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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낫세는 야훼와 성전을 버렸을까

기사승인 2020.12.23  22: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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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⒂

열왕기 구조 속에서 히스기야(주전 725-696년)

구약학자 ’차일즈(B. S. Childs)‘는 열왕기의 전체적인 구성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통일왕국 이야기(왕상1-11장), 북왕국 이야기(왕상12-왕하17장), 남왕국 이야기(왕하18-25장)입니다. 각 부분의 핵심 주제를 간단하게 살펴보자면, 「열왕기상 1-11장」은 솔로몬과 성전 건축, 「열왕기상 12장–열왕기하 17장」은 북왕국의 우상숭배 문제와 아합의 죄악, 「열왕기하 18-25장」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열왕기」를 구분하면 「열왕기」의 전체 흐름이 성전과 우상숭배의 문제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열왕기 역사가의 관심사 또는 관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역사가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제의를 강조하였고, 나라에 발생한 모든 잘못된 일은 우상숭배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성 속에서 세 번째 단락은 ‘히스기야’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지난 글에도 말씀드렸지만, 「열왕기하 18장」에는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보다 적게 나타납니다. 그의 종교개혁을 더욱 집중해서 적고 있는 것은 「역대기」입니다. 

「열왕기」의 구성 속에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나는 그의 아들 ‘므낫세’의 죄악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드는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므낫세’를 남왕국 역사에서 최악의 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에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잘 해 놓은 것을 다 망쳐놓았다는 인식이 깔려있습니다. 이는 열왕기 역사가의 의도이기도 합니다. 「열왕기하 21장 3절」은 굳이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므낫세’와 ‘히스기야’를 극단적으로 대조시킵니다. 이는 뒤에 나타나는 ‘요시야’와도 마찬가지로 대조를 이룹니다.

지난번에 ‘요시야’ 종교개혁을 이야기할 때, 율법책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를 살펴봤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 알기 (11) 「요시야 종교개혁의 심장, 율법책은 어디에 있었을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율법책의 기원을 추적한 것이기 때문에 ‘요아스’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열왕기」는 이것을 마치 ‘히스기야’ 이후 소실된 신앙을 되찾는 과정으로 읽게 만듭니다.

‘요시야’가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여서 종교개혁을 실행했는데, 그 개혁의 내용은 ‘히스기야’의 개혁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가 바르게 세워놓았던 신앙 전통을 ‘므낫세’가 파괴해버렸고, 그 유실되었던 신앙을 ‘요시야’가 발견하여 다시 세웠다는 구성을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열왕기하 20장 1-11절」에 나타난 ‘히스기야’의 발병과 회복 이야기도 이런 구성을 극대화 시키는 장치로 역할을 합니다. 죽을 상황에 놓인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진실과 진심을 드러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히스기야’를 남왕국으로 바꿔보면 열왕기 역사가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남왕국은 망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므낫세’의 아들 ‘아몬’의 죽음은 마치 다윗 왕조의 대가 끊어지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암-하아레츠’의 역할과 ‘요시야’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행하며 종교개혁을 단행하였기에 남왕국의 생명은 조금 더 연장될 수 있었습니다.

‘히스기야’의 발병과 회복 사건은 마치 ‘히스기야’ 14년에 ‘산헤립’의 침공과 함께 일어난 사건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산헤립’ 침공은 ‘히스기야’ 14년에 일어날 수 없습니다. 물론 발병과 회복 사건이 그때 일어났을 가능성은 있습니다만, 열왕기 역사가가 이 연대를 지목한 이유를 조금은 억지스럽게 생각해보면, ‘므낫세’ 통치 55년과, ‘아몬’ 이후 남왕국이 함락될 때까지 왕들의 통치 기간 55년 6개월을 ‘히스기야’ 재위 기간에 비율을 적당히 맞춰 넣은 연도일 수도 있습니다.

‘산헤립’ 침공 연도에 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한 부분이기에, 이 정도로 간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 뿐이지, 실제로 열왕기 역사가가 비율을 맞춰서 끼워 맞춘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요시야’에 관해 생각할 때, 그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종교를 바르게 세웠는데 왜 남왕국은 멸망해야만 했는가에 대한 대답을 열왕기 역사가는 이미 ‘히스기야’ 이야기에서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 20장 5-6절」은 ‘히스기야’가 ‘나았다’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네 날에 15년을 더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함께 6절은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열왕기하 20장 12-15절」은 바벨론에 의한 침략을 이야기합니다. 즉 「열왕기하 20장」은 앞으로 이어질 남왕국의 운명을 정리해놓고 있습니다. 완전한 구원이 아니라 왕조의 일시적 연장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열왕기」 세 번째 단락의 시작인 ‘히스기야’ 이야기, 「열왕기하 18-20장」의 이야기는 세 번째 단락의 서론이자, 이어지는 이야기의 복선이며, 전체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히스기야’ 이야기는 너무나 완벽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종교개혁 내용이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유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히스기야’ 종교개혁을 허구로 보고,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로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께서는 이것이 역사가의 구성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한 실제 사건이며, 하나님의 구성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이런 구성에 의한 의미전달은 문서 안에서만 효과가 있는 것이지, 실제 역사가 저렇게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역사가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냐에 따라 구성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런 완벽한 역사를 이루셨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반아시리아 정책

