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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와 식물로서의 인간, 그리고 ‘상생적’ 인간성

기사승인 2024.10.16  01: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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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 할 수 있기를

▲ 박연주 교수는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식물로서의 인간을 읽어낸다.

몇 달 전 필자는 에큐메니안 ‘적의 계보학’ 칼럼 시리즈 중 ‘약자의 적대화와 부종부횡의 윤리’라는 글에서 우리 사회 속 적대의식과 폭력의 근본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연의 약육강식 현상을 인간사회에 적용하여 설명(혹은 변명)하는 논리는 우생학적 궤변과도 같은 잘못임을 피력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인간에 대한 세상의 다양한 담론들 속에서 종종 비유로, 또는 해석적 틀로 쓰여 온 적자생존 또는 약육강식의 논리나 포식자로서의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의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동물로 보는 관점, 특히나 근대 이후 서구의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학문연구의 자세와 방법론에 잠식당해 인간을 기계적으로 실험・분석하려는 우리의 사유습관에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동물이며 식물이며

인간은 과연 동물인가? 우주자연의 생명은 크게 식물과 동물로 구분되고 이 두 종류를 놓고 분류한다면 인간은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당초 자연에 식물과 동물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가령, 지구는 식물인가, 동물인가, 빛은? 또 만약 외계의 생명체가 있다면 그들은 식물인가, 동물인가?), 그 두 카테고리의 구분이 모호한 생명체도 있다. 더구나 인간 사유의 역사 2천년이 넘도록 무수의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들은 인간이 동물 그 이상임을 누누이 말해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 그 이상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이 단순히 뇌기능이 우수한 동물에 지나지 않고 식물과 동물을 아우른 자연 전체를 ‘지배’해온 이유는 그 자연을 누구보다 잘—가장 본인에게 유리하게, 효율적으로—이해했기 때문이 아닌가. 예의 동물인 인간이 동물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만하나, 식물 또한 잘 안다는 것은 인간에게 ‘식물’과 같은 속성도 함께 있기 때문은 아닐까. 다시 말해 인간은 식물이기도 하고 동물이기도 하면서, 이 둘을 잇는, 중재하는, 뛰어넘는 존재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동양 역학(易學)에서는 우주자연이 삶을 이어가는 원리를 음양오행적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지면상 압축해서 얘기하자면, 식물은 상생의 원리를 대표하고 동물은 상극의 원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상생과 상극을 함께 하며 ‘중화(中和)’를 이루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존재인 것이다.

생각의 흐름이 여기까지 이르니 부득이하게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식물로서의 인간’이란 대체 어떤 걸 의미하는가. 상극한다는 것이 서로 싸우고 잡아먹는 그런 약육강식적 원리를 나타낸다는 것, 이는 인류가 경쟁과 전쟁, 정복, 폭력의 역사로서 그 사례들을 충실히 채워왔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식물처럼 상생하는 인간이란...? 곧바로 일관성있는 예시들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인간은 그 인간됨의 이중적 성질 중 ‘식물적’ 속성을 오랫동안 잊어버렸거나 혹은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적대와 폭력으로 점철된 인간사의 비극을 극복하고 예방하는 데 꼭 필요한, 회복해야 할 본성이 아닐까.

지난번 칼럼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간 본연의 참된 인간성, 혹은 위에서 언급한 식물도 동물도 ‘뛰어넘는’ 인간의 본질을 불교적인 마음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논의했다면, 이번에는 문학에 기대어 얘기해 보고자 한다.

동물도 식물도 아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작품은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란 소설이다. (이 글을 쓴 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여러 면에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소식이다) 가지각색 다양한 관점의 해석이 가능한 것이 문학이라지만, 필자의 시각에서 볼 때 이 소설은, 불교학자로서 필자가 온갖 이론적・현실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사람들에게 설파하고 싶은, 모두의 구원과 평화를 위한 인간 윤리의 알맹이에 해당하는 그런 메시지를 문학의 위대한 힘으로 탁월하게 구현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엔 인간이 지닌 일체의 ‘동물성’을 부정하고 ‘식물’이 되고 싶은 여자가 있다. 20세기 초의 실험적인 작가들이라면 아마도 ‘어느날 아침 일어났더니 내가 식물이 되어 있었다...’라는 식의, 지금은 흔해 빠진 변신물 장르로 구성했을 법도 하지만, 작가 한강은 훨씬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방식으로 보편적 언어와 시각예술, 행위예술적 장치를 세련되게 엮어 불완전한 인간조건이 빚은 잔혹한 인간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교묘하고 치밀하게 드러낸다.

요컨대, ‘채식주의자’ 주인공이 거부하는 고기는, 그녀의 꿈과 기억 속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된 것처럼 타자를 덮치고 뜯고 살을 발라내고 먹어 치우는 인간의 동물적 속성이자 폭력이다. 그것은 하등 적대할 필요가 없는 사회적 약자, 가령 작중의 어린아이나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이거나 남성우월주의적 폭력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고, 비디오 아티스트인 작중 인물의 예술세계에 대한 스치듯 지나가는—그러나 두어 번 반복되는—언급 속에 스며있듯, 인간의 어처구니없는 무지와 무능, 이기심, 태만이 야기한 폭력(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참사 같은)에 대한 애도이다.

