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역사 알기 ⒃
북왕국 왕 호세아 연대(주전 732-720년)
이번 주는 먼저 북왕국의 왕 ‘호세아’에 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지난 이스라엘 역사 알기(14) 「유다 왕 ‘히스기야’를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에서 북왕국 멸망에 관한 내용을 다뤘습니다. 이때 제가 제시했던 연대는 아시리아 왕 ‘살만에셀 Ⅴ세’의 침공이 주전 722년에 있었고, ‘살만에셀 Ⅴ세’가 침공 직후 죽고 난 후 3년 뒤인 주전 720년에 ‘사르곤 Ⅱ세’에 의해 북왕국의 수도 사마리아가 멸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남왕국의 왕 ‘히스기야’의 연대와 비교했을 때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몇 가지 사항과는 충돌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가장 큰 충돌은 북왕국의 왕 ‘호세아’의 즉위년도입니다. 이는 학자들이 북왕국의 멸망을 ‘사르곤 Ⅱ세’가 아니라 ‘살만에셀 Ⅴ세’ 때로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 Ⅲ세’의 비문에는 자신이 북왕국의 왕 ‘베가’를 죽이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웠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ANET, 28; ‘그래비’ 『고대 이스라엘 역사』, 230 참고).
▲ 요약 비문 ⓒCenter for Online Judaic Studies, http://cojs.org |
위의 사진은 님루드(Nimrud)에서 발견된 ‘디글랏빌레셀 Ⅲ세’의 연대기인데, 일반적인 연대기와 다르게 시간에 따르지 않고 지역에 따라 왕의 일대를 기록해놓았습니다. 또 상당히 간략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요약 비문(Summary Inscrip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 비문은 ‘요약 비문 4’입니다.
이 비문은 1853년경 고고학자인 오스텐 레이어드(Austen Henry Layard)에 의해서 조각이 발견되었고, 옮겨졌습니다. 그는 비문의 내용을 옮겨 적은 후, 조각을 본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재는 유실되어서 없고, 위의 사진과 같이 당시에 옮겨 적은 내용만이 남아있습니다.
이 비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번역은 ‘그래비’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230쪽을 따릅니다.
“나는 비트-훔리아(Bit-Humria, 이스라엘)와 그들의 보충군대, 모든 백성들을 아시리아로 이주시켰다. 나는 그들의 왕 베가(Peqah)를 죽였고, 호세아(Hoshea)를 그들의 왕으로 세웠다. 나는 금 10달란트, 은 x달란트, 그들의 소유물을 받아 아시리아로 가져갔다.”
비문의 내용에서 ‘호세아’를 왕으로 세웠다고 말하는 시기는 ‘디글랏빌레셀 Ⅲ세’가 다메섹을 포위 공격했던 주전 732년경입니다. 사실 이 비문 내용은 「열왕기하 15장 30절」의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라는 구절과도 충돌하고 있지만, ‘베가’를 실제로 누가 죽였는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중요한 점은 ‘호세아’가 아시리아의 왕 ‘디글랏빌레셀 Ⅲ세’를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연대에 관한 이야기만 해보려고 합니다. 북왕국 ‘호세아’의 즉위년도가 주전 732년이라면, 「열왕기하 17장 1절」에 그가 북왕국을 9년간 다스렸다는 기록에 따라 북왕국의 멸망은 주전 724년이 됩니다. 「열왕기하 18장 9-10절」의 기록에 따라 ‘살만에셀 Ⅴ세’가 사마리아를 점령했다고 본다면 이 시기가 맞습니다.
하지만 이는 같은 구절 안에서 ‘히스기야’ 6년이라는 시기와 충돌하게 됩니다. 제가 정리한 내용에 따르면 ‘히스기야’는 주전 725년에 왕위에 오르기 때문에 주전 724년은 ‘히스기야’ 2년이 됩니다.
