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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고, 프랑스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을 그리다

기사승인 2019.07.28  17: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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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화가 부셰 이야기(1)

제가 8월에 안식월을 갖게 되어서 8월은 설교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또 제가 자리를 비울 동안을 준비하기 위해서 저희 교회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말씀을 성도님들께 전해드리고 있기 때문에 이 설교문을 게재하는 일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제가 예전에 고등학교 미술 교사인 아내의 협조를 얻어서 정리해봤던 서양미술에 대한 글을 올리려고 합니다. 아무래도 목사이기 때문에 성경 본문도 함께 적기는 합니다만, 꼭 성경과 연결시켜서 보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5 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여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 6 전에 내가 내 백성에게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7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 8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이사야 47:5-8)

로코코 시대

서양미술사에서 바로크(Baroque) 시대 다음을 로코코(Rococo) 시대라고 말합니다. 보통 서양미술사 책을 보면 두 시대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바로크 시대는 화려함과 웅장함을 그 특징으로 하고, 로코코는 섬세함과 화려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둘은 화려함이라는 공통점을 갖지만, 각각 웅장함과 섬세함에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코코 시대의 회화는 어떤 특징을 가졌다고 한정해서 말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와 라그레네(Louis-Jean-François Lagrenée 1724-1805)와 샤르댕(Jean-Baptiste-Siméon Chardin 1699-1779)의 그림은 로코코 시대의 특징인 섬세함과 화려함을 가졌다는 한마디로 묶어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샤르댕은 당시 유행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인물입니다. 라그레네에 대해서는 로코코 화가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고, 로코코 직후의 풍조인 신고전주의 화가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 <레다와 백조> 프랑수아 부셰(1742), <서둘러 떠나는 에오스와 티토노스> 루이 장 프랑수아 라그레네(1763), <아침기도> 장 밥티스트 시에몽 샤르댕(1744)

로코코 회화의 특징이 이렇게 애매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로코코라는 기간이 너무도 짧았기 때문입니다. 로코코 시대가 언제부터 언제까지였는지를 말할 때,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통치 기간(1715-1774)을 말합니다. 회화에 있어서는 와토(Jean Antoine Watteau 1684-1721)에서부터 프라고나르(Jean Honoré Fragonard 1732-1806)까지의 기간으로 이야기되곤 합니다만 이는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기간입니다.

또 잰슨(H. W. Janson)의 서양미술사는 와토가 로코코의 시작이자 완성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와토의 그림을 로코코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저는 조금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와토의 그림이 목가적이고 사랑을 소재로 삼는다는 점에서 프라고나르와 연결되고, 부셰도 이런 주제의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앞서 말한 로코코의 특징과는 조금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와토의 작품은 당시 귀족들의 사치, 향락 풍조일 뿐이었습니다. 이는 프라고나르도 마찬가지입니다.

▲ <사랑의 향연> 장 앙투안 와토(1718-19), <그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67)

여기에서 우리는 로코코의 회화의 특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로코코는 어떠한 시대 정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사치 풍조로부터 유래했습니다. 문화적 풍조 역시도 시대 정신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그저 귀족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하나의 유행이었을 뿐입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보면 바로크와 로코코의 분명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 자체는 바로크 시대에 건축되어 화려함과 웅장함을 잘 보여줍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인기 관광지인 장미정원은 로코코 시대에 만들어졌고, 역시나 화려함과 웅장함을 보여줍니다.

이 둘은 화려함과 웅장함이라는 똑같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크 시대에 건축된 베르사유 궁전 자체는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불특정다수를 향해 표출되고 있는 반면에, 로코코 시대에 만들어진 장미정원의 화려함은 오직 왕족과 귀족들의 파티를 위해서 존재했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그 정원을 구경할 수도 없었습니다. 불특정다수 혹은 대중을 향해 화려함을 표출하던 시기가 바로크라면, 화려함과 웅장함을 귀족들만의 영역으로 한정시키고 자신들만의 가치로 만들던 때가 로코코 시대입니다.

따라서 로코코라는 시대는 프랑스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고 이는 결국 왕족의 몰락과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로코코라는 귀족의 사치 풍조가 프랑스 왕족의 몰락을 낳았을지는 몰라도, 르네상스 이후 이탈리아가 붙잡고 있던 문화의 중심을 프랑스로 옮기는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 <베르사유 궁전 전경>, <베르사유 궁전 장미정원>

부셰가 그린 로코코 시대

로코코 시대가 귀족 중심의 사치 향락의 시기였기에, 당시에 그려진 회화는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부셰는 이 점을 가장 잘 그려낸 화가였습니다. 그렇기에 부셰의 그림들을 통해서 로코코 시대 회화의 단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Jeanne Antoinette Poisson)입니다. 지금도 ‘퐁파두르 헤어스타일’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정도로 그녀는 당시 프랑스 왕실에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고, 후대에도 영향을 남긴 여성입니다. 그녀는 부셰가 그린 초상화를 좋아했고, 그렇기에 부셰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그녀와 루이 15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글에서 하겠습니다. 다만 로코코 회화의 특징을 살피기 위해 부셰가 그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를 살펴볼 필요는 있습니다.