또한 그것은 작가의 작품세계 속 꾸준히 등장하는 선혈이 낭자한, 마치 고깃덩어리나 다름없이 난도질당한 인간 육체의 이미지를 통해 생생히 전달되듯 ‘국가’에 의한 폭력, 대규모 학살에 대한 맹렬한 분노이며, 또 작가가 작품 속 서술을 통해 직접 피력했듯,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모되고 찢긴,’ 그저 지치고 지칠 뿐인 인간의 불안한 고단함을 야기한 거대 구조의 폭력에 대한 준엄한 고발이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우울한 작품 속 분위기를 일신하고 희망적인 메시지가 보일락 말락 내비치는 찬란한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사회의 어떤 관공서가 이 작품을 청소년 성교육상 ‘불온한’ 유해 도서로 지정하는데 주원인으로 작용했을 만한 부분으로서, 예술적으로 식물/꽃을 구현한 주인공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성관계를 맺게 되는 대목이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의 형부인 비디오 아티스트의 작업을 통해 싱그럽게 푸르고 오색찬란한 색깔의 잎사귀와 꽃으로 뒤덮인 주인공의 몸은 더 이상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고깃덩어리’의 몸뚱이가 아니었다.

이 예술가가 과연 ‘식물’이 되고 싶은 처제의 희망과 의도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는 그녀가 지닌 묘한 관능, 마치 ‘태고의 것‘, ‘진화 이전의’ 순수한 무엇(아직도 남아있는 몽고반점으로 상징되는)을 환기시키는 이미지에 압도되어 기를 쓰고 그 이미지를 완성시키려 하고, 거기에 강렬히 매혹되어 억누를 수 없게 된 자신의 성적 욕망을 기어이 실현시키려 한다. 이 과정에서 시사된 그의 예술성의 고양은 그가 자신의 기존 작품들 속 단조로운 색채감을 탈피하여, 황홀하리만큼 다채로운 색감을 구사하는 행위를 통해 묘사된다.

실로 이 대목은 인간이 더 이상 ‘고깃덩어리’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지금까지 시뻘건 색깔만으로 채색되어 온 동물적, 약육강식적, 상극적 폭력의 역사를 거부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절박한 노력과 희망을, 비록 언어를 통한 것이지만 시각적으로 훌륭히 전달하고 있다.

이렇게 이제는 ‘식물’이 된 주인공의 자발적인 욕망으로 이루어진 성관계는, 식물의 생식기라고도 할 꽃들의 결합이 되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손익적 계산도, 지배역학 관계에 대한 의식도 없다. 그것은 주인공을 비롯한 여성 등장인물들이 빈번히 경험했던, 남성의 욕망에 그저 수동적으로 순응하거나 굴복하는 억압적 관계가 아닌, 자연으로서의 인간 본연의 성교와 쾌락인 것이다.

이렇듯 작가는 마치 식물들처럼 다함께 온전히 존재하고 서로 해치거나 착취하지 않는 인간 본연의 상생적 성질,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 안의 ‘식물성’을 오색찬란한 색감과 형상적 아름다움의 묘사를 통해 신비스럽고 황홀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소설 전반에 걸쳐 ‘피’로 상징되는, 때에 따라 폭력을 당하는 입장이기도 하고 폭력의 주체이기도 한 인간의 동물성과 여실히 대조된다. 물론 현실에서는 인간이 실제로 식물처럼 되고 싶다고 물 이외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고 햇빛만 쬐려는 짓을 했다간 주인공처럼 정신병원에 감금되거나 결국은 죽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문학적 장치를 현실의 도덕을 잣대로 논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주인공 본인은 아무리 ‘식물’로서 행위한 것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가족, 무엇보다 자신의 언니에게 엄청난 ‘동물적’ 폭력을 가한 셈이 되었으니 주인공은 끝내 자신의 이상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결과보다는 의도라는 것에 필자는 주목하고 싶다.

물론 ‘동물성’을 폭력으로만 규정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과장이고 오해이며, 무엇보다도 동물들에게 공평하지 못한 처사이다. 실제 자연계의 동물들은 그냥 타고난 대로 잡아먹고 먹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나 (필자가 이해한) 『채식주의자』에서 비판하는 인간의 동물성이란 결국 타고난 본연의 것이 아닌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 자연에 대한 무지와 소위 ‘상극’적 행위에 대한 피상적이고 왜곡된 이해, 말하자면 ‘무명(無明, avidyā)’으로 인한 폭력의 제유(提喩, synecdoche)이다.

상생

거듭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실은, 자연계 동물들의 ‘폭력’과 인간사회 속 폭력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부디 이 사실을 간과하지 말자. 인간이 상생과 상극의 오묘한 조화, 즉 중화를 지향하고 행하는 존재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상생하는 성질도 상극하는 성질도 공존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식물이기도 하고 동물이기도 한 중간자이자 두 원리를 잘 조화시켜 우주자연을 평화롭게 가꿀 임무가 있는 존재이다.

플라톤은 『향연』을 통해 최고의 아름다움과 궁극의 진리를 상징하는 에로스(Eros)의 중간자적—신과 인간 사이의—성격을 강조한다. 이것과 저것을 모두 아우르며 조화시키는 에로스의 이중성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며, 조화의 원리야말로 초월적이고도 영원한 지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플라톤 사상의 세부적 논쟁거리는 모두 제쳐두고라도, 이는 끝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되새겨야 할 내용이다. 우리는 이른바 ‘상극’을 적대와 정복행위로 오해하고, 또한 이를 폭력적 수단으로써만 실천하는 잘못을 저질러왔다. 그리고 우리가 ‘상생’하는 존재라는 진실을 외면해 온 것이다. 늘 조화롭게 실현되어야 할 두 원리 중 하나가 사라져간다. 더 늦기 전에,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시시각각 잊혀져 가는 우리 안의 ‘식물성’을 실천해야 한다.

박연주(동국대학교 다르마칼리지 대우교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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