 창세기 3장의 타락 이야기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에덴 동산을 뛰쳐나온 우리는 자신 만의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진짜 집을 잊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신 만의 왕국에 도취된 우리는 어느새 이 세계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식할 능력도 잃어버리고, 이 세계를 하나님의 집으로 대할 능력도 잃버렸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의 집을 파괴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현재 기거하고 있는,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지어진 집은 크고 튼튼하고 화려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돌아갈 진짜 집을 잊었고, 또한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진정한 기쁨도, 위로도, 안식도, 만족도, 희망도 없는 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돌아갈 진짜 집을 잊고, 잃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도, 잃지도 않으십니다.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달아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4장 15절입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 없이 홀로 살겠다고 떠나는 가인의 목숨을 지키셨던 하나님이 어찌 우리를 되돌려 놓으려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온 인류를 다시 당신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통해 크고 놀라운 계획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제단을 쌓게 하셨습니다. 이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입니다. 이 제단은 곧 하나님의 집을 환기시킵니다.
야곱이 에서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던 중, 잠시 잠을 청했을 때, 꿈 속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늘로부터 사닥다리 하나가 지상으로 내려왔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잠에서 깬 야곱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창세기 28장 16-17절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은 아침 일찍 베개로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곧 제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 명명했습니다.
이 제단이 이후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으로 이어집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가까이 나아와 하나님을 만나는 만남의 장막입니다. 그래서 회막이라도 불립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진영 한복판에 위치한 성막의 지성소, 곧 법궤가 위치해 있는 곳에 임재하셔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성막은 진짜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임시 거처였습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성전신학”에서, 이 성막은 사실 온 우주의 축소판으로 설계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과 모세가 올랐던 시내산을 본따 만든 정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 곧 온 우주가 성막에 담겼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시편 78편 69절을 보십시오.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비일에 의하면, 성막은 크게 세 영역으로 분류됩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이 위치한 뜰이 첫 번째 영역인데, 이 영역은 땅과 바다를 상징합니다. 두 번째 영역은 분향단과 등잔대와 떡상이 위치한 성소입니다. 성소는 하늘을 상징합니다. 세 번째 영역은 법궤가 위치한 지성소입니다. 이 지성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 하나님의 하늘 보좌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성막에는, 결국 온 우주를 우리와 함께 살 당신의 집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계획이 엿보입니다. 동시에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집을 찾지 못하고 있는, 연약하고 무지한 우리를 향한 사랑이 엿보입니다. 성막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성막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막 자체가, 온 세계를 우리와 함께 살 당신의 집으로 삼으시려는 계획을 내포하고 있기에, 요한계시록이 언급하는,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최후 비전에도 하나님의 장막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21장 3절입니다. “내가 들이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하나님의 장막, 곧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게 하나님의 마지막 꿈이라는 말입니다. 이 꿈은, 창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밝히신 첫 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의 장막은 어디에 있습니까? 21장 1절은 새 하늘과 새 땅이 곧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밝힙니다. 이전의 하늘과 땅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던 하늘과 땅이었고, 하늘과 땅이 마치 제 것인양 주인노릇허며 살던 하늘과 땅이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하늘과 땅이니, 곧 하나님의 장막이라는 말입니다.
동시에 2절은 하나님의 장막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집, 성전이 위치해 있던 곳이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인 왕이 나라를 다스리던 곳입니다. 이전의 예루살렘은 우상을 숭배하며 성전을 더럽히는 왕, 하나님의 왕되심을 망각한 채 하나님의 법이 아닌 자기 욕망의 법을 따라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백성들을 착취하던 왕이 머물던 곳이라면,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왕되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통치 방식을 따라 하나님의 법대로 온 백성들을 섬기는, 왕 같은 제사장이 하나님과 함께 거주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장막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비전에 의하면, 하나님의 장막, 곧 하나님의 집은 온 세계를 그 무대이자 마당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집은 하나님만 거하시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도 함께 거주하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통치의 방식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복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동거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의 명을 따라 온 세상을 가꾸고 돌보고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보이신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치하셨기에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집이셨습니다. 그분이 머물고 활동하셨던 모든 자리,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비전을 우리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하나님의 집을 지향합니다. 온 세계를 하나님의 집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님의 집을 지향하는 우리들의 삶을 통해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정은 마침내 완성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분명 이 세계에 계시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이 세계를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는 다른 세계, 허상에 불과한 세계를, 그저 나 홀로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의 번영을 위해 일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 통치에 무지하고, 그것에 무감각할 때가 많습니다. 물질적 번영만 탐할 뿐,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이 세계를 우리와 함께 다스리시길 원하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고 우리 식대로 이 세상을 대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우리의 필요와 욕구를 무한대로 채워줄 수 있는 자원처럼 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간 잊고 지낸, 잃어버린 하나님의 집을 향해 다시 돌아서야 합니다. 온 세계를 하나님의 집으로 삼는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며 하나님의 통치의 방식대로 이 세계를 대하고 이 세계와 관계 맺는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 세계에 여전이 눈물이 있는 한, 사망과 애통함과 곡과 아픔이 이어지는 한, 하나님의 집을 향한 우리의 걸음을 멈추어선 안됩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자체가 우리에게 위안이 되고 쉼이 되고 희망이 될 것입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