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도 웨슬리도 모두 출교를 당할 수밖에 없는 감리교회
▲ <차별에 반대했던 예수를 지지하는 시민모임>은 <감리교 차별너머와 함께> 심사와 재판의 과정에서 매번 응원해 주었다. 출교 선교를 받고 난 다음 마지막 기자회견 사진. ⓒ남재영 목사 제공 |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
“벌칙 중 가장 중한 출교에 처함이 마땅하다고 보여져 주문과 같이 정한다.” 주문-“피고소인을 출교한다. 출교는 면직을 포함하는 것이므로 목사직을 박탈하고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추방을 뜻한다.” ‘출교’가 무엇을 뜻하는지 친절하게 뜻풀이까지 해준 재판원장의 선고를 들으면서 나는 웃었다. 그리고 이효리의 ‘Chitty Chitty Bang Bang’이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났다(가사가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시기 바란다.)
재판의 과정에서 나는 퀴어들도 영혼을 가진 사람인 한 그 영혼도 하나님의 은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목회적 돌봄이 절실하고, 그 영혼을 돌보는 것은 목사의 일상적인 상무(常務)라는 점을 수없이 강조했다. 퀴어축제의 축복식과 부스 설치 전도용 소책자를 제작하여 교인들과 함께 배부한 것은 목사된 내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었다. 퀴어를 전도하여 퀴어들과 영적 여정을 함께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의 이런 주장은 끝내 배척되고 출교가 선고되었다. 출교 선고를 받았지만 나는 아직도 퀴어의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가 죄가 될 수 없고, 또 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선고를 받기 위해 재판이 열리는 남부연회 본부로 갈 때까지도 나는 재판위원들이 재판의 과정에서 내가 작성해 낸 소명자료를 잘 읽었다면 나는 무죄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출교였다. 재판위원장의 입에서 출교라는 말이 나왔을 때, 그 순간 나는 출교는 내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시대정신이 뭔지도 모르는 그들이, 사랑의 언어로 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혐오의 무기로 사용하며 상처받은 영혼을 마구 찌르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버스를 함께 타고 갈 수 없으니 내리라는 말이 출교였다. 불편을 감수하며 함께 가던 나도-내 피를 저들이 자기 손에 바르면서-버스에서 내리라고 말해줘 정말 고마웠다.
재판위원장이 출교를 선고하는 그 순간 내 안에서는 출교는 내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의심 없이 받았다. 이 터무니없는 확신은 어디에 근거한 건지? 또 무죄와 출교 사이에는 뭐가 문제였을까? 저들의 무지가 문제였는지, 아니면 우리 감리교회가 18세기 웨슬리의 정신을 오롯이 품고 있지 못해도 빛깔이라도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내가 문제였는지. 깊이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재판 이후 나는 숙려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판결문을 읽으면서-평생을 목회를 하고, 은퇴를 앞둔 목사의 모가지를 비틀면서 이렇게 허접스럽게 판결문을 작성해서 던져도 되나. 측은지심이 들었다.
적어도 판결문에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적시하는 거짓은 없어야 했다. 그건 판결문에 대한 예의이다. 내가 받은 것은 재판이 아니라 분별력을 상실해서 사리분간을 잃은 당신들의 장난질이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차라리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성을 잃은 동성애 광풍이 휘몰아치는 거기에서 내가 뭘 기대했던가. 낙망(落望)의 현실이 바닥을 헤집고 있는 감리교에서 나는 외려 출교 처분이 참 감사했다. 숙려의 기도 시간이 길어질수록 출교가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분명하다는 확신은 더 깊어졌다.
