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9 광화문 시위 사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묻다
▲ 한신대 민주화운동 50주년 기업사업회 이광일 회장과 1974년 10월 29일 광화문 시위 사건에 참여한 오용식 목사는 입을 그 당신 한신대의 저항정신을 증언했다. ⓒ이정훈 |
오는 10월 29일(화), 수유동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한신대 민주화운동 50주년 기념 행사”가 진행된다. 1974년, 유신헌법의 폭압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쳤던 한신대 학생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는 자리다. 그런데 왜 10월 29일일까? 1974년 이전에도 당시 한국신학대학은 여러 모양으로 이미 민주화운동에 깊이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국신학대학을 낳는데 산파 역할을 했던 장공 김재준 목사교수는 재야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있었던 민주화운동의 가장 큰 축이었다. 장공 선생의 이러한 모습을 기억한다면 무엇인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기념행사이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한신대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회장 이광일 목사와 1974년 10월 29일 광화문 시위 현장에서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던 오용식 목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고 있었던 이광일 회장. 오로지 민주화 운동의 한 켠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광화문 시위에 참여한 오용식 목사. 이들이 전하는 그날의 모습을 소개한다. |
한신대 민주화운동 50주년 기념행사의 의미
이광일 목사가 생각하는 이번 행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번 행사는 1974년에 있었던 광화문 시위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당시 한신대 학생들이 서울 광화문에서 반독재 시위를 벌였던 사건은 시대와 사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촉구하는 상징적 순간이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체포되고 구속당하는 위험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싸웠죠. 그래서 이번 50주년 행사는 그날의 역사를 기리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기고, 미래 세대에게도 그 정신을 전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용식 목사 역시 이번 행사의 의미에 깊이 공감하며 당시 한신대의 상황을 회상했다.
“1974년은 유신헌법이 발효된 후 그 부당함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학교 안팎에서 이어지던 해였습니다. 한신대는 단순한 학생운동의 영역을 넘어,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유신체제에 저항하며 연대한 상징적인 공동체였죠. 김정준 학장님을 비롯한 교수님들은 삭발과 단식으로 학생들을 지키려 했고, 제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끝까지 보호하셨습니다. 이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의미를 가지며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입니다.”
10월 29일, 왜 기억해야 할까
그렇다면 왜 10월 29일까? 이광일 목사는 10월 29일을 기념하는 이유에 대해 “10월 29일은 한신대 학생들이 광화문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웠던 역사적인 날입니다. 이 날을 기리며 당시의 투쟁과 정신을 오늘날에도 기억하고 이어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오용식 목사는 “10월 29일 광화문 시위는 단순한 학내 투쟁이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서 유신체제와 언론 탄압에 반대해 공개적으로 저항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저도 새벽에 기숙사 지하실을 통해 몰래 나와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서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한신대가 그날 도심에서 시위한 것은, 사회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사건이었으며 이후 다른 대학과 사회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라고 덧붙였다.
10월 29일, 그날의 기록
오용식 목사는 당시 시위를 결정하게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선배들은 기숙사에 모여 토론을 했을 것입니다. 학내에서 계속 투쟁할 것인지, 외부로 나가야 할 것인지 등을 논의했겠지만, 당시 감시와 미행이 심했기에 공개적인 논의는 불가능했습니다. 기숙사 내부에서 몇몇 그룹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빠른 시일 내에 하나의 생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새벽같이 지하실을 통해서 나가기로 한 것입니다. 정문으로 나가면 발각될 위험이 있었기에, 아무도 모르게 캄캄할 때 그룹별로 기숙사 지하 보일러실을 통해 우이동 대로변으로 나와 광화문을 향해 이동했습니다.”
▲ 이광일 회장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민주화운동의 흐름 속에 10.29 광화문 시위 사건을 위치시켰다. ⓒ이정훈 |
새벽의 탈출, 그리고 짧지만 강렬했던 시위
오용식 목사는 시위 당일 새벽의 긴박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당일 날씨는 쌀쌀했고, 바깥에서 거리 시위를 한다는 것이 낯설었지만, 선배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구속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는 의로운 일에 동참한다는 기대감이 더 컸습니다. 6~7명 정도의 선배들과 함께 서울 시내에 일찍 도착하여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영민 목사님이 운영하시던 커피숍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차를 마시고 광화문 네거리로 이동하여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종로 쪽으로 스크럼을 짜고 100여 미터 정도 전진했을까요, 경찰들이 나타나 선두는 연행하고 해산시켰습니다. 경찰차에 실려 가는 순간에도 뒤따라오던 학생들이 차에 올라타는 등 격렬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10여 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제가 맨 앞에 있더군요. 1학년 학생들이 많이 참여했는데, 그 사건으로 8명의 선배 중 1명이 구속되고 6-8명은 불구속, 36명이 20일 구류를 살았습니다. 저는 동대문서에서 20일 동안 보리밥을 먹으며 지냈습니다. 삭은 보리로 만든 밥이었지만, 배고픔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광일 목사는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있어 광화문 시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목사는 “광화문 시위는 한신대에서도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40명이 잡혀갔다가 풀려났습니다. 한신대 출신들은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특공대 같았습니다.”라며 당시 학생들의 용기를 회상했다.
