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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 육문중학교는 어떤 곳인가요?

기사승인 2024.12.21  04: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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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 백문백답(10)

▲ 김성주가 투옥되어 있던 길림감옥

▲ 문: 길림 육문중학교는 어떤 곳인가요?

답: 길림 육문중학교는 화전의 화성의숙을 중퇴한 김성주가 길림으로 가서 편입한 학교입니다. 김시우의 소개신을 본 김사헌은 김성주에게 길림 육문중학교를 추천하였습니다. 김형직 선생의 방향전환 노선을 알고 있던 김사헌은 당시 길림에서 가장 경향성이 좋고 진보적인 육문중학교를 추천한 것입니다.

당시 길림 육문중학교의 교장은 리광한이었습니다. 그는 천진의 남개대학교 부속 중학교 시절 주은래 총리와 동문수학하며 그 영향을 받은, 중국 민족주의 좌파에 속한 양심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손문이 주도한 국공합작을 통해 공산주의자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사귀었던 중국의 민족주의 좌파들 중에는 공산주의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동정자들이 많았습니다.

길림 육문중학교의 교원들 중에는 중국 공산당원들이 있었고, 대표적인 인물이 문학을 가르쳤던 상월 선생입니다. 상월은 관내에서 자행되는 국민당의 탄압을 피하여 동북으로 피신한 공산당원으로서 리광한의 도움으로 길림 육문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됩니다. 상월 선생은 김성주에게 문학서적들과 공산주의 서적들을 빌려주기도 하고 비밀독서회에서 강연을 맡기도 하는 등으로 김성주의 활동을 돕습니다.

길림 육문중학교는 국공합작의 정신이 구현되고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관내에서는 국공합작의 결렬로 인해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탄압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동북지역인 길림의 육문중학교에서는 국민당 좌파 교장이 공산당 교원을 보호해주고, 이들이 힘을 합쳐 식민지 조선에서 온 학생 김성주를 감싸주고 길러낸 것입니다.

길림 육문중학교를 다닐 당시, 김성주는 아버지 김형직 선생의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오동진의 집에서, 그가 체포된 뒤에는 장철호의 집, 현묵관의 집, 리웅의 집 등 정의부 소속의 독립운동가들의 신세를 지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김성주를 길러낸 것이며, 김성주를 통해 조선의 민족주의는 공산주의에로의 방향전환을 완성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는 연속되어 있으며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길림 육문중학교를 다니며 김성주는 자신의 혁명적 세계관을 구축하게 됩니다. 비밀독서회를 조직하고 육문중학교의 도서주임을 맡아 공산주의 서적을 보급하던 김성주는 책방을 드나드는 과정에서 공산주의 이론가 박소심을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자본론을 배우게 됩니다. 김성주는 박소심을 통하여 맑스-레닌주의 고전들을 안내받기도 하지만, 고전들의 한계도 동시에 깨닫게 됩니다.

맑스-레닌주의 고전의 명제들이 조선혁명의 현실과 맞지 않는 경우에 박소심은 당황하였습니다. 박소심은 노동계급의 계급적 해방을 민족적 해방에 앞세우고, 종주국 노동계급의 투쟁을 식민지 나라의 민족해방투쟁보다 중시하는 고전의 명제들과 그에 따른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노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김성주에게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론을 우위에 두고 현실을 보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김성주는 이 점을 안타까워하며 현실의 실정과 그에 합당한 실천을 기준으로 진리를 검증하여야 함을 역설하였습니다. 박소심과의 만남을 통해 김성주는 고전에 얽매이는 교조적 태도를 벗어나서 실정에 맞게 모든 문제를 대하는 창조적 입장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데, 이는 주체사상의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경험이 됩니다.

김성주는 길림에서 3년 남짓한 세월을 보내며 과학적 학설로서의 맑스-레닌주의를 이해하게 되고, 그 학설의 도움으로 조선의 독립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실천적 진리를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길림시절을 통해 혁명적 세계관을 정립하였으며 길림에서의 축적과 체험을 바탕으로 주체사상의 골격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주체사상 창시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인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학습이 실천과 결부하여 불꽃처럼 타오르며 진행된 시기였습니다.

