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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사밧, 역대기 역사가들이 사랑한 왕

기사승인 2021.04.01  15:4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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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㉙

열왕기에 나타난 여호사밧

지난 두 주간은 ‘아합’과 오므리 왕조에 대해 다뤘습니다. 북왕국의 ‘아합’은 이미 ‘예후’ 혁명을 다룬 글에서도 언급되었고, ‘여호람’에 대한 글에서도 언급이 되었기에 엄밀하게 따지면 네 번에 걸쳐 ‘아합’과 관련된 이야기를 살펴본 것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열왕기」에 너무나도 거대하게 나타난 ‘아합’의 뒤에 가려져 스쳐 지나가 버리게 되는 남왕국 ‘여호사밧’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열왕기」를 읽으며 남왕국 왕들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할 때, 「열왕기상 15장」에서 ‘아사’를 읽은 후 한참 책을 넘겨야, 「열왕기상 22장 41-50절」에서 ‘여호사밧’의 일대기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29절-22장 40절」에는 ‘아합’과 ‘엘리야’에 관한 이야기가 길게 나타나 있지만, ‘여호사밧’에 관한 기록은 그 뒤에 단 열 절로 끝나버립니다.

물론 ‘여호사밧’의 이름은 「열왕기상 20장」에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남왕국 왕에 관한 역사 서술이라기보다 북왕국과 아람의 전쟁에 참전한 북왕국의 협력자 정도로만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열왕기하 3장」에서도 북왕국과 모압의 전쟁에 참전한 협력자로만 나타납니다.

‘아합’과 ‘여호사밧’이 각기 통치했던 기원전 9세기 초중반에 관한 고고학 자료들은 북왕국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남왕국에 관련된 자료는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는 책들에서도 ‘여호사밧’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지난 글 속에서도 ‘여호사밧’이 통치하는 남왕국은 ‘아합’이 다스리는 북왕국의 속국과 다름없었다는 언급을 몇 차례 했습니다. 그렇기에 ‘여호사밧’은 그냥 쉽게 지나쳐도 될 왕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가 스쳐 지나가 버린 남왕국 ‘여호사밧’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열왕기상 22장 41-50절」은 단 열 줄에 그치지만 ‘여호사밧’에 대한 많은 정보가 나타납니다. 그는 아버지 ‘아사’의 길을 따라 야훼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하지만 그도 아버지 ‘아사’와 마찬가지로 산당은 없애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열왕기상 22장 46절」을 보면, 그가 아버지 ‘아사’의 정책에 따라 ‘성전 남창(카데쉬, קדשׁ)’을 내쫓았다고 말하는데, ‘카데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따지려면 긴 논의가 되기 때문에 이에 관한 설명은 다음 기회에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여호사밧’이 아버지 ‘아사’와 마찬가지의 야훼 종교 정책을 강하게 펼쳤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전 남창’ 추방은 ‘아사’ 역시도 추진했던 정책입니다(왕상15:12).

‘여호사밧’이 야훼 종교에 신실했다는 점은 「열왕기상 22장」에 나타난 아람 전쟁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2장 5절」에서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전쟁에 나가기 전 야훼의 뜻을 확인하자고 제안합니다.

「열왕기상 22장 4절」에서 ‘여호사밧’이 ‘아합’에게 하는 말,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는 남왕국이 북왕국의 속국임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하관계 속에서도 ‘여호사밧’은 중주국의 왕에게 야훼의 뜻을 확인하자고 제안합니다.

‘아합’이 400명의 야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긍정적인 대답을 얻을 때에도 ‘여호사밧’은 마지막 선지자의 말까지 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결국 선지자 ‘미가야’의 부정적인 예언까지 듣도록 ‘아합’을 이끕니다.

