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적이라는 이름의 허상 (2)

기사승인 2024.10.10  02:33:48

공유
default_news_ad1

- 적의 계보학⑱

▲ 우희종 교수는 상대방에게 나도 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V.

‘적의 계보’를 생각하면서 평화를 깨트리는 적과 폭력을 총칭해서 악으로 규정한다면, 인간이나 생태계에 있어서 악은 ‘바람직한 관계가 깨진 상태’다. 이처럼 악도 특별한 것이 아니라 관계성에 근거하며 ‘닫힌 상태’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그 닫힘이란 특정 집단의 정체성이나 특정인의 개체고유성인 것이기에 모든 존재가 존재하기 위한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악으로 작동할 수 있는 닫힘이란 개체의 생존이 전제된 생명 현상의 한 부분이다.

이 점에서 일반적인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위가 폭력이 되어 악이 될 수 있는 속성에 대하여 한나 아렌트는 ‘악(惡)의 평범성’이라 표현했다. 자연 생태계라는 큰 틀에서는 인간이 규정한 선악을 넘어 진행되지만, 선악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악의 평범성’은 동시에 ‘선(善)의 일상성’을 의미한다. 인류 역사에 수많은 살인과 전쟁이 있지만 노예제도나 인종 차별, 성차별 등을 넘어서 이제는 동물권도 언급되는 것처럼, 우리 사회는 과거보다 바람직하게 나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악의 평범성’만이 아닌 또 다른 선한 힘이 우리 사회에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내가 주목하고 있는 ‘선의 일상성’이다. 생로병사나 성주괴공의 흐름과 희로애락 속에 고통을 느끼는 삶을 지탱하는 생명의 힘이자, 삶을 인간답게 하는 동력이 ‘선의 일상성’이다.

한편,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과 함께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한다. 범사는 평범한 일이다. 성경에서는 평범한 일에 감사하면서 동시에 잘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을 버리라 하고, 불경도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선을 받들어 행하라는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을 강조한다. 열린 관계성에 근간해 자연스럽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자타불이(自他不二)와 동체대비(同體大悲)가 결론이다.

‘악의 평범성’과 ‘선의 일상성’에서 범사로 표현되는 평범성과 일상성의 차이를 말한다면, 후자는 전자에 비해서 ‘지금 여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평범하지만 지금 여기의 현장성이 강조된 것이 일상성이다. 우리의 삶은 일상의 매 순간으로 이뤄진다. 지금 여기에서의 선택이 일상을 이룬다. 삶의 현장에서 선한 마음과 선택이 있을 때 우리 삶은 악의 평범함을 넘어 희망과 긍정으로, 더 나아가 이웃 사랑으로 이어진다.

열린 관계의 왜곡이 악이자 ‘악의 평범성’이고, 그것을 회복시키려는 비폭력이 선이자 ‘선의 일상성‘라 한다면, 악의 동력은 어리석음과 오만이고, 선의 동력은 깨어있음과 공감이다. 인류 사회가 노예제도나 인종 차별과 인권 회복 시기를 지나, 이제 사회 소수자는 물론 동물권까지 확장되고 있는 사회 변화에 있어서 가장 큰 동력은 논리나 이성이 아니라 공감이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감의 사회 변화에 있어서 그것을 정책과 제도로 만드는 과정에 이성이 요구될 뿐이다. 타자의 아픔과 고통에 대한 감수성인 ’생명감수성‘이 역사와 문화를 이끌게 할 때, 비록 평화는 단박에 이뤄지지 않을 긴 여정이지만, 서로 함께 손을 잡고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악과 적과 폭력을 분명히 알게 하는 ’선의 일상성‘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종종 그 차이를 혼동하는 ‘진실-평범-세속’과 ‘사실-일반-통속’의 구분이 필요하다. ‘진실’이 시대와 문화를 넘어 변치 않는 것이라면, 특정 집단이나 문화권에서 다수가 믿는 일반적인 내용이 ‘사실’이다. 이웃과 함께 하는 입전수수(入廛垂手) 역시 삶의 현장인 세속과 함께 하는 것이지만, 결코 통속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은 흑백이 아니기에 악과 선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자신을 두고 살아갈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우리 안의 악의 평범성을 부정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충분히 인정하되, 선의 일상성에 주목하는 삶이 될 때 우리 사회도 보다 평화로워진다. ‘악의 평범성’을 넘어설 수 있는 근본 힘은 ‘선의 일상성’에 있다.