이에 대해 다양한 해석과 선택을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열왕기」가 남왕국 역사가들의 기록이기 때문에 남왕국 연대를 중심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북왕국에 관한 내용, 어떤 왕이 몇 년에 왕위에 올랐고, 몇 년을 다스렸다는 내용에는 오차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정리해본다면, 북왕국 ‘호세아’는 주전 732년 아시리아 ‘디글랏빌레셀 Ⅲ세’의 북왕국 침공 이후 왕위에 오릅니다. 「열왕기하 17장 3절」의 기록에 따라, 그는 ‘살만에셀 Ⅴ세’ 통치 초기까지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며 속국 체제를 유지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시리아를 배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호세아’가 왕위에 오른 11년에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3년 뒤인 주전 720년, ‘호세아’ 13년에 북왕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북왕국 ‘호세아’와 관련된 외부 세력에 대해서 한 가지만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열왕기하 17장 4절」을 보면 ‘호세아’가 이집트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이때 이집트 왕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제 생각에는 「열왕기하 19장 9절」에서 쿠쉬 왕조는 ‘구스 왕’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쿠쉬, 왕조가 세운 이집트 25왕조의 왕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 이집트 지도 ⓒ위키피디아 |
북왕국 ‘호세아’와 남왕국 ‘히스기야’ 통치 시절 이집트는 상당히 혼란한 상태였습니다. 이집트 역사에서는 제3 중간기로 부르는데, 주전 945년경부터 이집트를 다스려오던 제22왕조에서 제23왕조가 분리되어 나옵니다. 제23왕조는 주전 818년경 테베를 중심으로 한 상이집트를 차지하고 약 100년간 왕조를 유지합니다.
리비아 혈통을 이은 제22왕조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맴피스를 중심으로 왕조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주전 727년경 맴피스 북서쪽 도시 사이스에서 제24왕조가 독립합니다. 이보다 앞선 주전 747년경에는 남쪽의 쿠쉬 왕조가 상이집트를 다스리던 제23왕조를 거의 몰아내고 이집트 남부 지역을 다스리게 됩니다.
주전 715년 쿠쉬 왕조가 만든 제25왕조가 상하이집트를 모두 점령하여 통일하게 되는데, 주전 715년까지는 이집트에 네 개의 왕조가 존재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북왕국이 멸망한 이후에야 이집트는 제25왕조에 의해 통일됩니다.
일부 학자는 「열왕기하 17장 4절」에 나타난 이집트 왕의 이름 ‘소’는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이스’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서 ‘호세아’가 사절을 보낸 것은 이집트 제24왕조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제22왕조의 마지막 왕인 ‘오소르콘 Ⅳ세(주전 730-715년경)’를 지칭한다고 봅니다.
‘호세아’의 아시리아 배반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에 ‘호세아’가 이집트 제22-24왕조 중 어떤 왕조와 접촉이 있던 것은 분명합니다만, 애굽 왕 ‘소’가 누구인지는 밝혀낼 수 없습니다.
북왕국 역사 기록에 대한 신빙성
우리가 앞으로 남왕국 뿐만 아니라 북왕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살펴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꼭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남왕국 역사가들이 기록한 북왕국에 관한 기록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열왕기」는 북왕국 왕들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을 언급합니다. 이는 남왕국도 마찬가지로 「유다 왕 역대지략」이라는 책에 기록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자신들이 이 두 책을 참고해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열왕기」의 독자는 큰 의심 없이 남왕국 역사가 집단의 역사 서술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 두 책의 존재는 알 수 없습니다. 발견된 파편도 없고, 이런 책이 있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습니다. 학자 중에는 이 두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가를 연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연구는 「열왕기」에서 추출한 내용을 모아놨을 뿐이지, 그것이 정말 「역대지략」이라는 책의 내용이라고 말할 근거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이 책이 있다고 가정하고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남왕국 역사가들은 어떻게 북왕국의 역사서 또는 왕들에 관한 기록을 손에 넣게 되었을까요? 당시 기록물은 지금처럼 여러 부수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옮기기 어렵게 돌판에 새겨진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저희가 사진을 통해 보았지만, 아시리아의 기록도 대부분 육각 돌기둥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나마 가장 이동하기 쉬운 기록 수단은 주전 2500년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이집트의 파피루스나 그 이후에 만들어진 양피지일 것인데,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 시기에 파피루스를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양피지에 기록을 남기기는 했겠지만, 고대 유물들을 보면, 긴급한 구원요청이 담긴 서신도 점토판에 새겼던 것으로 보아, 일반적으로는 점토판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왕들의 역사를 굳이 이동성을 고려해서 기록할 이유가 있을까요? 오히려 오래 보존 가능한 돌에 새기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때로 현대인의 시각으로 성경을 읽어가기 때문에 어떤 책이 있다고 말하면, 그 책의 존재를 쉽게 믿거나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주전 700년경 당시에 기록물이라는 것은 쉽게 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북왕국의 기록물을 남왕국 역사가들이 쉽게 손에 넣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구전전승이라는 방식이 더욱 활발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당시 남왕국과 북왕국은 적대관계였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스라엘은 형제국가라고 생각하기에 이들이 서로 역사를 공유했다고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물론 때때로 남왕국과 북왕국의 관계가 양호했던 때도 있습니다. 이런 시기는 앞으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호세아’ 시기에 남왕국과 북왕국이 협력 체계를 갖추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적대관계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왕국 ‘호세아’ 직전 왕이었던 ‘베가’는 아람과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에 대적하기 위해 남왕국을 압박했으며, 남왕국이 협조하지 않자 대대적인 침공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만 생각해도 이해가 편할 것입니다. 2011년 북한의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북한에서 우리에게 전화로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첩보를 통해 김정일 사망을 알았고 북한에서는 사망 이틀 후에야 이를 공표했습니다. 이는 그나마 무한한 첩보가 가능한 현대 사회이기에 북한이 이틀 만에 공표해버린 것이고, 고대 사회라면 타국 왕의 죽음을 전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왕실에서 공표하지 않는다면 왕의 사망을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열왕기」가 말하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이 북왕국에서 기록된 왕의 연대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 책과 비슷한 어떤 것이라도 존재했다고 가정하고 생각한다면, 남왕국에서 벌인 북왕국 동향 파악 기록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렇기에 이 정보는 역사적으로 완전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왕국 전승은 어떻게 남왕국으로 전달되었는가?