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본래 ‘아합’이 아니라 그 이후인 ‘예후’와 ‘여호아하스’일 것입니다. ‘아합’이 아람 왕과 전쟁했다는 이야기는 전승이 전해지는 과정 속에서 바뀌었거나 열왕기 역사가 집단에 의해 수정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㉒ ‘실재 역사와 역사가의 역사’」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전쟁을 수행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이 본문의 전승 과정을 따져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분명한 점은 「열왕기」가 ‘여호사밧’을 신실한 야훼 신앙인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여호사밧’에 대한 전승에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열왕기상 22장 47절」에는 에돔에 왕이 없었고, 섭정 왕이 있었다는 말이 나타납니다. 「열왕기하 3장」에 나타난 모압 전쟁에서 에돔이 북왕국과 남왕국의 협력 국가로 나타나는 점이나 모압을 치러 가는 경로를 에돔 광야로 선정했다는 점은 에돔이 북왕국 또는 남왕국의 속국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열왕기」나 「역대기」는 누가 에돔을 정복했는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데, 에돔이 비록 남왕국 남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를 점령한 왕은 북왕국 ‘아합’으로 보입니다. 에돔을 다스린 섭정왕이 북왕국 관리였는지, 남왕국에게 에돔 통치를 위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합’ 때까지만 해도 에돔은 북왕국의 속국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3장」에서 에돔 광야로의 경로를 지정한 왕이 남왕국 ‘여호사밧’이라는 점과 모압 전쟁을 수행하기 전 북왕국 ‘여호람’이 남왕국 ‘여호사밧’보다 낮은 위치를 자처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아합’ 사후에 에돔은 남왕국의 속국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하 8장 20-21절」에 따르면 에돔은 ‘여호람’ 때에 남왕국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룹니다.

마지막으로 「열왕기상 22장 48-49절」에는 ‘여호사밧’의 해상 무역 개척에 관한 기술이 나타납니다. 이는 「역대기」와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사밧’은 오빌에서 금을 구하기 위해 해상 경로를 개척합니다. 이때 오빌은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했다는 점을 본다면, ‘여호사밧’은 에돔 남단의 홍해를 이용한 해상 무역로를 개척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무역로 개척은 실패로 끝납니다.

‘여호사밧’의 에시온게벨 무역로 개척 일화는 「열왕기상 9장 26절」과 「열왕기상 10장 22절」에 나타난 ‘솔로몬’의 무역 일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어 오빌로 보내 금 420달란트를 얻습니다(왕상9:26-28). 또 솔로몬은 다시스 형식의 배를 만들어 3년에 한 번씩 희귀한 동물을 얻었다고 합니다(왕상10:22).

그렇다고 해서 ‘여호사밧’의 무역로 개척 일화가 ‘솔로몬’ 일화에 빗댄 창작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또 그의 정책이 ‘솔로몬’ 시대의 무역항을 되찾기 위한 노력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여호사밧’이 원했던 것은 독자적인 무력 항로인 것으로 보입니다.

▲ 에시온게벨 위치

위의 지도는 이전에 남왕국 ‘웃시야’에 대한 글에서 보았던 지도입니다. 당시 ‘웃시야’가 확장한 영토의 최남단 엘랏이 어디인지 확인하기 위해 보았던 지도인데, 에시온게벨은 엘랏 바로 옆에 있는 지역입니다. ‘여호사밧’이 어떤 무역 경로를 개척하려고 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왕국이 페니키아와의 동맹을 통해 지중해 무역로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남왕국 ‘여호사밧’은 홍해를 통한 이집트나 쿠쉬 왕조와의 무역을 목표로 삼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생각해 볼 부분이 「열왕기상 22장 49절」에 나타난 북왕국 ‘아하시야’의 제안입니다. ‘아하시야’는 ‘여호사밧’에게 해상 무역로 개척에 동참하고 싶다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은 이를 거절합니다. ‘아합’ 이래로 남왕국과 북왕국은 동맹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여호사밧’의 거절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사밧’의 거절은 「열왕기상 22장 51-53절」이 기록하는 바와 같이 북왕국 ‘아하시야’가 하나님 앞에서 악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아합’이 죽고 ‘아하시야’가 북왕국을 계승한 이후 남왕국은 북왕국의 손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길을 걷는 방향을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북왕국 ‘아하시야’의 뒤를 이은 ‘여호람’과 남왕국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동일인물이라고 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㉖ ‘여호람, 예후 반란의 원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남왕국 ‘여호사밧’의 아들이자 북왕국 ‘아합’의 사위인 ‘여호람’이 한동안 북왕국만을 통치하다가 ‘여호사밧’ 사후 남북왕국을 모두 통치한 일은 ‘여호사밧’의 계획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역대하 21장 3-4절」에서 ‘여호사밧’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각기 성읍을 맡겼는데, 장자인 ‘여호람’이 이들을 모두 죽이고 홀로 왕위에 올랐다고 말하는 점은 ‘여호람’이 아버지 ‘여호사밧’의 생각과 다른 길을 걸었음을 암시합니다.