그렇다고 「열왕기하 18-20장」에 나타난 ‘히스기야’에 관한 내용이 모두 허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떠한 역사적 사실이 그 안에 담겨 있지만, 열왕기 역사가가 이를 모두 종교적, 신앙적 색채로 덮어버렸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기가 조금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 상당히 길게 ‘히스기야’ 시대의 국제 정세에 관해 다뤘습니다. 학자들은 주변국의 기록에 따라 ‘히스기야’가 반아시리아 연합의 중심에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개인적으로 ‘히스기야’가 주도적인 입장이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히스기야’가 반아시리아 정책을 펼쳤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므낫세’에 관한 글에서 ‘그래비(Lester L. Grabbe)’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는 ‘히스기야’ 시절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유적인 예루살렘 성벽과 상수도 터널을 ‘므낫세’가 만든 것으로 본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유적이 ‘히스기야’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맞다고 봅니다.

이런 견해의 차이는 이 유적이 만들어진 목적에 대한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비’의 경우에는 예루살렘 성벽이나 상수도 터널이 당시 유입된 북왕국 난민이 늘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고 보며, 이는 ‘므낫세’의 안정적 통치에 기인한 결과라고 봅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도 그렇게 말하지만, 저는 성벽이 국가 방위를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고, 상수도 터널이 지하수로의 형태로 만들어진 이유도 아시리아에 발견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아시리아의 침공에 의한 예루살렘 공성전이 벌어졌을 때, 안전한 수원 확보는 필수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또 「열왕기하 19-20장」의 내용 속에서도 ‘히스기야’의 반아시리아 성향을 드러내는 연결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19장 9절」에는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이집트 제25왕조의 왕 ‘타하르가’가 자신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 나오자 ‘히스기야’에게 서신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열왕기하 19장 10-13절」이 그 서신의 내용인데, 이는 군사 협력을 위한 내용이 아닙니다. 일종의 협박 편지였습니다. 

이집트 ‘타하르가’와 전쟁을 벌이기에 앞서 남왕국 ‘히스기야’에게 협박 편지를 보냈다는 점은 사실 이상합니다. 또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상황은 실제 역사적으로도 연대가 맞질 않습니다. 어쩌면 주변국 역사 기록이 침묵하고 있는 시기, 어떤 역사 기록도 찾아볼 수 없는 10여년의 기간 중에 ‘히스기야’와 ‘타하르가’의 동맹이 실제로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열왕기하 19장」은 이집트 제25왕조와 남왕국 사이에 어떤 군사적 동맹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실제 벌어진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열왕기 역사가는 ‘히스기야’를 반아시리아 동맹군의 일원으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열왕기하 20장 12절」에 나오는 ‘브로닥발라단’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벨론의 ‘브로닥발라단’은 엘람을 등에 업고 아시리아에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던 왕입니다. 그는 주전 722년부터 710년까지 약 13년간 바벨론 왕위에 있으면서 아시리아를 괴롭힌 왕입니다.

그런 왕이 ‘히스기야’의 문병을 위해 사절단을 보냅니다. 또 ‘히스기야’는 그 사절단에게 남왕국의 재정, 군사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보여주었다기보다 공유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듯 합니다. ‘히스기야’가 바벨론 ‘브로닥발라단’과 확실한 군사 동맹 조약을 맺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형태로라도 군사 연합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복잡한 설명을 안 해도, ‘히스기야’에 관한 「열왕기」의 설명 중, 「열왕기하 18장 7절」은 ‘히스기야’가 아시리아를 배반하고 섬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산헤립’의 비문에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 산헤립 비문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현재 시카고 대학 오리엔탈 박물관(Oriental Institute Museum, University of Chicago)에서 소장 중인 ‘산헤립’에 관한 비문입니다. 오리엔탈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기 때문인지, Oriental Institute Prism이라고 불립니다. 이 내용은 ANET 287-288페이지와 ‘밀러/헤이스’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 450-450페이지에 나옵니다.