여기에서 문제 삼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북왕국 전승이 남왕국에 실제로 전해졌고 성경에 반영되었다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나 ‘엘리사’는 북왕국 예언자입니다. 이들의 활동에 관한 내용이 어떻게 남왕국에 전달되었는가의 문제, 북왕국 출신 예언자들의 글이 어떻게 지금 구약성경에 포함되었는지의 문제 등이 남게 됩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출애굽에 관한 전승과 신앙 자체도 북왕국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많은 학자가 이야기하는 가능성은 북왕국 출신 난민이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남왕국의 ‘히스기야’에서 ‘요시야’까지 이야기하면서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북왕국 멸망 이후 난민이 발생하였고, 이들이 북왕국 전승을 남왕국으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난민 가설은 지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북왕국 난민설에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2012년 『구약논단』 18호에 실린 홍국평의 ‘북이스라엘 난민 유입 가설 재고: 성서 문헌의 형성사에 끼치는 영향을 중심으로’를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이 논문은 북왕국 난민이 없었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내용을 조금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이 논문은 북왕국 왕 ‘베가’ 시대에 있었던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으로 인해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태였고, ‘히스기야’가 다스리는 남왕국은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기 때문에 북왕국의 예언자를 포함한 식자(識者) 계층이나 귀족 계층을 남왕국에서 받아들일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또 고대 사회에서 농민 계층은 지금의 전쟁 난민과 같이 땅을 버리고 다른 나라에 유입되는 선택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논문의 요지는 남북왕국을 ‘형제국가’라고 생각하며 북왕국 전승이 친절하게 남왕국에 전달되었고, 남왕국 역사가나 예언자들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며 융합시켰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북왕국 전승은 어떤 방식으로 남왕국에 전달되었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은 회피합니다.
고고학에서는 남왕국 ‘히스기야’ 시대에 갑작스럽게 확장된 성벽으로 인해 북왕국의 대규모 난민이 남왕국으로 유입되었다고 말하지만, 저는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의 난민 유입은 없었다고 봅니다. 위의 논문에 일부 동의하는데, 농민이나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의 대규모 유입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히스기야’는 전쟁에 대비해서 성벽을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북왕국의 예언자나 식자 계층의 유입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지만, 북왕국이 멸망하기 직전 ‘호세아’는 반아시리아, 친이집트 정책을 펼칩니다. 이는 남왕국 ‘히스기야’의 정책 기조와 같습니다. 이는 왕의 성향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북왕국에 반아시리아, 친이집트 성향의 집단이 있었고 남왕국에도 이런 성향의 집단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 이런 성향의 집단이 정권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남왕국 ‘히스기야’는 처음에 아시리아에 복속했지만, 뒤에서는 항상 국가 독립의 칼을 갈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 ‘히스기야’ 시대였기 때문에 같은 성향을 가진 북왕국 인사들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그 예가 지난 이스라엘 역사 알기 (10) 「난민 여 예언자 훌다, 요시야 종교개혁의 중심」에서 다루었던 여 예언자 ‘훌다’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북왕국 두 국가는 적대관계에 있었을 수 있지만, 남왕국도 아시리아에 의해 폐허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같은 정치 성향을 가진 식자 계층을 남왕국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또 북왕국의 반아시리아 성향의 집단 역시 아시리아에 잡히느니 남왕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는 「예레미야 43장」에 나타난 ‘그달리야’ 시해 사건 이후 남왕국의 고위층이 이집트로 망명한 사건과 마찬가지로 보입니다.
