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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여 예언자 훌다, 요시야 종교개혁의 중심

기사승인 2020.11.19  00: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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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⑽

여예언자 훌다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해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관련된 마지막 인물 여예언자 ‘훌다’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훌다’는 오직 「열왕기하 22장」과 그 평행 본문인 「역대하 34장」에만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왕정 시기를 다루고 있는 두 역사서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성 예언자이면서, 너무도 빈약한 정보만을 제공하는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그녀를 요시야 종교개혁 이야기에 등장한 엑스트라로 치부하기에는, 종교개혁 이야기 속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과거 ‘훌다’에 관한 연구는 여성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과거 랍비들의 연구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요시야’의 명령으로 율법책을 확인하러 갔던 이들이 일부러 여성 예언자를 택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무시무시한 심판만을 선포했던 남성 예언자에 비해 조금은 관대한 예언을 선포하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 「열왕기하 22장 16-20절」에 나타난 ‘훌다’의 예언은 ‘요시야’가 심판을 보지 않으리라는 조금은 관대한 예언이었습니다.

‘훌다’의 ‘여성성’에 초점을 맞춘 과거의 해석들은 「열왕기하 22장」의 서사 속에서 ‘훌다’ 예언의 비중을 가볍게 만들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남성 예언자들이 꼭 두려운 심판 선언만을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남성 예언자들도 때로는 구원과 희망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훌다’가 성전관리인 ‘살룸’의 아내였기 때문에 왕에게 유리한 예언, 왕에게 거슬리지 않는 예언을 하리라는 기대감에 그녀를 찾았다고 말한 학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요시야’ 시대부터 활동했던 유명한 예언자 ‘예레미야’는 왕실과 개인적인 연결점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서기관 ‘사반’의 집안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이런 ‘예레미야’를 놔두고 굳이 성전관리의 아내를 찾아갈 이유는 없습니다.

최근에는 여성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훌다’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여성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녀의 역할이 종교개혁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초점을 맞춘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훌다’에 관한 지금까지 연구 동향과 열왕기와 역대기에 나타난 ‘훌다’ 서사의 차이와 특징을 비교한 논문으로, 2017년 「구약논단」 23(3)에 게재된 엄태향의 “역대기에서 훌다의 예언”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훌다의 거주지 – 예루살렘 둘째 구역

‘훌다’가 어떤 인물인지 알기 위해서 「열왕기하 22장 14절」에 나타난 그녀의 개인정보부터 따져보아야 합니다. 먼저 볼 부분은 그녀가 사는 장소입니다. 그녀는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어 ‘미쉬네(משׁנה)’는 말 그대로 ‘두 번째’라는 뜻입니다. 이 지역명은 「스바냐 1장 10절」에도 등장합니다. 최근 신학 연구와 고고학 연구에 따라 이 지역이 ‘히스기야’ 시절에 건축된 구획임이 밝혀졌습니다.

▲ 예루살렘 둘째 구역 추정지

위의 그림은 앵커 바이블 주석(The Anchor Yale Bible) 11권인 Mordechai Cogan과 Hayim Tadmor의 『Ⅱ Kings』 252페이지의 그림을 한글로 번역한 것입니다.

위의 그림 우측에 다윗 성 옆으로 ‘히스기야 수로(Hezekiah Tunnel)’이 있는데, 이는 ‘지하수로(地下水路)’입니다. ‘실로암 터널(Siloam Tunnel)’로도 불리며 현재는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아시리아의 침공이 계속되던 시절에 아시리아 군대에 의해 수원지가 발견되지 못하도록 지하수로를 만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열왕기하 20장 20절」에도 나타납니다.