길림시절 김성주는 ‘ㅌ.ㄷ’ 성원들을 핵심으로 하여 조선인길림소년회, 조선인류길학우회, 맑스-레닌주의 독서조 등을 결성하고 혁명역량을 확대해갔습니다. 길림에 새로운 운동선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따라 국내와 일본, 연해주, 만주 각지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길림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김혁, 차광수, 채수항, 안봉 등도 그 시기에 김성주를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김성주는 그들을 ‘ㅌ.ㄷ’에 받아들이는 한편, 조직개편의 필요성을 느끼고 1927년 8월 27일에 ‘ㅌ.ㄷ’를 ‘반제동맹’으로 개편하고, 다음 날인 8월 28일에는 북산공원의 약왕묘 지하실에서 ‘ㅌ.ㄷ’의 정수분자들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공청)을 창립합니다. 모임에는 최창걸, 김원우, 계영춘, 김혁, 차광수, 허률, 박소심, 박근원, 한영애를 비롯한 반제청년동맹 핵심들과 청년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이렇게 결성된 공청은 3년이 지난 1930년에는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를 결성하는 핵심으로 자라납니다. ‘ㅌ.ㄷ’라는 뿌리에서 자라난 ‘공청’이 ‘건설동지사’라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로동당의 조직적 시원입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공청 창립일인 8월 28일을 ‘청년절’로 제정하고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청년절’은 단지 ‘청년들을 위한 날’이라는 의미 외에도, 조선의 청년들이 조선로동당의 모태가 되는 ‘공청’에 대한 자부심을 되새기며 당의 후비대로서 ‘대를 이어’ 공산주의 혁명을 지속할 것을 독려하는 의미 또한 담고 있습니다.

공청은 동맹원들의 사상교양사업에 큰 의의를 부여하고 그들의 정치이론수준과 지도수준을 높이기 위한 학습에 많은 힘을 넣는 한편, 군중계몽과 농촌혁명화 등의 분공을 주어 부단히 대오를 늘여갔습니다. 그리하여 공청은 짧은 기간에 길림시와 그 주변은 물론, 돈화, 흥경, 화전, 무송, 안도, 반석, 장춘, 할빈 등 만주의 넓은 지역과 북부조선 일대를 비롯한 국내 깊이에 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이렇게 확대된 공청의 거점은 3년이 지난 1930년에는 ‘조선혁명군’의 정치군사 활동의 거점이 되며, 그로부터 2년 뒤인 1932년에 결성되는 ‘반일인민유격대’의 활동 거점이 됩니다. 이들 거점들의 공통점은 조선 인민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민족주의 독립군의 거점과 공산주의 항일유격대의 거점이 겹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공청의 분공 중 하나인 ‘농촌혁명화’는 농촌 마을의 조선 인민들을 의식화, 조직화하여 반일 전민항전에 나설 수 있는 주력군으로 키우는 것을 말합니다.

노동자와 더불어 농민과 학생을 조선혁명의 주력군으로 인정하는 것은 김성주의 독창적인 견해였습니다. 김성주는 반일항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전체 조선인민의 단합된 힘이 필요하며, 일제를 반대하는 모든 인민들, 노동자, 농민,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민족자본가와 애국적인 지주, 심지어 종교인들까지 묶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김성주의 이러한 견해가 형성된 시기가 길림시절이었습니다.

공청 결성 이후 진행된 농촌혁명화에서 내도산 마을을 맡아 파견된 리제우는 그 마을의 종교인 천불교를 두고 불평을 토로하지만 김성주는 교주인 장두범과 면담한 뒤 천불교가 일제에게 천벌을 내리고 조선민족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백두산에 비는 종교임을 파악하고서 천불교에 함부로 ‘아편’이라는 감투를 씌울 수 없으며 그 신자들을 애국자들로 인정하고 하나의 역량으로 묶어세울 것을 역설합니다.

애국적인 종교인들과는 얼마든지 혁명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김성주의 독특한 종교관은 아버지 김형직 선생의 경험으로부터 이어진 것입니다. 김형직 선생은 평생을 그리스도인들, 천도교인들 등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들과도 함께 사귀고 사업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편견을 전혀 가지지 않고 오히려 예배당을 거점으로 애국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폭넓은 교제와 실천 속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공산주의에로의 방향전환을 주창한 김형직 선생의 경험을 이어받은 김성주의 공산주의는 책으로만 공산주의를 접하고 고전의 명제들만 줄줄 외워대는 식자층 출신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공산주의였습니다.

김성주가 주창한 공산주의는 한 마디로 맑스-레닌주의를 조선혁명을 중심에 두고 조선의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공산주의, 참다운 애국주의와 참다운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모든 나라와 민족이 주인이 되는 자주의 시대를 열어내려는 공산주의, 그 공산주의를 전체 인민대중의 힘에 의거하여 실현하려는 인민대중 중심의 공산주의였습니다.

김성주는 1929년 가을 비밀독서회가 발각되어 길림감옥에 투옥됩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3년간 길림시절에서 축적하고 체험한 바를 총화하여 조선혁명의 성격과 투쟁의 방침을 확정합니다. 김성주는 다음 해인 1930년 5월 초에 출옥하여 감옥을 나오게 됩니다. 바로 그 달 말인 5월 30일 만주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극좌모험주의 지도부가 주도하는 5.30폭동이 발발합니다. 출옥이 조금만 늦어졌더라도 김성주는 폭동에 극대노한 반동 군벌에 의해 희생당했을 것입니다. 간발의 차이로 김성주를 구원한 사람은 ‘애국적인 종교인’ 손정도 목사였습니다. 김성주는 자신의 종교관이 옳았음을 몸소 증명한 셈입니다.

정대일 박사(그리스도교-주체사상대화연구소 연구실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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