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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라는 이름의 허상 (1)

기사승인 2024.09.25  05: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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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계보학⑰

▲ 우희종 서울대 명예교수

적(敵)은 누구이며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생각해 본다면, 종종 일컬어지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는 말이 있듯이, 적은 관계성 속에 자리 잡고 규정되는 상대적 개념이다. 적이란 개념이 철저하게 관계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적은 자본주의 욕망과 과학 문명의 이성으로 이뤄진 인간 사회만이 아니라 전 지구적 차원에서도 언급될 필요가 있다.

불교에서 주로 강조되었던 존재의 관계성은 21세기 들어와 급격히 확장되었다. 브루노 라투르의 행위자연결망이론(ANT)이나 도나 해러웨이의 툴루세(Chthulucene) 등 포스트휴먼 시대의 신유물론적 사유 방식이 대표적이다.

한편, 생태계 건강성은 그 안에서 작동하는 무수한 중층 구조의 약육강식에 근간한다. 포식자가 피식자를 잡아먹는 관계성 속에 건강한 생태계가 유지된다면, 피식자가 겪는 폭력이야말로 건강하고 평화로운 생태계를 만들어 주는 근간이다. 관계성 속에 존재하는 개체와 생태계 층위에서의 입장 차는 존재가 갈구하는 평화에 있어서 장애가 된다.

일반적으로 적은 자신의 평화로움을 흔들거나 파괴하는 나와 반대되는 존재나 갈등과 분열 제공자다. 중층 구조로 이루어진 삶의 현장에서는 같은 대상, 같은 상황이라도 어느 층위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적에 대한 입장은 달라진다. 관계 의존성을 전제로 적을 평화를 깨는 악의 소산이요, 폭력의 주체라 생각한다면, ‘평화’와 ‘악’과 ‘폭력’이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적의 정체를 들여다보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I. 먼저 평화(平和)란 무엇인가?

평화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자 합리성의 문제이며, 균형과 조화의 사안이다. 인간은 몸의 감각기관을 통해 형성된 이성, 감성, 그리고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인 초월성 내지 영성을 지닌다, 통합적이고 온전한 한 인간은 해당 세 영역에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혀 있으며, 개체로서, 사회와 생태계 구성원으로서 다양한 층위에서 합리적이자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인간 중심 관점에서는 선악이 혼재하고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겠지만, 세상은 도덕경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이나 천도무친(天道無親)의 표현처럼 선악을 떠나 세상 스스로의 이치에 맞게 돌아가고 전개된다. 세상은 그 자체로 평화이자 합리적이고, 진리다. 탐욕이나 집착도, 아상이나 무명(어리석음)도, 혹은 사랑이나 자비도, 깨달음도, 죽고 사는 것, 즐거움, 이타적 희생, 전쟁 등 모든 것은 인간이 전제된 관계로부터 생겨난 상황이자 결과물이기에, 각각 사안의 성질은 관계성 자체와는 전혀 상관없다. 다시 말하면 선악과 사랑과 증오, 오욕칠정이 있는 이 세상 그 자체가 진리일 뿐이며,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진리는 선악 너머에 있다.

굳이 이것을 언급하는 것은 우리들이 쉽게 평화를 ‘갈등과 분열이 없는; 혹은 ’전쟁이 없는‘ 상태로 규정하고 있기에 그런 평화는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으며, 인간이 기대하는 유토피아에 불과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II. 우리 인간이 상상하며 논하는 평화는 결코 합리적이 아니며 관념적이다.

카인으로 상징되듯이 인류 역사상 살인과 전쟁이 멈춘 적은 없다. 삶의 현장은 관념이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이고 사소한 일상이자 평범함으로 이뤄진다. 평화와 적에 대한 접근이 관념적이자 원리적인 ‘옳은’ 말보다는 현장 고통에 ‘맞는’ 말로 풀어내야 하는 이유다.

삶의 현장에서 정쟁도 없고 다툼과 갈등도 없는 평화는 결코 얻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깨지게 되기에, 우리는 그 원인 제공자로서 악과 함께 이를 실행하는 적을 구체적 실체로서 상정해 희생양으로 소환하게 된다. 개인과 집단의 안정된 상황을 뒤흔드는 상태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정당화하고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대상이 악이고, 그 희생양이 적이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이해관계 속에 개인과 집단의 욕망 확장에 있어서 생겨나는 불안과 두려움이 적을 만든다. 우리는 적이 있어서 평화가 깨진다고 하지만, 그것은 선후가 뒤바뀐 생각이다. 늘 깨질 수밖에 없는 평화에서 필요한 것이 적이고, 안정된 생태계에서 보듯이 그것은 철저히 관계의존적이자 상대적 개념이기에 허상에 불과하다.