북왕국이 멸망했고 남왕국 역시 아시리아에 의해 침공을 당하던 ‘히스기야’ 시절에 예루살렘의 한 구획이 건축되었다는 점은 이 지역이 단순한 신도시는 아니었음을 알게 합니다. 최근의 연구는 대부분 이 지역이 북왕국 난민들을 위한 구획이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둘째 구역’에 오직 북왕국 사람들만의 구획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열왕기하 18-20장」을 살펴보면 아시리아에 의한 파괴 활동은 이미 예루살렘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고고학적으로도 당시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되었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주변부, 아시리아의 침공 경로를 따라 남왕국의 난민도 발생했을 것입니다.

‘둘째 구역’이 북왕국 난민 지역인지, 남왕국과 북왕국 전체의 난민을 수용하기 위한 구획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만, 이곳이 아시리아에 의한 침공이 있던 시절에 예루살렘으로 유입된 난민을 위해 건축되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 이곳은 예루살렘의 한 구획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관리하고 책임질 관료들도 그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조금 조심스러운 추정이기는 합니다만, ‘둘째 구역’이 북왕국 출신 난민들의 거주지였다면 여예언자 ‘훌다’도 북왕국 출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추정이 조심스러운 이유는 앞서 언급한 사실들도 있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를 완전히 동의하는 사람,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사람,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열어둔 사람, 동의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뉘기 때문입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관한 논문이나 「열왕기하」 주석들을 다양하게 살펴보면, ‘훌다’를 당연한 듯이 ‘북왕국 출신 예언자’라고 써 놓은 글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글들은 ‘둘째 구역’을 ‘신도시’ 혹은 ‘난민 지구’라고 적으며, 이곳이 북왕국 난민 거주지가 아닐 가능성도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이런 글들에서는 ‘훌다’를 북왕국 출신 예언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상 가능하시겠지만, 이를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은 대부분 ‘훌다’의 예언 내용에만 집중합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는 ‘훌다’에 관해 조금 더 살펴본 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훌다의 남편 –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

‘훌다’에 관한 두 번째 정보는 그녀가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였다는 사실입니다. 「열왕기하 10장 22절」을 보면 ‘예후’가 반란을 일으키던 때, 바알 사제들을 죽이기 위해 바알 신당에 들어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당에 들어간 ‘예후’는 ‘예복 맡은 자’에게 바알 사제들의 예복을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이와 연결해서 보았을 때, ‘살룸’은 신전에서 예복을 담당하는 사제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10장 22절」의 ‘예복 맡은 자’는 히브리어 ‘아세르 알-하멜타하(אשׁר על־המלתחה)’, 직역하면 ‘옷장 앞에 있는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고, 「열왕기하 22장 14절」의 ‘예복을 주관하는’은 히브리어 ‘소메르 하브버가딤(שׂמר הבּגדים)’, ‘예복 담당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알 사제와 성전 사제를 구분하기 위한 표현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오히려 「열왕기하 10장 22절」을 근거로 ‘살룸’이 성전 사제라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음을 드러냅니다. ‘살룸’은 왕궁의 예복 담당관, 왕의 예복을 담당하는 고관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예레미야 35장 4절」에 나타난 ‘문을 지키는 살룸’과 연결하여 해석하기도 합니다. ‘훌다’의 남편 ‘살룸’과 「예레미야」에 나타난 ‘살룸’이 동일인물이며 이 사람은 ‘요시야’ 시절의 고관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는 약간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유대인 문서인 「미쉬나」에는 ‘훌다문(Huldah Gates)’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위의 그림에서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왕궁에서 오벨로 연결되는 문입니다. 「열왕기하」는 우리에게 이런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 않지만, 「예레미야」에 나타난 왕궁 문지기 ‘살룸’과 「미쉬나」에 나타난 왕궁과 바깥 구획을 연결하는 ‘훌다문’의 존재는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 듯 합니다.

▲ 훌다문 ⓒWikipedia

‘훌다’의 남편 ‘살룸’이 성전에서 일하는 사제였는지, 궁전에서 일하는 고위 관리였는지, 또는 문지기였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둘 중에 하나의 직책을 맡고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이는 여예언자 ‘훌다’가 남편을 통해 궁전이나 성전과 연결된 인물임을 나타냅니다.

