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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역

기사승인 2021.02.18  16: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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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㉓

여왕 아달랴(주전 842-836년)와 제사장 여호야다

남왕국 왕 ‘요아스’를 다루기 위해서는 제사장 ‘여호야다’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북왕국에서 벌어진 ‘예후’의 반역으로 남왕국 왕 ‘아하시야’도 죽어버렸기 때문에 졸지에 남왕국 왕좌는 공석이 되어버립니다.

「열왕기하 11장 1절, 3절」에 보면, 이때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왕의 자손을 모두 죽여버리고 자신이 여왕의 자리에 올라 6년간 남왕국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아달랴’는 「열왕기하 8장 18절」을 보면, ‘아합’의 딸이며 남왕국 ‘여호람’의 아내입니다. 「열왕기하 8장 26절」은 ‘오므리’의 손녀라고 말합니다.

「열왕기」는 여왕 ‘아달랴’의 통치에 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습니다. ‘아달랴’에 관한 기록은 약 다섯 절 정도이며, 이 역시도 치적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따라서 ‘아달랴’에 관해서는 다룰 수 있는 내용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아달랴’에 관해서는 ‘아합’ 왕조와 함께 다루려고 했는데, ‘요아스’를 살펴보려면 결국 ‘아달랴’가 함께 언급되기 때문에 ‘아달랴’도 이번 글에서 함께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달랴’가 여왕의 자리에 앉았을 때, 남왕국에서는 영화와 같은 사건이 벌어집니다. ‘아달랴’가 왕족을 모두 죽일 때, 남왕국 ‘여호람’의 딸이자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한 명인 ‘요아스’를 숨긴 사건입니다.

▲ 하먼 얀스 뮐러, 「아달랴 학살」 (판화)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New Hollstein Dutch & Flemish』 시리즈에 수록된 하먼 얀스 뮐러(Harmen Jansz Muller) 판화입니다. 1565년에서 1569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달랴’는 가운데에서 병사들을 명령하고 있고, 좌측에는 ‘여호세바’가 ‘요아스’를 몰래 성전으로 숨기는 장면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호세바’에 대한 「열왕기하 11장 2절」의 설명은 조금 이상해 보이긴 합니다. ‘요아스’의 숙모이자 ‘아달랴’의 딸인 ‘여호세바’에 관한 설명을 이미 죽은 남왕국 왕 두 사람의 이름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남왕국 왕조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효과로 보이는데, 이와 동시에 ‘아달랴’의 왕위 찬탈이 결국 그녀의 딸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음을 암시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요아스’가 왕위에 오른 시점은 ‘아달랴’ 통치 7년째였고(왕하11:4), 이때 ‘요아스’의 나이는 7살이었다고 말합니다(왕하11:21). 따라서 ‘여호세바’에 의해 성전에 숨겨진 ‘요아스’는 한 살의 아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요아스’가 성전에 유모와 함께 숨어 6년간 지냈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역사 알기(17) ‘솔로몬, 70평의 성전을 7년 동안 지었다?’」에서 성전 모형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아달랴’ 당시의 성전은 사람이 숨어 지낼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못됩니다. 또 ‘아달랴’가 자신의 손자들을 모두 죽이면서 한 명을 빠뜨렸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하시야’가 ‘솔로몬’과 같이 여러 왕비와 첩을 두었고 자식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면 한 명 정도 놓쳤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습니다.

「열왕기」에서 ‘여호세바’의 역할은 여기에서 끝납니다. 「열왕기하 11장 4절」 이후로 이야기의 주인공은 제사장 ‘여호야다’로 바뀝니다. ‘여호야다’는 일부 군 장관들과 조약을 맺고 ‘아달랴’를 폐위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아달랴’ 7년째에 성전에서 ‘요아스’를 왕으로 세운 후 ‘아달랴’를 시해합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성전에서 ‘요아스’를 왕으로 세울 때, 백부장들에게 다윗의 창과 방패를 주었다고 말합니다(왕하11:10). 학자 중에 이 창과 방패가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지 연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점은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여호야다’의 반역을 다윗 왕조 정통성 회복 사건으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앞선 ‘여호세바’에 관한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아달랴’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후 제사장 ‘여호야다’는 바알 제의를 철폐시킵니다. 「열왕기하 12장 2절」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이라는 표현을 보면, 제사장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통치 기간 중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야다’는 「열왕기」 안에서 상당히 특이한 인물입니다. 남왕국 ‘아달랴’와 ‘요아스’ 이야기 속에서 주연을 꼽는다면, ‘여호야다’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자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많이 있지만, 제사장 중에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주연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여호야다’가 유일해 보입니다.