VI.

결국 악으로서 폭력을 행사하는 적이란 개체고유성/정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생명체/집단 자체가 지니고 있는 내면/내부의 한 부분이다. 합리성과 선의 일상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평화로움은 각 구성원 간의 ‘균형’과 ‘조화’다.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며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면 서로 열려있어야 한다. 다름의 인정과 이를 위한 소통의 열림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각자가 그대로 온전함을 수용하는 것이기에, 불필요한 갈등과 다툼은 사라지고 그에 따라 적도 소멸한다.

이제 적의 계보에서 남은 것은 악이 우리의 일부분이라는 것과 함께, 제한된 시공간과 자원 속에서 확장성을 지닌 생명체와 집단성 간에 생기는 다툼이나 전쟁이 삶의 현장에서 늘 상존하는 필연적인 모습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부정하거나 없앨 수 있다고 하는 평화 개념은 지극히 관념적이다. 생태계 내 특정 층위에서의 폭력이 건강한 생태계의 기반인 것처럼, 중층 구조의 모든 층위에서 각각의 폭력은 존재하며, 이는 다양한 적이 등장함을 의미한다.

삶의 현장에서는 분노나 폭력을 부정하고 억압하려는 선악의 이분법적 어리석음을 넘어 당당하게 분노해야 한다. 범사에 감사함과 질서 잡힌 평안을 무너뜨리는 대상인 적에 대한 분노는 정당하다. 열린 관계를 왜곡시키는 적들에 대한 분노다. 티벳 불교에서 중생과 함께 하는 보살인 마하칼라(Mahakala) 등은 결코 평화롭고 자비로운 모습만이 아니다. 분노불(angry Buddha)도 있듯이, 삶의 현장에서 감사와 분노는 동전의 양면이다.

▲ 거짓된 정치와 자아가 적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지. ⓒCreate by ChatGPT

VII.

진정한 평화의 층위에서 적이란 허상이다. 빛과 어둠 내지 선악은 서로 질서 잡힌 관계 형태로 의존한다. 세상의 창조를 밝힌 성경의 창세기 1장은 ‘아무 형태도 없이 텅 비어 흑암에 싸인 채’라는 상징적 표현으로 시작된다. 결국 흑암에서 빛이 생겨나 밤낮이라는 ‘질서’가 생기면서 시간이 탄생했고, 이후 질서 잡힌 공간인 세상이 등장하면서 ‘보기 좋았다’고 한다. 종종 선악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한 이들은 어둠을 악, 빛을 선의 상징으로 사용하지만, 본디 우리의 보기 좋은 세상과 빛의 어머니는 ‘형태도 없이 텅 빈 어둠’이다.

형태 없는 텅 빔이란, 불교 용어로는 진공묘유(眞空妙有)다. 구체적 형태나 실체가 없지만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바탕이자(Ground of Being - Paul Tillich), 힘으로서의 깊은 비움과 어둠이다. 빛이 있어 세상은 질서 잡혀 확장되고, 낮과 밤이 생기고 생사도 생긴다. 빛은 질서이자, 조화를 이루기에 보기 아름답다. 질서와 조화는 관계성을 담는다. 그러나 그러한 빛의 어머니는 깊은 어둠(玄)임에 주목해야 한다.