2026년 연회에서 은퇴할 예정인 나는 어머니 감리교회의 아들로 평생을 사회적 아픔으로 신음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의 현장을 품고 목회를 해왔다. 그렇게 목사로 살아온 여정에 대해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 감리교회가 이 지경이라는 사실이 저리고 슬펐다. 그리고 내가 궁금했던 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나 같이 미련하고 부족한 것에게-출교라는-벅차고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은총을 주셨는지. 이것이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 의문은 나를 벅찬 감격에 다시 사로잡히도록 했다. 숙려기도를 드리면서 2박 3일간 내 아우의 충주 산척 산장에서 피정을 했다. 피정 첫날 깊은 밤 홀로 고요와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은 ‘내게 허락하신 특별한 은총’에 대한 의미를-교사가 아이들을 지도하듯이-내게 가르치셨고, 그 가르침은 나를 벅찬 감격에 휘감기게 하는 놀랍고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 퀴어 축제에서 빈들공동체 부스 앞에서 교인들과 청년들 ⓒ남재영 목사 제공 |
웨슬리도 3조 8항으로 출교를 당했을 것이다
순례자 원숭이가 어느 날 눈이 하나 밖에 없는 원숭이들이 사는 동네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동네에서 만나는 원숭이들은 모두 눈이 하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외눈박이들이 두 눈을 가진 원숭이를 따라다니면서 “두 눈 원숭이! 두 눈 원숭이! 등신 바보 쪼다 같은 두 눈 원숭이놈!”하고 놀렸다. 그리고 조리돌림을 당하던 두 눈 원숭이를 묶어 외눈박이 원숭이들은 그 마을 원님에게 데리고 갔다. “우리 동네는 모두 눈이 하나인데, 두 눈을 가지고도 회게할 줄 모르고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다니는 죄를 엄벌해야 한다”고 고소했다. 원숭이 마을의 원님은 “네 이 놈! 네 죄를 알렸다!”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원님은 근엄하게 두 눈 원숭이가 자기 죄를 회개한다는 표시로 두 눈 가운데 하나를 뽑으면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주겠다고 한다. 협박하고 어르고 달래면서 회개하고 눈 하나를 뽑자고 해도 두 눈 원숭이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렇게는 못하겠는 디요.” 결국 원님은 “저 놈을 패대기쳐 마을 밖으로 내치고 다시는 우리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그렇게 외눈 원숭이 마을에서 쫓겨난 두 눈 원숭이는 다시 자기 세상을 찾아 순례 길을 이어갔다. 두 눈 원숭이들이 사는 마을을 찾아서. |
이게 뭔 서사인지 들을 귀가 있는 이들은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웨슬리의 문서 가운데 존 웨슬리가 직접 쓴 <옥스포드 다이어리즈(Oxford Diaries)>에는 1732년 웨슬리는 보르카르도 교도소에서 동성애로 구금된 ‘토마스 블레어(Thomas Blair)’를 만난다. 웨슬리는 목회적으로 그를 성심을 다해 돌보게 주었다. 당시는 웨슬리의 신성회(Holy Club)는 엄격한 신앙생활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의 오해와 조롱을 받을 때였다. 사람들은 온갖 억측과 편견으로 신성회를 모함했다. “지나치게 몸을 학대하고, 육체의 정욕을 다스리기 위해 피를 흘리기도 하고, 성욕을 억제하려고 성기를 절단한 교부 오레겐을 찬양하는 광신주의자로 매도당했던지라 신성회의 멤버들이 웨슬리에게 동성애를 찬성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걱정 어린 충고를 안했겠는가.
그럼에도 존 웨슬리가 동성애 죄수자인 블레어를 돕기 위하여 여러 번 방문하여 그를 목회적으로 돌보는 자기 소명에 성심을 다했다. 웨슬리가 동성애자 불레어를 목회적으로 돌보는 그 일로 실제로 신성회가 타격을 입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주간신문 <포그의 주간 잡지(Fog’s Weekly Journal)>에서는 옥스퍼드 신성회 메소디스트들은 악성 사회적 우울증 증세를 가진 자들이며 이러한 우울증이 영국에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김진두. 『존 웨슬리의 생애』 97). 무지의 시대, 오해와 핍박으로 신성회의 회원 숫자가 한 때 감소하였으나 웨슬리의 목회적인 소신은 계속 유지되었다. 만약 웨슬리가 오늘 감리교회에서 토마스 블레어를 돌보았다면 감리교회의 동성애 혐오세력들은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웨슬리도 나처럼 감리교 재판법 3조 8항에 의거 출교를 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퀴어축제에 참여하고 부스를 설치하고 전도소책자를 제작해서 나눠 준 것은-웨슬리처럼-퀴어들의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회적인 관심이 전부였다. 교도소의 재소자들과 구빈소의 가난한 사람들, 탄광 노동자들 위해서 웨슬리는 당시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목회적으로 돌보았다. 창녀와 세리와 온갖 장애인들과 당시 사회적 협오의 대상이었던 나병환자까지 다 품고 돌보신 예수님도 웨슬리처럼 성소수자들을 품어주셨을 것으로 확신한다. 저들은 어떤 예수를 믿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예수님을 믿는다. 그 예수님도 오늘 감리교에 계셨다면 3조 8항에 걸려 분명히 나처럼 출교를 당하셨을 것이다. 외눈박이 마을에서 쫓겨난 두 눈 원숭이처럼.