「열왕기하 12장 2절」에 나타난 평가는 ‘여호야가’가 ‘요아스’를 바른길로 이끌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12장 4절」 이후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요아스’로 바뀌며 제사장 ‘여호야다’에 대한 평가도 바뀝니다. ‘여호야다’는 성전을 수리하기 위해 모은 돈을 자신들 마음대로 사용했던 제사장 중 한 명으로 그려지며 주연의 자리를 내려놓게 됩니다.

남왕국 요아스(주전 836년-?)

「열왕기」가 전해주는 ‘요아스’에 관한 역사적인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요아스’의 치세를 다룬 「열왕기하 12장」은 거의 성전 보수에 관한 이야기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열왕기하 12장 17-18절」에는 아람왕 ‘하사엘’이 가드를 점령한 후 남왕국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는 ‘요아스’가 ‘하사엘’ 재위 기간 중 왕위에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열왕기하 12장 1절」은 ‘요아스’가 40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40이라는 숫자는 구약성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숫자이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어려운 숫자입니다. 40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드리지 않더라도 이미 대부분 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열왕기」가 완벽한 왕으로 꼽는 다윗과 솔로몬의 재위 기간이라고 말한 기간이 40년이었습니다(왕상2:11; 11:42). 다윗과 솔로몬 이후로 40년간 왕위에 있던 왕은 ‘요아스’가 유일합니다.

그렇지만 ‘요아스’의 재위 기간은 실제 40년이 아니었고, ‘요아스’를 훌륭한 왕으로 그리기 위한 장치였다고 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람 왕 ‘하사엘’의 침공 기록이나 이후 ‘아마샤’의 연대를 생각해본다면, ‘요아스’는 40년 가까이 남왕국을 다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정확하게 따지자면, ‘요아스’의 재위 기간은 40년이 채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그의 재위 기간을 40년으로 적고 있다고 보는데, 이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역대기」와 비교하며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만 문제는 ‘아달랴’입니다. ‘아달랴’에 관한 해석들은 대부분 상상에 의한 것이 많습니다. 「열왕기」나 「역대기」에 ‘아달랴’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조금 생각해 볼 만한 점들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달랴’는 7년간 남왕국에서 여왕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때 7이라는 숫자도 간단히 넘어갈 숫자는 아닙니다만, 7이 완전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열왕기」에 대입하여 해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7일을 한 주간으로 하여 7일째를 안식일로 삼는다는 개념이 바벨론 포로기 때에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열왕기」가 바벨론 포로기 이전이나 포로기 직후에 기록되었다고 본다면, 7이라는 숫자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열왕기」의 내용이 수정되고 편집되었다고 본다면, 그 편집자는 어떤 의미를 전하기 위해 숫자를 수정하였을 수도 있고, 수정하지 않았더라도 특정한 의미를 부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여호야다’의 반역이 「레위기 25장 8-12절」에 나타난 ‘희년’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실제 제사장 ‘여호야다’의 계획일 수는 없습니다. 후대 편집자가 ‘희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아달랴’의 통치 7년째에 반란이 일어났다고 수정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실제로 ‘아달랴’ 7년째가 적절한 시기였기에 그때 반란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 에드워드 버드, 「요아스 왕위 선포」 ⓒWiki∞(wikioo.org)

위의 그림은 영국 작가인 에드워드 버드(Edward Bird, 1772-1819)의 작품인 ‘요아스 왕위 선포(Proclaiming Joash King)’입니다. 좌측에는 어린 ‘요아스’의 모습이 있고, 그의 왕위를 선포하는 ‘여호야다’가 화면의 중앙에 있습니다. 작가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제사장 ‘여호야다’라고 본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무기를 가진 병사는 모두 ‘요아스’의 편에 서 있고, ‘아달랴’의 주변에는 일반 백성만을 그려놓은 점도 인상적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은 ‘아달랴’가 자신의 손자들을 포함한 왕족을 모두 죽였다는 점입니다. ‘밀러/헤이스’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사건은 상당히 이상하다고 지적합니다. ‘아달랴’가 자신의 통치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왕족을 남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은 대리청정하면 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에는 ‘아달랴’는 다윗 왕족을 몰살하고 자신의 왕조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상당히 이상해 보이기는 합니다.