아들 ‘여호람’에 의해 예상외의 상황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여호사밧’은 북왕국과 동맹 상태는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북왕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기반을 쌓고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왕기」가 ‘여호사밧’에 대해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은 「열왕기상 22장 44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왕과 더불어 화평했다’는 점으로 보입니다. 이는 그의 아버지 ‘아사’가 일생 동안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전쟁을 치뤘다는 「열왕기상 15장 16절」의 기술과 대비됩니다.

하지만 「열왕기」는 ‘아합’ 집안과의 혼인에 의해 이루어진 평화가 결국 남왕국에 올무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왕하8:18). 「열왕기」는 ‘여호사밧’ 때에 남북이 화평하게 된 상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남북의 화평 상태는 잠시 후 살펴보게 될 「역대기」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평가됩니다.

역대기에 나타난 여호사밧

‘여호사밧’에 대해 살펴볼 이유는 「열왕기」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대기」에 나타난 ‘여호사밧’은 우리가 그를 좀 더 관심있게 살펴보도록 만듭니다. 분열왕국 이후 왕 중에서 역대기 역사가 집단이 높게 평가하는 왕이 세 명 있습니다.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입니다.

▲ 스페일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 세워진 여호사밧과 히스기야 동상 ⓒ위키피디아

위의 사진은 스페인에 있는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El Escorial)’에 있는 조각상입니다. ‘여호사밧’과 ‘히스기야’가 함께 조각되어 있습니다. 「역대기」가 높게 평가하는 왕들을 조각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에는 왕의 연대기가 단 열 절밖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머지 성경에서는 조연으로만 등장했지만, 「역대기」는 네 장에 걸쳐 ‘여호사밧’을 다룹니다(대하 17-20장). 「역대하 17장 3-5절」은 그가 다윗의 길로 행했으며 야훼께서 남왕국을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특히 「역대하 17장 5절」은 ‘그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다’고 말합니다.

「역대하 17장 10-11절」에는 ‘여호사밧’에게 조공을 바친 나라의 목록이 나타나고, 「역대하 17장 12-19절」에는 그의 군사 목록이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 목록은 이어지는 「역대하 20장」의 이야기들과 충돌됩니다.

블레셋이 남왕국의 속국이 되었고 조공을 바쳤다면, ‘여호사밧’은 굳이 홍해를 통한 무역로를 개척할 이유가 없습니다. 블레셋 항구를 통해 하이집트와 무역을 할 수 있었고 블레셋을 가로지르는 육로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또 ‘여호사밧’의 군대가 이토록 강대하였다면, 「역대하 20장」에 나타난 아람과의 전쟁을 앞두고 그가 두려워 떨 이유가 없습니다(대하20:3-4).

이와 함께 ‘여호사밧’이 실시한 몇 가지 정책에 관한 내용도 나타나는데, 「역대하 17장 7-9절」에는 남왕국 전역에 실시한 교육 정책이 나타나고, 「역대하 19장 4-11절」에는 사법 정책이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 정책에 관한 내용의 중심에는 레위인과 제사장이 있습니다. 교육을 맡은 이들도 레위인과 제사장이고 재판을 맡은 이들도 레위인과 제사장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는 학자들은 「역대기」에 나타난 ‘여호사밧’의 정책이 역대기 역사가 집단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을 강조하는 것이 「역대기」의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대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세부적인 면에서 역대기 역사가 집단의 첨가가 있을지 몰라도 ‘여호사밧’이 교육과 사법에 관한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은 실제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갖지 못했거나 알고도 무시했던 자료를 역대기 역사가 집단이 활용한 것이라고 봅니다.

