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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람, 예후 반란의 원인

기사승인 2021.03.11  17: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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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㉖

‘밀러/헤이스’의 ‘여호람’ 가설

지난 글 마지막에 ‘밀러/헤이스’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제기된 ‘여호람’에 의한 남국왕국 공동통치를 살펴보겠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에 대해 살펴본 후, 만약 남북왕국을 다스린 ‘여호람’이 같은 인물이라면, 예후의 반란이 갖게 되는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밀러/헤이스’가 제시하고 있는 근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내용은 ‘밀러/헤이스’가 『고대 이스라엘 역사』(342-344)에서 제시한 가설을 정리하고 제 나름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가계도를 첨부했습니다.

▲ ‘여호람’이 동명이인일 경우 북왕국과 남왕국의 가계도 ⓒ이성훈

첫째는 「열왕기하 1장 17」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북왕국 ‘아하시야’는 자식이 없어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말 성경이나 마소라 사본에는 ‘그의 형제’라는 표현이 없지만, 몇몇 사본에는 ‘그의 형제’라는 표현이 들어갑니다. 영어 성경인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는 이런 사본에 따라 ‘his brother’라는 말을 첨가합니다.

북왕국의 ‘아하시야’와 ‘여호람’이 형제라는 기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합니다. 이후에 나타난 본문 속에서 ‘여호람’을 ‘아합’의 아들이라고 말하기 때문에(왕하3:1; 8:16, 25, 28f; 9:29 대하22:5f) ‘아하시야’와 ‘여호람’이 형제라는 사실은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왕국의 ‘여호람’은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아합’의 사위이면서 ‘아하시야’의 처남이 됩니다. 북왕국 ‘여호람’과 남왕국 ‘여호람’이 동명이인일 경우에도 둘의 관계는 처남-매부의 관계가 됩니다.

‘밀러/헤이스’가 ‘그의 형제’라는 마소라 사본에서 삭제된 구절을 왜 언급하고 있는지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나지 않지만, ‘아하시야’의 처남을 동생이라고 표현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둘째로 ‘여호람’에 관한 기본 정보, 왕위 등극 시점 등에 대한 오류가 「열왕기하」에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열왕기하 1장 17절」은 북왕국 ‘여호람’의 왕위 등극 시점이 남왕국 ‘여호람’의 둘째 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열왕기하 3장 1절」은 남왕국 ‘여호사밧’ 18년째에 왕이 되어 12년간 북왕국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이는 ‘여호람’ 뿐만 아니라 남왕국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에게서도 발견되는 문제인데, 「열왕기하 8장 25-26절」은 남왕국 ‘아하시야’가 북왕국 ‘아합’의 아들 ‘요람(여호람)’ 12년에 왕이 되어 1년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살해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열왕기하 9장 29절」은 ‘아하시야’가 북왕국 ‘아합’의 아들 ‘요람’ 11년에 왕위에 올랐었다고 말합니다.

셋째로 북왕국 ‘여호람’은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넷째로 초대 교부인 ‘안디옥의 루키아누스(Lucianus 또는 Lucian)’가 기록한 대조연표에 남왕국의 ‘여호람’과 ‘아하시야’에 관한 대조연표가 빠져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밀러/헤이즈가 제시한 세 번째 근거는 북왕국 ‘여호람’이 유일한 경우가 아니기에 큰 힘을 받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밀러/헤이즈가 제시한 네 번째 근거인 ‘루키아누스 대조연표’는 70인역 성경을 기반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역시도 근거로는 조금 빈약해 보입니다.

‘밀러/헤이스’는 이런 이유를 근거로 북왕국 ‘아하시야’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처남인 남왕국 ‘여호람’이 북왕국의 왕이 되었고, 남왕국 ‘여호사밧’ 사망 이후 ‘여호람’에 의한 공동통치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 ‘여호람’이 한 사람이 경우 북왕국과 남왕국의 가계도 ⓒ이성훈

열왕기와 역대기의 난해한 구절들

‘밀러/헤이스’의 가설과 함께 생각해볼 문제도 있습니다. 「역대하」에서 남왕국 ‘여호사밧’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표현되는 점입니다. 「역대하 17장 1절」은 ‘여호사밧’이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방어했다고 말합니다. 또 「역대하 21장 2절」을 보면, 우리 성경은 70인역에 따라 ‘유다 왕 여호사밧’이라고 번역했지만, 마소라 본문에는 ‘이스라엘 왕 여호사밧’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기」가 이런 기록을 남긴 이유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북왕국 ‘아합’ 통치시절 남왕국과 북왕국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단일 국가의 형태에 가까웠는데, 역대기 역사가 집단은 그 국가 운영의 주도권을 남왕국 ‘여호사밧’에게 돌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배희숙, 『역대하』, 대한기독교서회100주년기념 주석 13, 273-4 참고).