우리는 몇 가지 상황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먼저 「역대하 21장 16-17절」에 나타난 남왕국 ‘여호람’ 시절에 있었던 블레셋과 아라비아의 침략입니다. 「역대기」는 ‘여호람’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남왕국을 치셨고, 이때 ‘여호람’의 막내아들 ‘여호아하스’만이 살아남았다고 말합니다. 다음은 「열왕기하 10장 12-14절」과 「역대하 22장 8절」입니다. 여기에서는 ‘예후’가 북왕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던 때에 남왕국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에는 남왕국 ‘여호람’ 시대부터 ‘아달랴’ 시대까지 왕족이 몰살당한 최소한 두 개 이상의 전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달랴’의 경우 그녀가 자신의 아들들과 손자들을 죽이면서까지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아달랴’에 의한 왕족 살해는 없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여호람’과 ‘아하시야’의 자손들이 살해당했을 시점으로 가장 적합한 때는 북왕국에서 ‘예후’가 혁명을 일으켰을 때로 보입니다. ‘예후’는 ‘아합’ 왕조와 혼인에 의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남왕국까지 손을 뻗쳤고, 이때 대부분의 남왕국 왕족이 살해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달랴’는 거의 모든 왕족이 살해당한 상황에서 남왕국 재건을 위해 여왕의 자리에 앉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하시야’의 아내 중 한 사람이 아니라 대왕대비라고 불러도 좋을 ‘아달랴’가 여왕의 자리에 앉았다는 점은 ‘아합’ 왕조가 몰락했지만, 그 영향력이 남왕국 안에서도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게 합니다. 또 남왕국 내에는 이전의 정책 기조를 따라 아시리아에 대항하고 시리아-팔레스타인 연합체를 원했던 세력이 존재했다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앞선 두 가지 상황에 따라 어떤 학자는 ‘요아스’ 재위 40년 중 7년은 ‘아달랴’의 대리청정 기간이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즉 ‘아달랴’가 ‘요아스’를 왕위에 세웠고 자신은 대왕대비의 직책으로 대리청정을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남왕국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주전 800년 이전에 왕위에 올랐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요아스’의 즉위 시점을 앞으로 당기기 위한 해석입니다. 저는 지난 글에서 말씀드렸지만, ‘아마샤’의 즉위를 주전 800년 이후로 보기 때문에 굳이 ‘요아스’의 재위 기간 40년 속에 ‘아달랴’의 통치 기간을 편입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요아스’를 ‘아달랴’가 세웠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을 열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달랴’는 ‘예후’ 혁명이 일어난 주전 842년에 남왕국에서 여왕의 자리에 올랐고, ‘아달랴’ 7년째에 ‘요아스’가 왕위에 올랐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정확한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성경의 기록을 조금이나마 신뢰한다면, ‘요아스’는 주전 836년에 왕위에 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야다의 반역

‘밀러/헤이스’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요아스’가 다윗 왕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와 제사장 ‘여호야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면 ‘요아스’의 유모까지 세 명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밀러/헤이스’는 이렇게 적습니다. 

“그러나 묘사된 상황들을 고려할 때,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제거하고 국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용한 사기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피할 수 없다(In view of the circumstances as described, however, one can hardly avoid wondering whether Joash might have been an impostor whom Jehoiada used to get rid of Athaliah and bring his own influence to bear on the nation. 『A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Judah』, 304 원문에서 번역).”