이 비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타납니다.

“유대인 히스기야는 나의 멍에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강한 성읍들, 요새화된 성채들 46곳과 그 근방의 무수한 작은 촌락들을 포위공격하였는데 … (중략) … 나는 그를 그의 왕도인 예루살렘에 새장에 갇힌 새처럼 죄수로 만들어 놓았다.”

‘산헤립’의 비문은 ‘히스기야’가 아시리아에 대항해 강한 성채를 구축하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또 그 성들이 모두 함락되었고 남왕국은 예루살렘만 남게 된 상황까지도 전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는 ‘히스기야’의 반아시리아 정책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히스기야’의 중앙집권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남왕국 내에는 친아시리아 세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은 이후 ‘므낫세’가 곧바로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세력이 ‘히스기야’ 시대부터 잠재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런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아시리아에 지속적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는 분명 강력한 왕권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히스기야’는 모든 권력을 예루살렘에 집중되도록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중앙집권화에 부수적으로 이루어졌던 일이 종교개혁이라고 봅니다. ‘히스기야’가 지방에 있는 산당을 모두 제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권력은 모두 빼앗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그의 주요 국책 사업이 아니라 중앙집권화의 부차적 결과물이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국가의 독립을 중요시 여겼기에 아시리아에 대항하며 29년을 통치했던 ‘히스기야’는 결국 국가가 초토화되는 상황을 만듭니다. 반면 아시리아에 완전히 복종하여 55년을 통치했던 ‘므낫세’는 ‘히스기야’ 시절 파괴된 지방 성읍을 재건했고 망가진 남왕국을 정상화시켰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므낫세’의 안정적 통치에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이상적으로는 ‘히스기야’의 국가 독립 추구가 옳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열왕기 역사가의 주장

하지만 열왕기 역사가의 입장은 단호해 보입니다. 「열왕기하 18장 7절」은 남왕국 왕 중 다윗과 솔로몬에게서나 볼 수 있었던 극찬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이런 극찬 뒤에는 형통했던 ‘히스기야’의 삶이 나타납니다. 제일 먼저 이어지는 말이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다’입니다.

열왕기 역사가는 누가 보더라도 반아시리아 정책을 지지합니다. 물론 이들은 아시리아의 멸망을 보았기 때문에 ‘아시리아도 결국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래서 아시리아에 강하게 반대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벨론이 득세하던 시절에 기록되었을 이들의 역사서가 아시리아 뿐만 아니라 반바벨론 성향을 보인다는 점은 이들이 어느 나라에 복속된 상태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열왕기하 24장」 이후에 나타난 바벨론의 이미지는 파괴자입니다. 결코 좋은 이미지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또 바벨론에 동조하기를 요구했던 ‘그달리야’가 왕족 이스마엘의 손에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를 남김으로써 바벨론에 동조하면 안 된다는 점을 피력합니다(왕하25:22-26).

반면에 이집트는 조금 다릅니다. ‘솔로몬’은 여러 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왕상11:1), 그중에서도 이집트 공주와의 결혼은 특별히 강조되어서 나타납니다(왕상3:1; 9:16). 이집트 탈출에 관한 출애굽 전통만 뺀다면, 「열왕기」에 이집트가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르호보암’의 경우 이집트 왕 ‘시삭’에 의해 공격당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르호보암의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들어 쓰셨다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왕상14:22-26).

‘히스기야’에 관한 내용 속에서도 이집트와 연결된 부분은 ‘타하르가’에 관한 언급도 있지만, ‘랍사게’가 남왕국을 조롱하는 내용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랍사게’는 남왕국이 이집트에 의지하고 있음을 비난하는데(왕하18:21,24), 「열왕기하 19장 21-34절」에 나타난 ‘이사야’의 예언은 ‘랍사게’의 말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분명 「이사야」에는 이집트를 의지하지 말라는 예언의 말씀도 있습니다(사30:1-7). 하지만 열왕기 역사가는 그 예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예언 중에서 아시리아를 비판하는 내용만을 역사서에 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열왕기를 기록한 역사가 집단은 ‘히스기야’ 당시 반아시리아, 친이집트 정책을 펼쳤던 집단의 후손이거나 추종 세력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분명 「열왕기하 25장」 마지막에 ‘그달리야’가 죽은 이후 이집트로 도망간 세력과도 연결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달리야’를 죽였던 ‘이스마엘’은 암몬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는 조금 다른 세력으로 보이며(렘41:10,15), ‘예레미야’나 서기관 ‘사반’의 후손들과도 다른 세력으로 보입니다.