‘밀러/헤이스’는 앞의 가설을 제시한 후에 이를 통해 몇 가지 해석상 난제를 해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제가 보기에 이런 난제들이야말로 ‘여호람’의 공동통치를 지지해주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대하 21장 4절」에는 남왕국 ‘여호람’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이스라엘 방백들’을 죽였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마이어’는 당시 남왕국과 북왕국의 관계 속에서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남왕국에 상주하는 북왕국 관료들이 있었다고 보고, 남왕국 ‘여호람’이 이들을 죽였다고 봅니다(J. M. 마이어, 『역대하』, 국제성서주석 13, 167-9).

하지만 남왕국 ‘여호람’이 남왕국에 상주하고 있던 북왕국 관료들을 죽일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그가 이런 일을 실제로 행했다면, 이는 남왕국과 북왕국의 국제적 문제로 번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열왕기」나 「역대기」에서 두 사람의 ‘여호람’이 통치했던 시기 두 왕국이 대치 상황이 되었다는 언급은 찾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역대하」의 이 본문은 ‘여호람’의 남북왕국 공동통치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보입니다.

또 북왕국 ‘아합’이 속국으로 삼았다는 모압은 남왕국 동편, 사해 건너편에 있습니다. 북왕국이 모압을 속국으로 두려면 요단 동편을 점령하거나 남왕국 영토와 에돔을 지나가야만 합니다.

▲ 8세기 중반 시리아-팔레스타인 ⓒ위키피디아

예전에 살펴보았던 지도인데, 주전 8세기경 팔레스타인 지도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북왕국의 영토가 요단강 동편으로 사해까지 내려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도에 나타난 남쪽 영토 경계는 아마 북왕국 ‘여로보암 2세(주전 785-745년)’ 때의 경계일 것입니다.

「열왕기하 3장」에는 모압의 배반으로 인해 남북왕국과 에돔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모압을 공격하는 내용이 나타납니다. 「열왕기하 3장 8절」을 보면, 북왕국 ‘여호람’은 요단강의 강폭이 좁은 지역을 건너 모압으로 가는 빠른 길을 놔두고 에돔 광야를 지나서 가는 길을 택합니다.

일반적으로 ‘아합’ 통치 시기 북왕국은 요단 동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위의 지도보다 더 북쪽으로 아람에 이르기까지 북왕국의 영토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호람’ 시절의 북왕국이 ‘아합’ 때 만큼은 안되더라도, 위의 지도와 같이 요단 동편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모압 제압을 위해 출발한 연합군이 에돔을 거치는 루트를 선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들이 사해 남쪽으로 돌아서 에돔을 지나가는 길을 택한 이유는 요단 동편이 북왕국의 영토가 아니었기에, 적국에 침공하는 상황에서 강을 건넌다는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즉 ‘여호람’ 시절 북왕국은 요단 동편에 대한 통치권을 거의 상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하 8장 20-21절」에는 에돔이 남왕국 ‘여호람’을 배반하여 남왕국의 수하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데, 에돔을 속국으로 삼았던 왕은 분명 북왕국 ‘아합’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에돔은 북왕국 ‘여호람’의 수하에서 벗어난 것인데, 「열왕기하 8장 20-21절」은 이 왕을 남왕국 ‘여호람’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역시도 ‘여호람’ 공동통치에 힘을 싣는 근거로 보입니다.

「역대하 21장 12-15절」에 나타난 남왕국 ‘여호람’을 향한 예언자 ‘엘리야’의 경고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은 아마도 ‘엘리사’가 잘못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대기」는 북왕국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열왕기」에 비해 북왕국 전승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대기」에는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역대기」에서 예언자 ‘엘리야’의 이름이 등장하는 딱 한 구절이 바로 「역대하 21장 12절」입니다. 이는 역대기 역사가 집단은 어떤 독자적인 자료를 사용하였거나,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입니다. ‘마이어’는 이를 역대기 역사가 집단의 창작으로 봅니다(J. M. 마이어, 『역대하』, 국제성서주석 13, 170).

