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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희생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기사승인 2024.10.15  02:5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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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한강, 창비, 2007)가 건넨 말들

▲ 2024년 노벨상을 수장한 한강 작가(사진 오른쪽) 소설 《채식주의자》

한 아이가 풍선을 들고 푸른 들판을 뛰어가고 있다. 풍선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아이가 풍선 줄을 놓쳤다. 풍선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날아간다.

풍선이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는지 예상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한 방향과 속도를 예상한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풍선이 방향과 속도를 알 수 없는 곳으로 가게 되면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은 당황한다.

《채식주의자》(한강, 는 평범한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됐다가 알 수 없는 방향과 속도로 날아가는 풍선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나를 당황시켰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에서 풍겨오는 ‘다르다’라는 느낌은 처음엔 신선함이었다가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내가 배웠던 소설의 정의는 주위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가상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소설을 읽을 때마다 ‘주위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이라는 말의 의미가 크게 확장된 건가 싶었고 이 작품 역시 그러했다. 나는 왜 당혹감을 느꼈고, 작가는 어떤 의도였을까 싶었다.

화자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의 남자다. 어떤 순간이든 안정적인 상황을 원했고, 그의 선택 역시 모험과는 거리가 먼, 결과가 뻔히 예상되는 쪽이었다. 아마도 그는 운전할 때, 네비게이션이 지름길을 알려주더라도 자기가 아는 익숙한 길로 갈 것 같은 사람이었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만나서 결혼하게 된 것도 자기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 그 사람이 들어왔기에 가능했다. 그는 그 범위를 ‘보통’ 혹은 ‘평범함’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가 바랐던 가족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많은 이들이 이런 삶을 꿈꾸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남자의 이야기가 거부감 없이 다가왔다. 그런데 이 남자가 이상함을 느꼈던 그 순간부터 그의 삶은 알 수 없는 방향과 속도로 날아간 풍선을 보는 사람처럼 당혹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 평범한 남자는 왜 당황하게 된 걸까. 그는 ‘평범함’이라는 말 그대로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의 남자였다. 남자의 이런 설정은 누구나 그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동질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그런 그에게 아내의 이상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점점 ‘보통’이나 ‘평범함’과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만약 변화의 폭이 적었다면 남자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크게 바뀌었다. 5년을 함께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도 예상 밖의 모습이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어느 누구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평범함에서 오는 안정을 최우선으로 여겼던 남자에게 아내의 변화는 충격 그 자체였다. 회사의 부부동반 모임과 아내 가족과의 식사는 남자의 ‘보통’ 혹은 ‘평범함’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데 아내는 그 두 자리가 가져온 연쇄적 과정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그즈음 작가는 왜 극단적인 모습으로 아내를 그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채식’이라는 건 기후위기 시대에 중요한 의제고 앞으로 인류가 지향해야할 식문화인데,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품을 읽을수록 극단적으로 보였던 아내의 모습에서 ‘보통’ 혹은 ‘평범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오랜 시간동안 노출된 약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는 여성이라는 위치가 갖는 사회의 차별적 지위로 인한 끊임없는 폭력의 상처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단지 그 상처를 드러내는 방식이 상대와 똑같았을 뿐이었다. 남성이 과도한 권력을 휘두르는 현재 사회에서 가정, 학교, 직장 그 어디에서도 아내는 ‘보통’과 ‘평범함’을 강요받았을 것이다.

누구나 부여받은 인권은 오직 남성에게만 해당되고 ‘대부분 그렇다’ 혹은 ‘누구나 그렇다’라는 식으로 행해지는 폭력을 여성은 홀로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아내의 극단적인 행동이 오히려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던 내(남성)안의 폭력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작품을 읽는 내내 내가 느꼈던 불편함은 바로 내가 누군가에게 행했을지 모를 당연한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알려주는 듯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변화는 ‘꿈’에서부터였다. 꿈을 꾸고 난 후, 아내는 변하기 시작했는데, 과연 꿈이 어떤 영향을 주었던 걸까. 꿈속에서 아내는 폭력적인 사회 안에서 약자로의 모습과 동시에 강자로서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한때는 가해자였다가 시간이 지나면 피해자로 돌변했다.

아마도 아내가 폭력을 당한 피해자였을 때도 큰 상처를 받았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자기의 모습을 보았을 때 역시 극심한 자기혐오를 경험했을 것이다. 이런 감정들이 여러 번 반복되며 아내는 폭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꼈던 것 같다. 결국 아내는 폭력적인 육식 문화를 거부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지키고 또 다른 가해자도 되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했던 ‘악의 평범성’이 우리 안에도 존재함을 느꼈다. 그리고 작가가 왜 화자의 시점을 지극히 평범하고 안정을 꾀하는 남성으로 정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내의 행동을 보고 이상하고 괴이하다고 느끼는 만큼 내가 무의식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가해자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겉보기에 평범하고 보통 가족처럼 보이는 모습 속에서 ‘다름’을 숨기기 위해 혹은 숨기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큰 폭력이 존재하는지 또, 그 폭력을 묵인하도록 만드는 것 역시 얼마나 큰 폭력인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혹자는 야만의 시대가 끝났고 이제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폭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용하며 끈질기고 집요하게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 《채식주의자》는 보이지 않는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자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여전히 우리는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허준혁 목사(한남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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