이렇게 인간 사회를 관통하는 진정한 적의 계보란 우리의 관념화된 양비나 양시론의 실체적 대상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내면에 있는 셈이다. 일반적으로 평화와 안녕을 깨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다 보니 적은 악의 소산이 되지만, 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우리에게 폭력이 있기에 평화를 갈구하며, 갈구하는 평화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이상이자 염원이다 보니, 그러한 인간의 무산된 기대에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도록 하는 절망과 분노의 분출구가 적을 낳는다. 적을 실체화하면 할수록 우리 스스로도 상대방의 적이 된다. 서로가 지닌 존재의 집착이 적을 만들어 내는 셈이다. 적은 악(惡)이자 폭력(暴力)이란 형태로 작동한다.

▲ 상대를 적으로 대상화 하는 것은 폭력으로 직결된다. ⓒGetty Images

III. 폭력이란 무엇인가?

개인 사이의 물리적 언어적 형태도 L지만, 구조적이자 문화적 폭력도 있다. 모든 각각의 존재를 그물망의 그물눈 (그물코가 아님에 주목)으로 비유하자면, 그물망 속 그물눈이 담고 있는 관계성을 왜곡시키는 것이 폭력이다. 폭력은 관계에 대한 집착, 단절 형태로 나타나며, 그 속성은 서로 다름의 부정이자 ‘닫힘’이다. 생명의 존재는 서로 의존하며,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같이 변화해 가는 삶의 열린 관계로 펼쳐진다(interbecoming). 생명의 가치를 구현한다는 것은 관계의 회복, 즉 비폭력이며, 이는 함축적으로 관계의 ‘열림’이다.

생태계에서 육식동물이라는 포식자는 피식자인 다른 동물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생존이 불가능하고 이는 다양한 생명체가 공존하는 생태계에 치명적 파탄을 가져온다. 사자라는 포식자에 사슴이라는 피식자가 겪는 폭력은 파괴적인 그 외형에도 불구하고 폭력일 수 없다. 그렇다고 인간과 같은 무한한 욕망을 지닌 사자가 있어 그의 과도한 욕망 안에 닫혀서 끝없는 사슴 사냥이 있다면 심각한 폭력이 된다.

이처럼 관계에 깨어있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지나친 욕망’ 속에 너와 나의 관계성에 닫혀 있음으로써 생겨나는 ‘관계의 왜곡’이 폭력의 본질이다. 관계로 이뤄진 그물망에서 닫힘은 자신의 고통과 함께 관계망을 왜곡 변형시켜 소통과 상생의 민주적 사고와 민주사회 실현에 장애가 되어 결국 적이 된다.

폭력을 관계의 왜곡이자 닫힘이라 정의한다면, 서로의 관계성 회복이 비폭력이자, 평화가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적이라는 허상을 무너트릴 수 있다. 비폭력은 단지 총과 칼과 같은 물리적 수단을 멀리하거나 수동적 저항 자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건강한 관계 회복과 노력을 비폭력이라고 정의한 때, 관계 회복이나 평화를 위한 적극적 행동 역시 비폭력 행위가 된다. 이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가 유태인 수백만 학살을 자행하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동참한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IV. 비폭력은 관계의 회복이고, 이를 위한 실천과 행동에 있다.

폭력은 강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폭력 상황에서 아무 행동 없는 약자의 체념이나 무관심은 비폭력이 아니라 폭력에의 가담이다. 이처럼 폭력이나 비폭력 역시 외형만으로 천편일률적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결국 폭력에 대한 정의에 따라 ‘관계성을 왜곡시키는 폭력’과 ‘전체 관계성에 기여하는, 또는 관계성의 흐름에 따른 폭력’의 구분을 나누어 바라볼 수 있다. 이는 비폭력과 평화를 위한 행동에 있어서, 또 적을 규정하는 지점에 있어서 중요하다.

한편, 모든 생명이 결코 얻기 힘든 평화를 그리 염원하는 것은 존재가 지닌 고통에 있다. 생명의 삶은 ‘생로병사’로 이뤄지기에 죽음은 단지 생명체가 겪는 한 과정이며, 생명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생명의 한 부분이다. 그렇기에 생명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체의 안락함을 방해하는 ‘폭력’과 이로 인한 ‘고통(suffering)’이다. 상징적 표현이지만, 세상 절멸과 노아의 방주가 등장한 것도 ‘폭력’의 만연 때문이었다 (Now the earth was corrupt in the sight of God, and the earth was filled with 'violence'. 창세기 6:11). 개인의 고통과 사회의 고통, 그리고 더 나아가 생태계의 고통에 민감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생명 감수성 회복이자 생태계 구성원들 간의 관계 회복이다.

(계속)

우희종(여산생명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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