▲ <퐁파두르 부인> 프랑수아 부셰(1750), <퐁파두르 부인> 프랑수아 부셰(1759)

화면을 통해서 볼 수밖에 없기에 그림의 화려함이 다 전해지지는 않지만, 초상화 속에 그려진 그녀의 드레스는 화려함과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또 재미있는 점은 1750년 29세의 퐁파두르 부인의 얼굴과 1759년 38세일 때의 얼굴입니다. 전혀 차이가 없어 보이거나 오히려 어려 보이기까지 합니다. 화가의 자체 ‘뽀샵’이라고 보면 됩니다.

부셰는 당시 귀족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남들보다 더 화려하게, 남들보다 더 젊고 아름답게, 이런 점이 당시 프랑스 귀족들이 원하는 바였고,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는 이를 너무도 잘 보여줍니다.

로코코의 특성을 담고 있는 부셰의 작품 중 더 유명한 작품들이 있습니다. <아침식사>와 <화장>이라는 작품입니다.

▲ <아침 식사> 프랑수아 부셰(1739)

<아침 식사>는 로코코 시대에 변화된 일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직전 시대에 어린 아이들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부모와 함께 살지 않고, 시골에서 유모와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로코코 시대의 아침 풍경은 엄마와 아이들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유모는 그 집에서 함께 아이를 돌봅니다.

뒤편에 있는 남성은 남편처럼 보이지만 남편은 아닙니다. 그는 당시에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초콜릿 배달원입니다. 그가 오른손에 쥐고 있는 은제 주전자에는 뜨겁게 데운 초콜릿이 들어있습니다.

식탁 위와 좌측 선반 위에는 당시 귀족이나 부르주아 계층 사이에 인싸템이었던 중국산 칠기가 놓여 있으며, 중앙 거울 좌측 장식장에도 중국에서 넘어온 인형이 놓여 있습니다. 당시에 중국 물품들은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고, 심지어 중국에 대한 환상까지도 심어주었습니다.

중국에 대한 당시의 환상은 다음의 작품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중국 정원> 프랑수아 부셰(1742)

중국 문화에 대한 당시의 관심, 또는 중국으로부터 넘어온 물건들이 귀족들의 소비향락과 연결되었던 점은 <화장>이라는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화장> 프랑수아 부셰(1742)

여성의 뒤편에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 17, 18세기 중국 물품들에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예술 작품 또는 물품들을 일컫는 말)를 엿볼 수 있는 병풍이 놓여 있습니다. 그녀의 정면, 벽난로 옆에 놓여 있는 물건도 시누아즈리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시누아즈리인 병풍이 그녀의 초상화를 가리고 있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녀의 초상화는 이전의 유행에 따른 작품이었을 것이고, 이제는 유행이 지났기 때문에 병풍으로 가려버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조금 더 흐른다면, 병풍 역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로코코 풍의 초상화가 놓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벽난로 위에 놓인 자기들도 당시의 유행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앞선 <아침식사>에서도 그렇고 <화장>에서도 여인의 눈 옆에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음을 발견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부셰의 작품들을 봤을 때, 그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는데, 얼굴에 점을 붙이는 것도 당시에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시녀는 그녀에게 모자를 보여주며 권하고 있는데, 당시 귀족 여성들이 화장실에서 옷을 입는 시간은 세 시간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이 그림에서 우리는 성적 상징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인의 발밑에 있는 고양이는 프랑스어로 ‘Le Chat(르챠)’인데, 이는 남성명사일 때에 그렇고, 여성명사로 표현하면, ‘La Chatte(레샤트)’가 됩니다. 이는 여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은어이기도 합니다. 영어에서 ‘pussy’가 고양이라는 뜻이지만 여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은어로 사용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림 속에 성적인 내용을 담는 점은 와토의 작품에서부터 프라고나르에 이르기까지 로코코의 특성입니다만, 고양이를 통해 성적인 문화를 표현하는 방식은 부셰로부터 훗날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의 작품 <올랭피아>에 이르기까지 두루 사용되게 됩니다.

부셰는 당시 사회에서 유행했던 소품들이나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구입 된 소품들을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소품들을 상당히 섬세하게 그려내었으며, 그 소품들에 담긴 당시 사람들의 환상까지도 화폭에 담아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로코코 시대를 로코코답게 그려낸 화가였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저 당시의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일만을 하고 있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그려야만 돈이 되기 때문에, 돈 되는 그림만을 그렸던 사람이었을까? 그가 그린 또 다른 작품들, 특히 신화를 그려놓은 작품들을 보면 그가 단순히 현상을 화폭에 옮기지는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그는 당시의 풍경을 그대로 화폭에 옮기면서 이사야가 바벨론을 향해 외쳤던 외침과 같이, 당시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들의 사치와 향락의 풍조를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그들을 향한 최고의 비판이 아니었는가도 생각해봅니다. 이에 대한 작품들은 다음 글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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