또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들이 제사장인지, 성전과 관련된 귀족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예루살렘 성전의 권한이 강화될수록 이익을 얻는 집단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일전에 율법책 발견에 관한 글에서도 썼지만, 몇 백년간 본적도 없는 율법책이 ‘모세의 율법’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번도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제의가 실행된 적도, 올바른 길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는 남왕국에서 성전 중심 제의야말로 하나님의 참뜻임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열왕기 역사가는 이를 확신합니다. ‘히스기야’나 ‘요시야’로 인해 발생한 성전 중심 제의가 옳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미 ‘므낫세’의 안정적 통치를 보았기 때문에 이들이 이런 확신을 갖게 된 근거가 국가의 안정적 발전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확실하게 성전 중심 제의를 이룬 ‘요시야’는 이집트 왕 ‘느고’의 손에 죽어버렸습니다. 왕의 평안한 일생도 열왕기 역사가가 성전 중심 제의를 옳다고 여기는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국민 모두의 평안과 국가의 발전, 왕의 평안함이 확신의 근거가 아니라면, 이들에게 성전 중앙화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확신을 줄 수 있었던 근거는 자신들 집단의 이익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반대로, ‘히스기야’의 반아시리아 정책으로 인해 지방 도시가 전부 파괴되었음에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은 집단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열왕기 역사가 집단을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권력 집단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바벨론 포로기를 겪은 종교 집단이 후대에 이런 평가를 내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열왕기하 21장 3절」에 나타난 ‘므낫세’의 산당 복구 정책을 비판할만한 근거가 부족합니다. ‘므낫세’의 정책은 무너진 남왕국을 다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성향적으로는 친이집트, 반아시리아, 반바벨론 정책에 동조합니다. 권력이나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의가 집중되길 바라는 집단입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를 경험한 집단입니다. 이 집단, 소위 신명기 역사가 집단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예언자 ‘에스겔’의 집단과 비슷해 보이지만, 신앙적 추구점이 조금은 달라 보입니다. 아마 포로기 이전까지 하나의 집단이었다가 포로기 이후 신앙적 견해의 차이로 갈라졌을 가능성도 있고, ‘에스겔’이 제사장 집안이었다는 점으로 보았을 때,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제사장 집단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열왕기하 18-20장」은 ‘차일즈’가 구분한 「열왕기」 구성의 세 번째 단락의 첫 이야기로써 전체를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문학적으로 완성도 높게 각색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내용이 전부 허구는 아니라고 봅니다. 작은 역사적 사실 위에 신앙적 방향성이 덧입혀진 결과물이라고 봅니다.

‘히스기야’는 동시대를 살았던 이집트 왕 ‘타하르가’나 바벨론 왕 ‘브로닥발라단’과 마찬가지로 반아시리아 정책을 끈질기게 추구했던 왕이고, 결국 남왕국이 폐허가 되도록 만들었지만, 열왕기 역사가에 의해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게 된 왕입니다.

더 후대의 역사가인 역대기 역사가 집단은 ‘히스기야’ 이야기에서 이집트와 관련된 내용은 모두 삭제합니다. 또 「역대기」 구성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발병과 회복 이야기도 한 구절로 요약해버립니다(대하32:24). 오히려 그 뒤에 ‘히스기야’의 교만과 회개라는 이야기를 넣음으로 아무리 위대한 왕이라도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다시 회개한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대하32:25-26).

이 두 집단이 역사와 신앙을 기록하는데 차이를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포로 해방을 경험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열왕기」는 포로기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회개’를 중심에 두고 있고, 「역대기」는 포로 해방 이후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재건’에 중심을 둔다고 말합니다.

저는 「열왕기」 역사에는 여기에 한 가지 중점이 더 들어있다고 봅니다. 「열왕기」는 바벨론 포로기가 끝난 이후, 누가 권력을 잡아야만 하는가를 독자들에게 호소합니다. 지금의 바벨론 포로기는 지방 산당을 비롯한 우상숭배가 원인이었기 때문에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레위인에게 권력이 돌아가서는 안 되고, 성전 중심의 집단에게 권력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앞으로도 「열왕기」를 살펴보는 가운데 이런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열왕기」가 이런 집단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고 해서, 이를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들이 어떤 신앙을 추구했고, 그런 추구점들로 인해 어떤 갈등을 만들어왔으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북왕국의 왕들도 등장하기 때문에 남왕국과 북왕국을 넘나들면서 글을 적게 될텐데, 동시대에 왕위에 있었던 왕들의 경우, 더 나중에 죽은 왕부터 다루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살펴보게 될 왕은 북왕국의 ‘호세아’입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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