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흐와 산책하기 (57)
▲ <생레미 정신병원의 정원> (1889. 5, 생레미, 캔버스에 유채, 95×75.5cm, 크롤러-뮐러 박물관, 오테를로) |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다. 누구보다도 빈센트는 불운의 화가다. 그는 자기가 가고 싶었던 길에서 이탈하기를 밥 먹듯 하다가 늦깍이로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물론 화가의 길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림을 독학하여 열심히 그렸으나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정신상태는 불안정하였고 충동적이었으며 감정의 기복이 컸다. 그래서 한없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런 중에도 자기에게 닥친 불운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궁금하다.
모름지기 빈센트는 자기 내면의 한계를 절망의 이유로 삼지 않는 뜨거운 예술혼의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동생 테오의 우애가 보태졌기 때문에 빈센트는 자신에게 품부된 예술혼을 발휘할 수 있었다. 테오의 지지와 사랑과 헌신이 없었다면 위대한 예술가 빈센트 반 고흐도 없었을 것이다. 테오는 형의 유일한 친구이자 지지자였고 빈센트 반 고흐 교회의 단 한 명뿐인 교인으로서 그림에 담아낸 빈센트의 설교를 귀담아들어 주는 첫 번째 성도였다.
그런 테오가 요한나 봉어(1862~1925)와 결혼하였다. 가족들은 그녀를 ‘요’라고 불렀다. 1889년 4월 18일이다. 누구나 자기 삶을 꾸리고 자기 행복을 우선하는 법이다. 나를 위해 너는 무조건 희생하라는 강요는 폭력이다. 테오가 형 빈센트를 좋아하고 지지한다고 해서 자기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암스테르담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파리의 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있던 그녀를 소개받은 후 결혼에 이르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일은 은총이다.
테오와 요가 결혼한 며칠 후 빈센트는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 전 1년여 동안 무서운 창작욕을 발휘하였다. 발작과 회복이 반복되었으나 그의 예술혼은 무뎌지기는커녕 더 높아지고 넓어지고 깊어졌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때 그린 작품으로 <생레미 정신병원의 정원>, <아이리스>, <별이 빛나는 론강의 풍경>, <운동하는 수감자들>, <아몬드나무> 등 명작이 있다.
별은 가장 어두울 때 가장 밝게 빛난다. 언 가지에 생기가 오르고 그 끝에 꽃은 핀다. 어둠의 끝에 태양은 솟구치고 절망의 끝에서 희망은 날아오른다. 끝에 서 본 자만 아는 비밀이고, 끝간 데까지 가본 자만 느끼는 희열이다. 빈센트는 그렇게 끄트머리에서 서성이는 자들을 위로하고 응원한다.
끄트머리에 선 자로서 오늘 끄트머리를 사는 자들을 위로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예수를 닮았다.
최광열(기독교미술연구소 연구원)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