출교의 은총으로 감격에 사로잡히게 해준 스승의 가르침
▲ 퀴어죽체에서 참석자들에게 나눠준 전도용 소책자 - 환대와 축복의 퀴어영성 ⓒ남재영 목사 제공 |
나는 스물여덟 살에 목원대학 신학과에 입학했다. 내가 목원신학에서 제2대 학장 이호운 목사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신학을 중도에서 포기한 탈락자가 되었을 것이다. 우연하게 접하게 된 그분의 글을 편집한 <목원의 꿈>은 신학을 해야 할 의미를 잃고 방황하던 내게는 또 다른 성전(聖典)이었다. 그 책에서 그분은 ‘흙에 갠 말씀’에 대해 말한다. 거기 ‘흙에 갠 말씀’을 그분은 ‘복음의 실제화와 생활화이요 복음의 대중화와 민중화’라고 했다.
복음의 실제화와 생활화와 민중화는 “갈릴리, 사마리아, 디베랴 호수, 변화산, 감람산, 가버나움, 수가, 예루살렘 거리에서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 사귀들린 사람들과 함께 느끼고 말하고 걱정하고 애타했으며 그들과 함께 사신 예수처럼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살며 주님의 말씀과 생활을 오늘날 생활 속에 번역해내고 살려 내자는 것”이라고 했다.(‘감리교대전신학교 창립 10주년을 맞으며’, 1964) 나는 그분의 ‘흙에 갠 말씀-복음의 실제화와 생활화 그리고 복음의 대중화와 민중화’-에서 내가 평생을 흔들림 없이 가야할 길을 발견한다. 이호운을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분는 오늘까지 내 목회와 영성과 신학에서 스승이 되었다. 그분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른다면 반드시 출교를 감수해야만 한다. 내 출교는 그래서 참 다행일 수밖에 없다. 아래 글은 그분의 가르침이다.
정말 다부지고 엄청나고 엉뚱한 것들이 되어다오. 현대가 이해 못하더라도, 교회가 감당할 수 없드라도 여러분들이 정말 아는 것, 본 것을 말하고 소신을 말하라. 남의 흉내나 내고, 사람들이 씹다 남긴 찌꺼기나 삼키는 것들이 되지 말고 당신네 자신들 만이 가질 수 있고 할 수 있는 색다른 <네>가 되어 다오. 형편 없이 짜거나, 매우 맵거나, 몹시 시거나, 못견디게 쓰거나 어느 하나가 되어 다오. 뚜렷하고, 엉뚱하고, 지독한 것들이 되어 다오. … 엉뚱한 일을 한 사람들. 그들로 인해 역사는 방향을 바꾸었고 새 세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런 엉뚱하고 과감한 행동은 움직일 수 없는 확신과 무한한 용기와 피나는 노력이 함께 했던 것이다. 남의 눈치나 살피며 흉내나 내며 살지 말고 비죤을 보고 꿈을 꾸며 살아다오. 확신과 소명감을 가지고 박차고 다부지게 살아다오. <1966년 졸업식 훈사 중에서> 여러분은 복음의 사자들이요, 평화의 사신이요, 진리의 예언자요, 어린양의 목자들이요, 상한 심령들을 위한 제사장들이요, 위로자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모든 부정과 불의와 부패를 뜯어 고치고 새것을 세우는 혁명아적 새 시대의 건설자입니다.…교권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독단과 독선으로 분쟁, 분열을 일삼으며 분파를 거리낌없이 하는 못된 생각과 움직임은 쳐부셔야하고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금권을 휘두르고 인간의 향락과 성취에 도취하는 과오를 고발하고 심판해야 할 것입니다.전통을 묵수(黙守)하고 기성세대의 뒤만 좆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자랑삼을 것이 아니라 꿈을 가지고 비존을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들어서 뜯어 고쳐야 할 것을 뜯어 고치고 새로 세울 것을 세우며 확창해야 할 것을 확창하기 위하여 결연히 서고 용감히 나아가는 개혁자들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1963년 졸업식 훈사 중에서> 교역자의 가치와 생명은 예언자와 같이 바른 말을 소신껏 하고 사는 일이다. 그런데 성직자가 그것을 못하거나 잃었다면 죽은 송장이다. <우리 교계에 새로운 기풍을 세우자 - 대전신학보, 제13호 1967년 4월 28일> |
2박 3일간의 피정에서 돌아와 이 자료를 찾아보며 나는 출교의 은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감격에 사로잡힌다. 평생을 스승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다는 감격이었다. 그동안 나는 은퇴를 앞두고 있고,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뒷방으로 물러 앉아야할 때라고 생각했다. 대부분 가난한 교회의 은퇴자들이 그런 것처럼 많지 않은 은급금으로 겨우겨우 생계를 꾸려가는 노년이 남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출교는 다시 내 가슴에 펌프질을 해주었다. 감리교회는 나를 출교시켰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나를 옷 입으시고, 당신께서 가시고 싶은 길이 남아있으시고,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의향(意向)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출교 이후 내 삶에는 새로운 기대와 설레임이 생겼다.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 대전퀴어죽제가 있던 날 빈들공동체교회 외벽에 내건 무지개 깃발 ⓒ남재영 목사 제공 |