‘엘리야’의 편지는 이미 시대 설정이 잘못되어 있기에 역대기 역사가 집단의 창작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굳이 북왕국 예언자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이것이 ‘여호람’의 공동통치에 관한 증거는 아닐 수 있더라도, 최소한 후대 역사가 집단이 남왕국 ‘여호람’ 시절 남북왕국의 경계가 모호했음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열왕기하 8장 25-29절」에는 남왕국 ‘아하시야’의 통치 기사가 나타나는데, ‘아하시야’는 1년간 남왕국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이때 1년이 365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때로 왕들의 연대기에서 며칠, 몇 달을 다스린 왕들의 기록이 나타나는데(왕상16:15; 왕하15:8, 13; 23:31; 24:8 참고), 「열왕기」에서 7-12개월간 왕위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어떤 자료를 참고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6개월이 넘으면 1년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남왕국 ‘아하시야’의 통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하 8장 24절」에서 남왕국 ‘여호람’이 죽고 ‘아하시야’가 왕위에 오른 그 해에 북왕국 ‘여호람’이 아람 왕 ‘하사엘’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과 남왕국 ‘아하시야’가 ‘여호람’을 보기 위해 이스르엘로 갔다는 것은 북왕국 ‘여호람’이 남왕국 ‘아하시야’의 아버지였다는 점을 뒷받침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열왕기하 9장 27-29절」을 보면, ‘예후’가 ‘여호람’을 죽인 이후에 남왕국 ‘아하시야’가 이스르엘에서 므깃도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왕국 왕이 자신의 나라인 남쪽을 향하지 않고 이스르엘보다 북쪽에 위치한 므깃도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조금 이상합니다.

마찬가지로 「열왕기하 10장 12-14절」에서 ‘예후’가 남왕국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이스르엘에서 사마리아로 가는 길에 만나 죽였다는 이야기도 위치상으로 이상합니다. ‘예후’는 사마리아를 향해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남왕국의 왕자들이 북왕국 영토 내에 목자가 양털을 깎는 집에 머물고 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의 형제들은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간다’고 말하는데, 병으로 누워있는 북왕국 ‘여호람’이 아니라 왕자들을 만나러 이스르엘로 가는 상황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여호람’이 병상에 오른 후, ‘아하시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거나 섭정 기간을 갖게 한 후 반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상황에 ‘예후’의 반란이 일어났고, ‘여호람’의 자녀들은 북왕국과 남왕국을 자유롭게 오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호람’ 공동통치설 정리

남북왕국 공동통치에 관한 가설은 ‘밀러/헤이스’만 제안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호람’ 뿐만 아니라 몇몇 왕들이 남북왕국을 공동통치했을 것이라는 학설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학설들 모두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많은 학자는 솔로몬 이후로 남북왕국이 공동통치를 이룬 일은 없다고 봅니다. 공동통치에 관한 가설들은 성경 해석의 어려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한 억지라고 보기도 합니다(J. 그레이, 『열왕기상』, 국제성서주석 9, 94-6 참고).

저 역시도 다른 왕들의 공동통치에 관한 가설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호람’의 경우는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학자는 북왕국 ‘아합’ 때에 남왕국은 북왕국의 속국과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이와 동시에 당시 남북왕조의 혼인관계로 인해 두 왕국의 경계가 상당히 허물어져 있었다는 점도 많은 학자가 인정합니다. 분명히 북왕국에서 전승되었을 ‘엘리야’와 ‘엘리사’에 관한 상당수의 자료가 후대 남왕국 역사가들 손에 놓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북왕국을 중심으로 남북왕국의 경계가 허물어진 상황 속에서, 같은 시기에 남왕국과 북왕국을 다스린 왕의 이름이 같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열왕기」와 「역대기」의 본문 속에 공동통치의 전제가 없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호람’의 공동통치 가설을 신빙성 있게 만듭니다.

정리해보자면, 북왕국 ‘아합’이 통치하던 시절, 남왕국은 북왕국의 속국과 다름없는 상태에서 통일왕국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연합국가 체제를 유지합니다. 두 왕조는 혼인 관계를 통해 두 왕조의 결속을 단단히 합니다.

이런 관계가 유지되던 상황 중에 북왕국 ‘아하시야’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죽습니다. 북왕국 왕위가 공석이 되자, 왜인지 알 수 없지만, 남왕국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북왕국의 왕위에 오릅니다.