앞서 제시한 엄태향의 논문은 북왕국 출신 여성 예언자가 궁전 관리와 결혼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암-하아레츠’에 관해 살펴보면서 ‘요시야’의 아내 ‘스비다’가 북왕국 출신임을 확인했습니다(“이스라엘 역사 알기(7)-후기 이스라엘 남북 왕국의 왕들과 그 땅의 사람들” 참고). 북왕국 난민 출신이 궁전 인사와 결혼했다는 점은 크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성 ‘예언자’가 궁전 인사와 결혼했다는 점은 조금 이상해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훌다’에 관한 「열왕기하 22장」의 정보가 ‘훌다’ 개인에 관한 ‘사실 정보’를 전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열왕기하」가 전하고 있는 정보는 ‘훌다’라는 사람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어떤 ‘이미지’입니다.

그녀는 궁전 혹은 성전과 연결점이 있는 사람이었고, 북왕국 혹은 남왕국 난민 거주지역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예언자라는 점은 종교개혁 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지만, 여성 예언자라는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이사야 8장 3절」에 나타난 이사야의 ‘아내’와 유사한 의미로 보입니다.

참고로 살펴보면, 개역 성경 「이사야 8장 3절」에 ‘내 아내’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 ‘네비아(נביאה)’로 ‘여성 예언자’를 뜻합니다. 개역 성경은 ‘선지자의 아내’라는 각주를 달아놓았는데, 성경 어디에서도 ‘네비아’가 ‘예언자의 아내’로 번역되지 않고, 어떤 성경도 이를 ‘아내’로 번역하지 않습니다.

일본 신개역 성경의 번역을 보면, “そののち、私は女預言者に近づいた。彼女はみごもった。”로 번역해놓았는데, 이를 우리말로 바꾸면, “그후, 나는 여성 예언자에게 접근했다(사귀었다). 그녀는 임신했다.”입니다. 왠지 이사야가 여성 예언자를 유혹해서 임신시킨 한량처럼 느껴지는 번역입니다만, 히브리어 성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번역이기는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그녀를 ‘the prophetess’로 번역하지만, 많은 학자는 이사야의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를 낳은 사람이 당연히 이사야의 ‘아내’라고 생각하며 해석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역시도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성 예언자와 여성 예언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상징이고, 그 상징은 하나님의 심판 선언인, ‘노략이 속히 임하리라’는 선포였기 때문입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동참했던 여예언자 ‘훌다’는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북왕국 출신자들까지 포함한 난민 출신의 상징이며, 제사장 집단이 아닌 예언자 집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제사장, 서기관, 난민 예언자 - 왜 이들이 모였는가?

‘요시야’ 종교개혁은 「열왕기하 22장 3절」에 따르면 ‘요시야’ 18년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이전에 추정한 연대에 따르면 ‘요시야’는 주전 610년에 죽습니다. 「열왕기하 22장 1절」에 나타난 ‘요시야’의 통치기간 31년을 역산해본다면, ‘요시야’ 18년은 주전 623년입니다.

다음에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겠지만, 우선 간단히 당시 국제정세를 살펴본다면, 아시리아의 ‘앗수르바니팔(Ashur-bani-apli)’이 죽은 주전 627년 이후 아시리아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앗수르바니팔’이 왕위를 물려주고자 주전 630년부터 공동통치를 했던 ‘앗수르-에틸-일라니(Ashur-etil-ilani)’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연스럽게 왕위에 올랐어야 했지만, 그의 동생 ‘신-샤르-이쉬쿤(Sin-Shar-ishkun)’이 왕으로 추대되면서 앗시리아는 4년에 걸친 내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주전 627년 바벨론에는 아시리아 군 사령관인 ‘신-슘-리쉬르(Sin-shum-lishir)’가 왕으로 옹립되었으나, 독립운동을 펼친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 1년 정도만 바벨론을 통치하다가 죽게 됩니다. 당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바벨론의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은 주전 626년 자신을 바벨론의 왕으로 칭하며 ‘앗수르-에틸-일라니’와 내전을 펼치고 있던 ‘신-샤르-이쉬쿤’과 동맹을 맺습니다.