빛이란 언젠가는 소멸하고 암흑으로 돌아간다. 빛과 어둠은, 질서와 자유는, 피조물과 창조주는 서로 둘이 아니다. 빛의 질서에서 보면, 무질서의 혼돈으로 보이기도 하는 대자유로움이 존재의 본모습이자 창조자의 본래 모습이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상대성을 넘어선 어둠이기에 ‘심연’이고, 노자가 말하는 ‘만물 혼연(混然)의 상태’다. 선악과(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를 통해 지혜가 아닌 선악의 지식을 갖게 됨으로써, 젖과 꿀이 흐르고 사슴과 사자가 함께 하는 무질서의 진정한 평화로부터 추방되어 불안과 두려움 속에 떨며 적과 직면해야 하는 인간이 된다.

빛은 어둠을 드러내는 표피임에도, 서구의 이성과 아폴론적 질서로 상징되는 빛의 확장성의 세계는 생태적이자 영적인 어둠의 수동성의 통찰력과 자기의 통합적 표현을 억압한다. 질서가 있으면 질서라는 기준으로 인해 부응하는 자와 못하는 자가 생기고, 후자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로서 차별과 소외를 겪는다. 질서에는 적과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지식이 알려준 선악/남녀/빈부/노소 등 차별을 넘어 각자 지금 이대로 온전하며 존중되어야 하는, 차별 아닌 차이로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생사를 넘어 대자유의 영생을 갖게 한다.

진정한 평화는 빛과 어둠을, 선과 악을 넘어선 무질서한 혼돈의 심연에 있다. 무질서는 자유를, 자유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삶의 주체성과 그에 기반한 상호 존중을 담는다. 옛 선사는 이를 두고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 말했다. 비록 생태계나 사회에서 구성원 간의 차이로 인해 적과 폭력이 등장하지만, 그런 차이 존중이야말로 생명의 다양성이자 건강함의 근간이다. 나 혹은 인간중심의(ego- 혹은 human-centric) 닫힌 세계로부터 관계에 열린 연결망 세계관(network-centric)이 될 때 비록 갈등과 열린 폭력은 상존하겠지만 적은 사라진다. 이것은 세상을 이루고 있는 관계성에 대한 철저한 인정과 함께 열린 자세다. 이를 백장회해 선사는 불매인과(不昧因果)라고 했다.

각 개인에게는 세상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한 다양한 페르소나(persona)가 있듯이, 집단이나 국가 역시 개인의 페르소나에 해당되는 ‘퍼브로나(pubrona; 저자의 조어)’를 선택할 수 있다. 적은 필연적이지만, 적을 맞이하는 나도 상대방의 적이다. 무엇을 위한 적인가에 대한 깨어있음만이 폭력의 층위에 따른 열린 폭력인지 닫힌 폭력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타자의 희생에 기반하는 상의상존의 세상에서 나는 언제까지나 나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나도 타자의 생존에 기여해야 한다. 이를 사회적 층위로 확대해 본다면, 때로 동지로서, 때로 적으로서, 때로 가해자로, 때로 피해자로, 우리는 다양한 관계성의 형태로 상의상존한다. 집단이나 단체의 퍼브로나 역시 하나만을 고집하며 닫혀 있기보다는, 열린 관계성에 근간한 다양한 퍼브로나를 가지고서 다양성에 대한 적극적 수용이 필요하다.

‘지금 여기’에서의 닫힌 관계성에 대한 뜨거운 분노가 열린 관계성으로 접근될 때, 분노의 대상인 적이 허상임을 알게 되고, 동시에 그러한 분노 역시 실체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평화로움 속의 평안이 ‘허상으로서의 적’에 대한 분노와 함께 공존할 수 있다. 평화로움의 소중함은 생명의 아름다움이며, 너와 나, 선과 악, 가해와 피해 등 모두를 품고 어우러져 펼쳐지는 세속에 대한 사랑이고, 이는 인간과 뭇 생명에 대한 예의를 요구한다. 적은 나의 소중한 한 부분이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을 이루는 생로병사를 사랑한다는 말이며, 종종 우리가 악이라 착각하는 병듦과 죽음마저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희종(여산생명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