‘밀러/헤이스’는 ‘여호람’이 남왕국에서 먼저 왕위에 오른 상태였기 때문에 북왕국을 섭정할 수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열왕기하 3장」에 나타난 남왕국 ‘여호사밧’과 북왕국 ‘여호람’의 연합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다른 본문에 나타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오류를 만들 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남왕국 ‘여호사밧’ 때에 그의 아들 ‘여호람’이 ‘아합’의 딸 ‘아달랴’의 남편이자 데릴사위의 자격으로 북왕국의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왕위에 오른 시기는 「열왕기하 1장 17절」의 시점이 아닌 「열왕기하 3장 1절」의 시점인 남왕국 ‘여호사밧’ 18년으로 보입니다.

‘여호람’이 북왕국에서 왕위에 오른 것은 본래 일시적인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북왕국 ‘아하시야’가 죽은 당시에 왕위에 오르기에 마땅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여호람’이 왕위에 올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가 사마리아에서 왕위에 오른 지 얼마되지 않아 남왕국을 다스리던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이 죽습니다. 이때부터 예정에 없던 ‘여호람’의 남북왕국 공동통치가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역대하 21장 4절」에 나타난 ‘여호람’의 숙청 작업, 자신의 형제들과 이스라엘 관료들을 죽인 작업은 예정에 없던 ‘여호람’의 남북왕국 공동통치에 반발하는 이들을 제압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 시스타나 성당벽화 ⓒla Capilla Sixtina(https://lacapillasixtina.es/)

위의 그림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 천장화와 연결된 벽화 중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이라고 적혀진 그림입니다. 왼쪽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여호사밧’일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아이를 셋 데리고 있는 여성이 나타나는데, 그녀는 ‘여호람’의 어머니로 보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여호람’에 의해 자행된 형제 살해 사건을 어머니의 사랑과 상실이라는 주제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후 반란과 역사가의 수정

이렇게 본다면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던 ‘예후’ 반란의 원인 이외에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남왕국 ‘여호람’이 처음 계획에 없던 남북왕국 공동통치를 시작했고, 이로 인해 ‘아합’ 통치 시기와는 정반대로 남왕국이 북왕국을 차지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앞에서 다룬 가설이 사실이라면, ‘여호람’은 남왕국의 군사적 능력을 통해 북왕국을 차지한 것도 아니고, 남왕국의 경제 문화적 기반으로 북왕국을 차지한 것도 아닙니다. 북왕국 ‘아하시야’의 죽음과 차기 왕을 바로 세울 수 없는 북왕국의 상황을 파고들어 왕위를 찬탈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압과 에돔은 북왕국의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빠르게 북왕국의 속국에서 벗어나 독립을 차지합니다. 만약 ‘여호람’이 전쟁에 능하였거나 통치를 원만하게 했다면, ‘예후’ 반란은 실행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람’은 전쟁에 능하지도 못했고, 남왕국과 북왕국 어느 나라도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글 마지막 부분에도 이야기했지만, ‘예후’의 반란에는 왕실을 제외한 내부 결속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결속은 ‘여로보암 2세’ 직전까지도 이어져 북왕국의 전성기를 누리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북왕국 전체가 왕실에 등을 돌린 이유는 남왕국 왕 ‘여호람’이 북왕국을 다스렸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예후’의 반란은 빼앗긴 북왕국 왕권을 되찾기 위한 혁명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밀러/헤이스’는 ‘예후’의 반란이 통일된 남북왕국 전체를 차지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말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으로 보입니다. ‘예후’가 목표로 삼았던 사람들은 북왕국에 거주하며 영향을 끼치고 있던 남왕국 왕과 왕자들이었습니다. 만약 ‘예후’가 남북왕국 전체를 차지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면, 예루살렘에 ‘아달랴’를 살려둘 이유가 없습니다.

북왕국 군부를 비롯한 귀족 대부분이 ‘예후’의 편에 선 상황에서 ‘예후’가 일부러 남왕국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은 그가 남북왕국 전체를 차지할 의도가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만약 ‘여호람’이 한 사람이 맞다면, 「열왕기」나 「역대기」의 역사가 집단이 두 사람의 ‘여호람’으로 기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 시대의 우리가 ‘여호람’에 관한 기록에서 이상함을 발견할 수 있듯이 과거 역사가 집단도 이런 이상함을 감지했거나 어떤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열왕기」의 경우 북왕국 ‘아합’에 대한 반발감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열왕기」는 남왕국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아합’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길을 따랐기 때문에 악했다고 평가합니다(왕하8:18,27). ‘아하시야’의 경우에는 통치 기간이 워낙 짧기 때문에 많은 평가를 할 수 없지만, ‘여호람’ 통치 시기 남북왕국은 분명 쇠퇴기를 겪습니다.