앞서 「열왕기」에 나타난 ‘여호사밧’에 관한 내용들을 통해서 그가 북왕국의 속국 체계를 택하기는 했지만, ‘아합’ 사후 남왕국의 독립을 위한 기반을 닦았을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역대기」에 나타난 교육, 사법 정책도 그런 ‘여호사밧’의 노력의 일부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 「역대기」가 그를 훌륭한 왕의 한 명으로 꼽고 있는 이유에는 그들에게 전해져왔던 ‘여호사밧’에 대한 좋은 평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역대기」는 그러한 전승이나 자료를 활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호사밧’이 펼칠 정책이 모두 역대기 역사가 집단의 창작이라고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남왕국이 영토국가 체계를 확고하게 다진 것은 ‘웃시야’ 시기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 알기 ⒇ ‘어떤 왕도 다윗과 솔로몬의 업적을 넘어서면 안 된다?’」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남왕국에서 ‘여호사밧’이 이룬 것은 북왕국 ‘아합’과 마찬가지의 확고한 국가 체제 수립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작게 본다면 예루살렘 내에서의 교육, 사법 체계 수립이었을 것이고, 크게 보자면 남왕국 전역에 영토 국가 체제의 기반만 닦아놓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역대하 17-20장」은 몇몇 부분에서 「열왕기」의 기록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일부를 수정함으로 ‘여호사밧’에 대한 평가를 「열왕기」와는 조금 다르게 내립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합’ 왕조와의 혼인입니다.

「역대하 17장」은 ‘여호사밧’이 야훼 신앙 안에 굳게 서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와 영광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또 그는 교육 체계를 수립하였고, 강한 군사력을 보유했습니다. 그래서 「역대하 18장 1절」은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에서 ‘여호사밧’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행동을 합니다.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역대기」는 남왕국의 평화와 안정, 부유함이 북왕국의 도움 때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남왕국은 이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아합’ 가문과의 혼인으로 인해 ‘여호사밧’은 아람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비열한 ‘아합’의 책략으로 인해(왕상22:30; 대하18:29) 죽음의 위기를 겪습니다. 「열왕기상 22장 32-33절」은 ‘여호사밧’이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아람 병사들이 그가 ‘아합’이 아닌 줄 알고 떠나갔다고 말하는데, 「역대하 18장 31절」은 야훼께서 그를 도우셨기에 살아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합’ 가문과의 혼인이 불필요했음은 이어지는 「역대하 19장 1-3절」에 나타난 예언자 ‘예후’의 질책에서 확실 나타납니다. 북왕국의 ‘예후’와는 다른 사람인 예언자 ‘예후’는 ‘여호사밧’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19:2).”

「역대하 20장 1-30절」에 나타난 남왕국과 아람의 전쟁에 관해 일부 학자들은 「열왕기하 3장」을 수정한 내용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최근 역대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열왕기하 3장」의 모압 전쟁과는 다른 이야기라고 봅니다.

「역대하 20장」에 나타난 남왕국과 아람의 전쟁에 관한 역사적 실체는 확인할 수 없기에 어디까지 실제에 기반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역대기 20장」에서 보여지는 역대기 역사가 집단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남왕국은 북왕국의 도움으로 인해 강성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남았고 강국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사밧’이 하나님 앞에 온전했기 때문이며, ‘아합’ 집안과의 혼인은 그에게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평가 내립니다.

▲ 감사를 올리는 여호사밧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안토니오 템페스타(Antonio Tempesta)’가 1613년 제작한 판화입니다. 승리 후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는 ‘여호사밧’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역대하 20장 31-37절」에는 「열왕기상 22장 41-50절」과 상응하는 ‘여호사밧’의 연대기가 나타나면서 그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여기에서도 「열왕기」와 「역대기」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먼저 「역대하 20장 33절」을 보면, ‘여호사밧’이 산당을 철거하지 않은 책임을 은근슬쩍 돌이키지 않는 백성에게 돌립니다.

‘여호사밧’의 해상 무역로 개척에 관해서도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는데, 「역대기」는 ‘여호사밧’이 북왕국 ‘아하시야’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함께 무역로를 개척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하시야’와의 협력이 무역로 개척의 실패 이유라고 ‘엘리에셀’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대하20:37). ‘여호사밧’의 실패가 아니라 잘못된 협력 관계에 의한 실패라고 말합니다.