주전 623년 ‘신-샤르-이쉬쿤’의 승리로 아시리아 내전은 끝나고 그가 아시리아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다만 그와 ‘나보폴라살’의 동맹은 이미 깨졌고, 이제는 아시리아와 바벨론의 패권 다툼이 시작됩니다.

아시리아의 내전, 신흥 바벨론의 발흥과 다툼은 이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틈을 타 이집트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나갔고, ‘요시야’ 시대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대부분이 이집트의 영향 아래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렘2:36).

이러한 시기에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열왕기하 23장」에 나타난 개혁의 내용은 분명 종교적인 요소에 치우쳐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방 산당의 제거와 그곳에서 일하던 제사장의 업무를 폐지한 조항은(왕하23:8-9) 종교의 중앙집중화와 더불어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나타냅니다.

또 성전이나 지방에서 우상을 숭배한 사실은 단순히 하나님을 떠난 악으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시리아가 자신의 속국인 국가에 자신들의 신앙을 강요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속국인 나라가 자신의 종주국인 아시리아에 확실히 의지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아시리아의 신을 섬겼을 수는 있습니다. 또 고대 사회에서 전쟁의 승리는 ‘신의 승리’였기 때문에 전쟁에 패배한 신인 ‘야훼’보다는 아시리아의 신을 섬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를 함께 담고 있는 이방 신상을 제거했다는 점은 남왕국이 외세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하겠다는 의지표명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요시야’는 이 개혁을 일으키기 위해 성전 제사장 집단을 자신의 편에 끌어들입니다. 개혁 이후 중앙 성전으로 권력이 집중된 것이 성전 제사장 집단의 영향 때문인지, 오히려 ‘요시야’가 이를 제안했기에 성전 제사장 집단이 그의 개혁에 동참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요시야’는 성전 제사장 집단과 함께 모든 종교 기능을 중앙 성전에 한정시킵니다.

서기관 집단은 왕궁 관료 중 한 집단에 불과합니다. 관료를 넘어 귀족 집단으로 보자면 더 일부일 뿐입니다. 이들은 고려 말기에 등장한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가 ‘이성계’를 지지하며 조선 건국에 기여했던 것처럼 ‘요시야’의 개혁을 지지하며 그의 편에 섭니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서기관이 외교도 담당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서기관이 개혁에 참여했다는 점은 이 개혁이 단순한 종교개혁이 아니라 외세와 관련이 있는 국가적 개혁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난민 집단의 대표이자 왕의 견제 세력인 예언자 집단의 대표인 ‘훌다’는 이 개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제공합니다. 난민은 아시리아에 의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입니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폭력적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제공합니다. 또 이 개혁은 성전 제사장의 권력을 증가시키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하기 때문에 왕권과 중앙 권력의 비판 세력이 예언자 집단의 공인도 필요합니다. 이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인물이 여예언자 ‘훌다’입니다.

지난 글에서 ‘요시야’ 종교개혁 이후 서기관은 법에 관련된 업무까지 담당하게 되었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이 개혁에 동참한 집단, 세력이 남왕국의 법을 조율하고 담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전 제사장 집단까지도 법 개정 과정에 동참했기 때문에, 이 법은 단순한 국가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율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율법은 예언자로부터 공인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포로 귀환 이후에는 제사장과 서기관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제사장이자 서기관이며 율법학자인 ‘에스라’라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자 목회자로 이런 이야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집단이 국가 독립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국가법을 넘어선 ‘율법’을 형성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요시야’에 관한 내용을 더 길게 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형성했다는 ‘율법’이 무엇인지,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이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에 관한 연구는 아직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연구이기도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율법책’이 무엇인지, 어떤 내용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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