「열왕기」가 수많은 자료를 사용하여 악의 대명사로 지정한 ‘아합’과 친인척 관계로 맺어있으면서 전체 이스라엘의 쇠퇴기를 가져온 ‘여호람’을 통일왕국의 왕으로 그려내기란 열왕기 역사가 집단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역대기」는 기본적으로 「열왕기」를 참고하고 있지만,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역대기 역사도 ‘여호람’을 통일왕국의 왕으로 내세우는 일은 꺼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아합’과의 관계 때문이라기보다 그의 통치 시기가 남북왕국 역사에서 최악의 시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하 21장 20절」은 그가 남왕국 열왕의 묘실에 들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평가는 ‘아하시야’에게서도 유사하게 보입니다. 「역대하 22장 9절」에는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지키지 못했다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이 바로 앞에는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죽임당했을 때, 그를 ‘예후’에게 끌고 갔던 무리가 ‘그는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던 여호사밧의 아들’이라고 말하며 장사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역대기」에서 ‘여호람’은 악한 왕이기에 왕의 묘실에도 들지 못했고, ‘아하시야’는 힘 없는 왕이었기에 ‘예후’에게 죽임당했다고 말합니다. 다만 ‘여호사밧’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섰던 왕으로 그립니다. 그래서 남북왕국 전체를 다스렸던 인물이 ‘여호람’이 아니라 ‘여호사밧’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리하는 역사가 집단에게 있어서 ‘여호람’은 남왕국이나 북왕국 둘 중 한 나라의 왕으로만 있었으면 좋았을 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이룬 것이 없고 잃은 것만 있던 왕이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절의 통일왕국을 재현하기보다 가장 보기 싫은 통일왕국의 모습을 보여준 왕이기에 여러 자료 속에서 보이는 통일왕국의 흔적을 외면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연대 정리

마지막으로 앞의 내용을 기준으로 연대를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추정할 수 있는 연대는 북왕국 ‘아합’이 주전 853년 아시리아와의 전쟁에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아합’을 다룰 때 살펴보겠습니다. ‘아합’이 주전 853년에 왕위에 있었기 때문에 북왕국 ‘아하시야’의 왕위 등극은 그보다 늦은 주전 852년 이후가 됩니다.

남왕국 ‘아하시야’의 경우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그가 죽은 해는 ‘예후’ 혁명이 일어난 시기와 같고, ‘예후’와 ‘아달랴’가 왕위에 오른 시기와 같은 주전 842년입니다. ‘여호람’ 역시 ‘예후’에 의해 죽기 때문에 그가 죽은 해도 주전 842년인데, ‘여호람’의 경우 아람 왕 ‘하사엘’과의 전쟁으로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예후’에게 죽임당하게 됩니다.

‘여호람’이 남북왕국을 분리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에게 남북왕국 통치권을 넘긴 사실은 북왕국에서 혁명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여호람’이 죽기 전에 ‘아하시야’에게 통치권을 넘겼거나 섭정을 요구한 시기도 주전 842년으로 보입니다.

‘여호람’이 남왕국의 왕이 되어 8년간 다스렸다는 「열왕기하 8장 17절」의 진술은 따를만하다고 봅니다. 「열왕기하 3장 1절」은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12년간 다스렸다고 말하는데, 이와 함께 「열왕기하 8장 16-17절」을 생각해본다면, ‘여호람’이 북왕국을 다스린 5년차에 남왕국에서도 왕이 되어 8년간 다스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겹치는 1년을 빼면 12년이 됩니다.

그래서 ‘여호람’의 전체적인 통치 기간은 12년이 맞는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에 말씀드렸던 주전 853년에 ‘아합’이 북왕국의 왕위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지금까지 저희가 정리해온 연대 속에서 12년의 기간이 나오질 않습니다. 최대한 길게 잡아도 10년 밖에 기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예후’ 혁명이 일어난 시점을 2년 뒤로 미루면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이를 수정하게 될 경우에 그 이후 왕들의 연대를 모두 2년 뒤로 미뤄야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결국 누군가의 재위 기간에서 2년을 빼는 결과로밖에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여호람’이 북왕국에서 다스린 전체 기간을 10년으로 보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여호람’은 주전 851년 북왕국에서 왕위에 오릅니다. 2년 뒤인 주전 549년 남왕국 ‘여호사밧’이 죽고 ‘여호람’은 남왕국에서도 왕위에 올라 8년간 남북왕국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다 주전 842년 ‘하사엘’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예후’에 의해 죽임당하게 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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