우리는 남왕국 왕들이 온전히 다윗의 자손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이나 후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글을 통해 그렇다고 받아들일 따름입니다. 역사 속에서 「열왕기」가 ‘~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내용이 실제 아들이 아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남왕국에서도 북왕국과 마찬가지로 역성혁명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는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 번역해 놓아 ‘밀러/헤이스’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처럼 번역했습니다(『고대 이스라엘 역사』 374). 하지만 원문에서 ‘밀러/헤이스’는 그런 의심을 피할 수 없다고 상당히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호야다’가 북왕국 ‘예후’의 혁명으로 인해 남왕국까지 왕과 왕족이 사라진 시점에 태어난 아이, 성전에 숨어 살다가 현재 7살이 된 아이를 내세웠다는 점은 하나의 프로파간다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린아이를 왕으로 세우는 편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이익에 부합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앞서 잠시 언급한 해석에 따라 ‘요아스’를 세운 사람이 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닌 ‘아달랴’라고 본다면, ‘요아스’의 나이는 7세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달랴’가 7세 아이에게 왕위를 넘길 이유는 없습니다. ‘요아스’가 조금 더 나이가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야다’의 반역을 중심으로 본다면, ‘요아스’의 나이는 어릴수록 좋았을 것이기 때문에 7세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다만 이 경우에 ‘요아스’가 실제 다윗의 혈통을 이은 아이인지 알 수가 없고,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역은 다윗 왕조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사장 집단이 권력을 잡기 위한 혁명이 됩니다. 또 ‘여호야다’에 협력한 세력들은 그 사실을 알고도 정책 방향성에 따라 협력을 한 것인지, ‘여호야다’의 거짓말에 속았던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역사 사료는 너무나 적고 「열왕기」 안에서 남왕국의 역성혁명에 관한 단서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해는 잘 안 되더라도 「열왕기하 11-12장」을 그대로 믿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실제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데 기록되는 과정에서 과거의 이야기이다 보니 조금 이상하게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아스’의 존재를 의심할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습니다. ‘밀러/헤이스’의 의심에 따라 ‘요아스’가 다윗 혈통이 아니라 제사장 ‘여호야다’의 혁명 때에 꼭두각시로 세워진 인물이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앞선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제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요아스’는 다윗 혈통을 이은 아이는 맞다고 봅니다. 하지만 ‘아하시야’의 아들 중 한 명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즉 ‘여호세바’에 의한 아기 ‘요아스’ 구출 작전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반란을 일으키며 만든 프로파간다로 보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에 관한 기록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왕국 왕들이 부인을 한 사람만 두지는 않았습니다. 분명 여러 아내가 있었고 많은 자식이 있었습니다. ‘요아스’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강화도령’으로 불린 철종과 마찬가지로 권력자들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된, 족보상으로 다윗의 피를 잇고 있는 아이였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 왕조 정통성을 중요하게 여긴 ‘암-하아레츠’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혁명에 동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혁명에는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한 이유만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전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북왕국 ‘아합’ 왕조는 시리아-팔레스타인 연합군을 형성해 반아시리아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연합은 아시리아와 결탁한 ‘예후’의 정변에 의해 붕괴됩니다.

‘아달랴’는 ‘아합’의 딸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반아시리아 기조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반아시리아 기조를 유지한 또 다른 왕, 아람 왕 하사엘의 침략이 ‘아달랴’ 시절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왕국 내에는 ‘아달랴’의 반아시리아 정책을 싫어하던 인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다윗 왕조 정통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주 계층인 ‘땅의 사람들’, ‘암-하아레츠’를 포섭합니다. ‘암-하아레츠’가 아시리아를 지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다윗 왕조 정통성이라는 목적 아래 힘을 합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역의 주역이었던 ‘여호야다’는 반아시리아 정책을 펼치던 ‘아달랴’를 몰아내고, 아마도 아시리아에 반항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아스’ 시절 아람 왕 ‘하사엘’이 침공한 사실도 그렇고, 이후 남왕국 ‘아마샤’와 ‘웃시야’가 남쪽으로 광범위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도 아시리아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당시 정세를 따져보았을 때, 아람이 남왕국과 적대했으며, 남왕국의 영토 확장 가능성은 아시리아와 결탁하는 방식 이외에 찾기 어렵다는 생각에 내린 하나의 추정입니다. 무조건 ‘요아스’ 당시 남왕국이 친아시리아 정책을 펼쳤다거나 아시리아의 속국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여호야다’의 반역 이후 함께 반역을 일으킨 집단이 무엇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사장 집단은 왕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돈을 챙길 정도로 강한 권력을 얻게 되었다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왕하12:4-6 참고).

본래 마지막에 ‘요아스’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열왕기」와 「역대기」의 차이점을 통해 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글을 적었었는데, 앞의 내용을 수정하다보니 분량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요아스’ 이야기 속에서 보여지는 「열왕기」와 「역대기」의 차이점에 관한 내용을 다루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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