감리교회에서 웨슬리를 끌로 파내고 있는 잡종 웨슬리안들
출교 이후 나는 내란 수괴 윤석열을 퇴진시키는 일로 분주했었다. 윤석열은 국회에서 마침내 탄핵되었다. 지금 내 영혼은 더 없이 맑고 고요한 평화를 즐기고 있다. 재판 과정에서는, 매번 공정성이 지켜지지 않는 위법성에 대해서 항의도하고 심사를 거부도 하고, 때로 재판을 보이콧하면서 마음이 심히 불편했었다. 재판이 시작 되면서 심사와 재판과정에서 대전지역의 시민사회 단체들이 연대하여 <차별에 반대했던 예수를 지지하는 시민모임>을 조직하여 나의 무죄를 주장하는 피켓시위를 해주고 기자회견도 주선해주었다. 이 모임에는 기독교인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출교 선고를 받고 내려왔을 때, 출교가 뭘 의미하는지를 알고 그들은 나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내게는 남부연회의 동역자들보다 그들이 더 따뜻했다. 참 아이러니다.
이들에게 나는 “신앙이 없는 분들은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저는 출교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특별한 은총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동성애를 찬성하고 동조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에 해당하는 범행사실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사건’이라는 긴 죄명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런데 출교 선고 이후 지금까지 내가 뭘 회개해야하고, 무엇이 내가 저지른 범행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그래서 출교를 통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내게 확실하고 선명한지도 모르겠다. 출교와 관련하여 내가 해야 할 회개가 뭔지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감리교회 안에 악한 영에 사로잡힌 동성애 광풍이 계속 불고 있지만-태풍은 사납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일기(日氣)를 보고 터득한 지혜이다. 동성애 광풍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 출교는 답이 아니다. 언젠가 악한 영에 사로잡힌 저들이 분명히 깨닫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지금 동성애 광풍을 일으키면서 웨슬리의 감리교회에서 웨슬리를 끌로 파내고 있는 이들은 웨슬리안이라 할 수 없다. 제3조 8항을 들이대며 광분하는 자들은 누구도 웨슬리안이 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저들이 웨슬리안이라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들이 ‘잡종(雜種) 웨슬리안’이라는 데까지는 양보할 수 있다. 지금은 잡종들에게 순종이 수난을 당하는 시대이다. 동성애 혐오에 눈이 멀어 감리교회를 수렁으로 밀어 넣는 저들의 정체는 웨슬리를 말해서는 안되는 괴물 ‘전광훈의 아류’들일 뿐이었다. 실제로 남부연회 동성애대책위는 전광훈 집회 참석을 연회자료집에 사업이라고 보고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마치면서, 목회의 길에 들어선 젊은 후배 목사들에게는 정말 미안하다. 은퇴를 앞둔 목사도 마구 목을 치는데-출교를 당한 나를 보면서 후배 동역자들이 느낄 공포감이 걱정된다. 그러나 거기에 주눅 들면 안된다. 싸우지 않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눈에 뵈는 것 없는 미치광이들이 사나운 태풍처럼 우리를 흔들어도, 뿌리가 뽑히지 않으면 반드시 족쇄를 벗고 자유로운 목회를 해나갈 수 있는 날을 만나게 된다. 역사의 날씨로 보면 나는 그 날이 멀지 않았다고 본다. 하여 내 출교 처분이 사나운 태풍 앞에선 후배들에게 공포가 아닌 뿌리를 튼실하게 해주는 거름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시궁창을 통과할 때에도 오염되지 않는 빛으로 주님께서 후배들의 길을 밝혀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남재영 목사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