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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기 위해

기사승인 2024.10.13  02: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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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기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와 위로>

▲ Ferdinand Bol, 「King Cyrus Handing over the Treasure Looted from the Temple of Jerusalem」 (1655-1669) ⓒhttps://www.rijksmuseum.nl/en/collection/SK-A-1579
그 때 나는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였고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다.(에스라 8,21)

성서에서 이스라엘의 포로들이 바빌로니아에서 귀환한 것은 제2의 출애굽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처음 출애굽과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 것이 한번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바빌로니아에서의 귀환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끝까지 디아스포라로 남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출애굽이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면 포로 귀환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반면에 이사야 40-55장에서 보는 것처럼, 귀환에 대한 예언이 대단히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 고지는 그에 비해 매우 적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이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차있다면, 바빌론 귀환은 그에 대한 보도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출애굽과 달리 귀환은 권력의 승인과 지원 아래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력에 대한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위의 본문은 그 태도의 일단을 보여줍니다. 일차 귀환자들이 우여곡절 끝에 성전을 건축하고 수십년이 지난 후에 율법학자로서 아마도 페르시아 제국의 고위직에 있었을 에스라가 왕의 재가와 지원 아래 상당수의 귀환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고 필요한 물자를 공급밭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돌아오는 행렬은 의외로 단촐했습니다. 4개월이 비교적 짧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귀환 도중 예기치 못한 어려움들이 발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므로, 소위 안전대책이란 필수일 것입니다. 실제로 에스라는 적들이 길에 매복해 있다가 그들을 공격한 것에 대해 언급하기도 합니다(에스 8,31).

당연히 그는 이런 경우를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이를 위해 그가 청할 수 있었던 왕의 도움을 처음부터 스스로 배제했고, 그때문에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자초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와 귀환자들은 하나님께 4개월의 여정이 ‘평탄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간구의 의미는 왕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왜 입니까? 그렇게 하면 자신들의 안전을 확고히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에 대한 왕의 신임도 사방에 드러내고 자기를 높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어도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는 믿음이 그런 행동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8,22).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에게 그것은 자신의 믿음을 배반하는 부끄러운 행동이었고, 하나님을 찾고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에 군마는 헛되고, 많은 군대로 구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시편 33,17;  호세  1,7)라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이것은 도중에 적의 출현 같은 위기 없이 안전하고 평안한 길을 간다는 것이 아니라 위기가 여러가지 형태 발생할 수 있어도 그 위기를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권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권력과 거리를 두는 것, 이것이 에스라의 믿음이고, 그 믿음은 여정의 마침으로 응답을 얻었습니다. 권력에의 의지와 의존은 그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믿음에 어긋나는 행위나 의도가 있다면 이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믿음에 이르는 오늘이기를. 권력과 부가 규준이 되어가는 시대 너머에서 이 세상을 향해 오시는 주님에게서 생명에 이르는 삶의 규준을 발견하는 이날이기를.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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