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가 말하는 우리 사회가 멈춘 이유
▲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한글 원전과 독일어와 영어 번역판 |
언덕 위 교회에서 사람들이 아래로 내려간다. 십자가를 앞에 들고, 결연한 의지를 보이려는 듯 굳은 얼굴로 간다. 아무리 말해도, 옷자락을 붙들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눈물이 흐르고, 외치고 발버둥 쳐도 사람들은 교회 아래로 내려갔다. 알 수 없는 그곳을 향해 내려갔다.
꿈에서 깼다. 울부짖었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가슴이 두근댔다. 수년 전의 경험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들은 어디를 간 것일까. 나는 왜 그들을 그토록 막았으며 그들은 왜 나를 무시하며 간 것일까. 그런데 나는 왜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을까.
보통 사람은 잠을 자는 동안 여러 번 꿈을 꾼다고 한다. 그중 기억에 남는 꿈만 기억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꿈의 내용은 기억에 남아도 감정과 신체 반응이 남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꿈을 깬 이후에 눈물을 흘렸고, 얼마나 슬펐던지 심장도 한동안 두근거렸다. 그 무렵, 내가 본 것은 무엇일까. 또 내가 경험했던 것은 무엇일까. 어떤 나의 무의식이 이런 장면을 연출했던 걸까. 한동안 이 꿈을 해석해 보려고 애썼다. 교회 안에 있지만 나와 다른 뜻을 지닌 사람들을 막으려는 혹은 설득하려는 나의 무의식이었을까. 그때 경험은 매우 강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옅어져 갔다.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이 꿈이 소환되었다. 혹시 그들이 가려는 곳이 내가 생각하기에 위험한 곳은 아니었을까. 사랑하는 이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가려는 걸 내가 막았던 걸까. 다시 슬픔이 왔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그들을 막지 못했던 걸까. 왜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걸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정부에서 정한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참혹했던 일에 대한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은 ‘광주 5월 항쟁’이라는 이름이 더 정확한 느낌을 준다. 《소년이 온다》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인물은 ‘광주 5월 항쟁’의 당사자다. 누군가의 친구고, 누군가에게 빵과 음료수를 챙겨줬던 사람이며, 누군가와 함께 도청에 남았던 사람들인 동시에 누군가를 도청에 남지 말라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반란군이 항쟁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학살했을 때, 어떤 이는 죽었고, 또 어떤 이는 살아남았지만, 큰 충격에 빠졌다.
사실 충격이라는 표현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거부할 정도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네가 죽은 뒤에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라는 이 한 문장이 살아남았던 이들의 마음을 대신한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이들에게 삶과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죽은 이들은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고, 살아남은 이들 역시 눈만 떴을 뿐,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삶 전체가 장례식이 되었으니, 삶의 무엇이 가능했을까.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그린 영화 ‘고지전’의 한 대사가 떠올랐다. ‘사실 난 예전에 ○○에서 죽었던 게 아닐까. 근데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지옥에 가야 되는데,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 없어서 여기 살아있는 게 아닐까.’ 학살이나 전쟁 같은 참혹한 사건으로 인간성이 상실된 사람에게 다른 삶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운동’이라는 말은 그 참상을 담기에 너무 온화하고 부드럽다.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그 일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강경했으며 참혹했기에 우리는 이 일을 다른 표현으로 기억해야 하는 것 아닐까.
소설은 있을 법한 이야기이면서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이야기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고, 이야기보다 더 참혹했던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사실을 기록한 역사책만큼 의미가 있다. 그 의미는 책을 읽는 곳이 2024년 대한민국인지, 1980년 광주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데서 드러난다. 내가, 아니면 가족의 누군가, 친구의 누군가, 이웃의 누군가가 이런 참혹한 일의 당사자가 됐다면 하는 상상만으로도 깊은 슬픔에 빠지게 만들었다.
“가지 마세요. 제발요. 가면 죽어요. 살아야 해요. 살아서 좋은 날을 봐야죠.”라는 생각이 그들을 막지 못했던 건 그것이 과도한 욕망이어서였을까. 결코 가질 수 없는, 아니 가져서는 안 되는 축복이어서였을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그 바람이 왜 그들에겐 허락되지 않은 희망이 된 걸까. 그 순간 예전에 꾸었던 꿈이 겹쳤다. 꿈을 해석할 때 가졌던 궁금증 중에 풀리지 않았던 건 왜 나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인간으로 살기 위해 선택한 그 길을 나는 왜 가지 않았을까. 내가 욕망과 축복만을 바랐기 때문이었을까.
법정 앞에 선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순간 부끄럽고 우울해졌다. 나는 왜 인간의 존엄을 거부하고 욕망과 축복만 바랐던 걸까. 그런데 동시에 과연 이 정도의 욕망과 축복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죄인이 되어야 한다면 이 상황은 정상적일까 싶었다.
지금 2024년의 내가 누리는 삶은 그들에게도 당연히 허락됐어야 했다. 친구와 함께 학교에 가고, 동생을 공부시킨 뒤에 자기가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누구나 원했을 삶을 자유롭게 살았어야 했다. 그래서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누군가로 함께 살아가고 있어야 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을 거부하면서 얻어야 할 가치가 아니라 노력하지 않아도 누릴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비극적이게도 1980년 5월 광주에 살았던 이들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에 죽음까지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광주 5월 항쟁’ 이후에 살아남은 이들은 이미 죽은 상태로 살 수밖에 없었고 다른 누군가는 죽음을 각오한 상태로 살아야 했다. 그래서 지금 나(우리)는 2024년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시계는 1980년 5월에서 멈춰져 있다.
멈춰버린 그 시계를 다시 돌려야 하지 않을까. 시계를 돌리려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있게 한 ‘광주 5월 항쟁’을 숭고하게 기리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직도 불의한 욕망으로 가득 찬 살인마의 후예들이 피비린내로 점철된 그들의 죄악을 반성하지 않고 불의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성공한 반란은 혁명이라며 숭고한 항쟁을 욕보이고, 결과가 좋다면 과정이야 어찌 됐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1980년 5월 이후 이 나라는 발전했는지 모르겠다. 정치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 잡았고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의식은 1980년에 멈춰 있다. 인간답게 살려면 여전히 불의함을 견디거나 투쟁해야 한다. 이는 근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불의를 덮고 모른척하며 그로 인한 희생을 무시했던 결과다. 멈춘 우리의 시계를 돌리려면 ‘광주 5월 항쟁’을 기억해야 하며 그 숭고한 항쟁의 정신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못했던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에 공감하고 지지하며 연대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언젠가 우리 혹은 우리의 후손들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지 않을까.
허준혁 목사(한남교회)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