따라서 저는 북왕국에서 망명한 식자 계층에 의해 북왕국 전승의 일부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 「열왕기」에 나타난 북왕국 이야기는 대부분 남왕국과 북왕국이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북왕국 ‘아합’ 시대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실제 주변국의 기록들에 따르면, ‘아합’보다 그의 아버지 ‘오므리’가 더 유명합니다. 하지만 「열왕기」는 남북왕국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북왕국 ‘오므리’ 시대보다는 친교가 맺어졌던 ‘아합’ 시대의 이야기만을 전합니다. 나머지 왕들에 관해서는 거의 북왕국 동향 수준의 이야기만을 전합니다.
이는 남북왕국이 친선관계에 있을 때에 서로의 전승이나 문화가 교류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아마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남왕국에 남겨진 자료들, 전승들을 기준으로 북왕국의 역사를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또 ‘히스기야’ 이후 얻게 된 전승 자료도 활용했을 것입니다. 다만 이는 정확한 북왕국 역사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들 역사가 집단에게 북왕국의 역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봅니다.
더 큰 틀에서 「사무엘-열왕기」에 나타난 북왕국 전승 문제뿐만 아니라, 오경 편집에 사용된 북왕국 전승 문제가 남아있기는 합니다만, 이 글에서 거기까지 다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난민들이 전승을 가져왔고, 바벨론 포로기 즈음에 그 전승을 사용하여 역사서를 기록했다는 문제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의 구성을 어느 정도 만들어 놓은 사람들을 남왕국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들은 남왕국 사람들이었고, 돌아온 사람도 남왕국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구약성경 안에 북왕국 전승이 너무나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남북한 통일이 남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역사책에 ‘위대하신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적게 될까요? 반대로 북한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위대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이야기를 적을까요? 뭔가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구약성경에는 이 정도로 차이가 있는 남북왕국의 서로 다른 전승이 융합되어 있습니다.
이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내용까지 모두 다뤄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의문으로만 끝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마지막 정리는 아마 이에 관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내용에서 「열왕기」에 나타난 북왕국 역사 기록은 부정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연대의 틀은 남왕국을 기준으로 맞춰가게 될 것입니다. 주변국 기록과 남왕국 연대가 크게 차이난다면 남왕국의 연대를 수정해야겠지만, 성경 안에서의 기록을 통해 연대를 수정해야 한다면 북왕국 연대를 먼저 수정하겠다는 뜻입니다.
열왕기가 말하는 선함과 악함의 기준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마지막으로 짧게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열왕기하 17장 2절」은 북왕국 ‘호세아’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호세아’는 이전 왕들보다는 조금 덜 악했다고 평가합니다.
이런 평가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열왕기하 17장 7-18절」은 북왕국의 죄악에 대해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런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남왕국 멸망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고, 남북왕국 멸망을 우상숭배라는 죄로 돌리는 열왕기 역사가 집단의 역사관이기도 합니다.
「열왕기하 17장 7-18절」에 나타난 죄악, 우상숭배의 목록은 「열왕기하 21장 3-7절」에 나타난 ‘므낫세’의 죄악과 거의 똑같습니다. 그런데 ‘므낫세’는 남왕국의 멸망의 원인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북왕국의 ‘호세아’는 다른 이스라엘 왕들보다는 조금 덜 악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도대체 이런 평가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북왕국의 ‘호세아’에 대해서 열왕기 역사가가 기록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7장 3-4절」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북왕국은 아시리아의 속국이었지만, ‘호세아’는 아시리아를 배신합니다. 그리고 이집트 왕과 접촉합니다. 이 모습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남왕국 ‘히스기야’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난 글 이스라엘 역사 알기 (15) 「므낫세는 야훼와 성전을 버렸을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열왕기 역사가가 반아시리아, 친이집트 집단이었다고 해서 같은 정책을 펼쳤던 북왕국 왕을 높여준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히스기야’를 높이기 위해서 ‘히스기야’와 똑같은 정책을 펼쳤던 북왕국의 ‘호세아’까지 조금 높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북왕국의 왕은 열왕기 역사가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남왕국의 왕이 그들의 관심사였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들이 내리고 있는 평가는 북왕국 왕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아니라 남왕국 왕에 비교하여 맞춘 평가라고 봅니다.
실제로 북왕국 ‘호세아’가 북왕국의 다른 왕들보다 ‘조금’ 나은 왕인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왕이 죽은 해를 기준으로 아래에서부터 올라가고 있기 때문에 다음에 다루게 될 왕은 남왕국의 ‘아하스’입니다. ‘아하스’에 관해 이야기하면 아마 북왕국 ‘베가’에 관해서도 분명 겹쳐지게 되겠지만, ‘아하스’를 중심으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