「역대하 20장 36-37절」은 「열왕기」에 비해 ‘솔로몬’ 일화에 더 가깝게 내용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에시온게벨에서 홍해를 통한 무역로를 개척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건조하고 지중해를 건너 다시스로 가려는 목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역대기」의 이런 수정 작업은 역대기 역사가 집단이 강조하고자 하는, 야훼 신앙을 통한 성공과 정치적 교류를 통한 실패라는 점은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호사밧’이 북왕국과의 관계 속에서 남왕국만의 기반을 닦기 위해 노력한 사실이 가려지는 결과를 이끈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사밧 연대와 평가

「열왕기상 22장 41-42절」과 「역대하 20장 31절」에 따르면, ‘여호사밧’은 ‘아합’ 4년에 왕위에 올라 25년간 남왕국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지난 글에서 ‘아합’이 주전 873년에 왕위에 올랐음을 확인했기 때문에, ‘아합’ 4년이면 주전 870년이 됩니다.

남왕국 ‘여호람’의 연대는 애매한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주전 849년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여호사밧’이 남왕국에서 왕위에 있었던 기간은 22년이 됩니다. 어쩌면 마지막 3년의 기간은 ‘여호람’과 공동 통치를 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또 연대상에 나타난 오류를 무조건 공동 통치로 돌리는 일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여호사밧’의 재위 기간은 주전 870-849년이며 22년간 남왕국을 다스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여호사밧’의 아버지 ‘아사’가 실제로 40년 가까이 남왕국을 통치하면서 북왕국과 적대했다면, ‘여호사밧’은 북왕국과 남왕국의 긴 분쟁의 시기를 종식시킨 왕입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이는 ‘여호사밧’의 공이 아니라 북왕국 ‘아합’의 공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여호사밧’이 ‘아합’에게 끝까지 대립하는 길을 걷지 않고, 속국과 마찬가지의 형태가 됨으로 양국 간의 화평을 이루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만 합니다.

그는 북왕국의 속국 상태를 용인했지만 북왕국에 의존적으로 국가를 운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북왕국과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남왕국의 체제를 정비하여 교육과 사법 체계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또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열왕기하 3장」에는 아람과 전쟁하기 위해 북왕국, 남왕국, 에돔 연합군이 진군하다가 식량이 떨어진 상황이 나타납니다. 이때 북왕국 ‘여호람’과 남왕국 ‘여호사밧’, 에돔 왕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예언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열왕기하 3장 14절」을 보면 ‘엘리사’의 말이 나타나는데, 그는 북왕국 ‘여호람’은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남왕국 ‘여호사밧’ 때문에 만나주었다고 말합니다.

‘여호사밧’에 대한 이 짧은 언급이 본래 ‘엘리사’ 전승에서 유래된 것인지, 북왕국과 모압의 전쟁에 대한 전승에서 유래되었는지 분명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제외하고 「열왕기」에서 ‘엘리사’와 ‘여호사밧’의 관계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았을 때, 열왕기 역사가 집단의 창작물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여호사밧’은 ‘아합’을 설득하여 야훼 선지자의 말을 듣도록 했습니다. 또 ‘엘리사’가 ‘여호사밧’에 대해 좋게 평가하고 있다는 점은 그의 행동들이 북왕국에서 존재했던 야훼 선지자 집단과 바알 선지자 집단 간의 갈등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할지라도, 최소한 북왕국 야훼 예언자 집단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상을 종합해 보았을 때, ‘여호사밧’은 야훼 신앙에 투철했으며, 속국 상태에서도 종주국의 종교 갈등에 미미하게라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또 그는 이런 신앙 위에서 남왕국의 독립을 위한 기반을 닦았던 왕입니다. 이러한 ‘여호사밧’의 신앙적이고 자주적인 모습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전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역대기 역사가 집단은 ‘여호사밧’을 분열 왕국 이후에 나타난 왕 중에서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꼽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그의 신앙보다 ‘아합’의 불신앙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여호사밧’에 대해 적은 분량만을 남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에는 남왕국 ‘아사’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와 함께 가능하다면 북왕국의 혼란기였던 ‘바아사’, ‘엘라’, ‘시므리’의 이야기를 함께 다루려고 합니다. 이들의 통치 기간은 남왕국 ‘아사’의 통치 기간 안에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최대한 함께 다루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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