20일의 구류, 그 속에서도 피어난 연대
스크럼을 짜고 단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오용식 목사를 비롯 한신대 학생들은 체포되었다. 오 목사는 그렇게 체포되어 20일간의 구류 생활을 고통스럽게만 기억하지 않았다.
“20일의 구류 기간 동안 춥고 힘들었지만, 고통스러웠던 것만은 아닙니다. 장기자랑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4학년 김성환 형님과 김윤규 목사님의 노래 실력이 뛰어났던 기억이 납니다. 도둑놈, 사기꾼, 몸 파는 여성들과 함께 생활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방은 따로 사용했지만, 서로 소통이 가능한 구조였습니다. 처음에는 강압적인 분위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경찰들과 눈치껏 지내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저녁에는 경찰들이 퇴근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습니다. 가혹 행위는 거의 없었지만, 찬 마룻바닥에 앉아 지내야 했던 것은 고통스러웠습니다.”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저항 의지
10.29 광화문 시위 사건으로 정권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오용식 목사는 그럼에도 “학생들과 교수들이 저항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당시 경찰은 학내뿐 아니라 교회와 교회 주변에서 학생들을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종로, 동대문 등지에서도 수시로 학생들의 활동을 지켜보며 통제를 했습니다. 학생들과 교직원이 어떤 활동을 하든 경찰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학생들과 교수님들은 한마음으로 저항 의지를 다졌습니다.”
20일의 구류 생활 이후, 오용식 목사는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학교는 예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20일 구류 이후 학교로 돌아왔지만, 학교 분위기는 더욱 경직되었습니다. 감시와 탄압이 심해졌고, 학생들의 활동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광일 목사는 당시 한신대가 어려움 속에서도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실을 강조했다.
“한신대는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들을 받아주었습니다. 물론 문교부에서 압력을 넣어 결국 선교교육원을 만들어 제적자들을 보냈지만, 한신대는 끝까지 학생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선교교육원은 서울 시내 학생들의 집결지였습니다. 거기에서 많은 일들이 시작됐습니다. 전교조도 거기 출신들이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일을 합니다. 열정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오용식 목사는 학생수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기장 교단과 한신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던 저항정신이 10.29 광화문 시위 사건을 가능케했다고 증언했다. ⓒ이정훈 |
기독교 신앙,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버팀목
그렇다면 한신대 학생들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광일 목사는 기독교 신앙이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을 위해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신앙적 가치가 저에게는 가장 큰 동력이었어요. 물론 사회과학적인 이해와 의식화도 필요했지만, 신앙이 없었다면 이 길을 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고난받는 사람들,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용식 목사 또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저 또한 신앙적 가치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교회 청년연합회가 기독교 청년들에게 사회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신앙적 가치를 깨우쳐 주었죠. 그 안에서 우리 학생들은 스스로가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한신대의 민주화운동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한국 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과도 연결되며, 신앙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50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그날의 의미
이번 50주년 기념행사는 단순히 그날의 사건을 회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용식 목사는 광화문 시위가 자신에게 여전히 중요한 의미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광화문 시위 당시, 비록 경찰에 의해 시위가 빨리 중단됐고 저도 체포되었지만, 선배들과 함께 도심에서 언론 자유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는 사실이 지금도 자랑스럽습니다. 그날의 짧은 순간이지만,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 속에 깊은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이광일 목사는 한신대에서의 경험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저는 한신대에서 신앙뿐 아니라 사회 문제와 역사적 의식을 함께 배웠습니다. 한신대는 선후배 간의 토론과 배움을 통해 신앙적, 사회적 의식을 키우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경험이 졸업 후에도 사회 정의와 인권을 위한 활동을 지속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신의 정신, 미래를 향한 희망의 빛
이광일 목사는 한신대의 정신이 미래 세대에게도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한신대의 정신이 한국 교회와 사회에 더욱 큰 변화를 일으키기를 바랍니다. 이번 50주년 행사가 그 중요한 정신을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용식 목사는 한신대의 민주화운동 전통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한신대의 민주화운동 전통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신앙적 뿌리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기후 위기, 사회 불평등 같은 문제에 맞서 이 정신이 살아 있는 에너지가 되어주길 희망합니다.”
이정훈: 오늘 인터뷰 감사합니다.
이광일, 오용식: 감사합니다.
저항정신이 더욱 필요한 순간을 맞이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한신대의 민주화운동 정신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준다. 특히 정권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학내 투쟁이 벌어지던 당시, 학내를 빠져나와 도심 한복판에서 진행된 10.29 광화문 시위 사건은 한국 사회와 민주화운동을 이어가고 있던 각 대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는 민주화라는 시대적 사명을 위해 목숨도 아까지 않았던 저항정신의 표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저항정신이 오늘날에도 필요할까? 제도적 민주화 뿐만 아니라 삶의 민주화가 뿌리 내리고 있는 오늘 한국 상황에서도 필요할까 하는 물음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가 될 것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불의와 부정의, 민주화되지 못한 모습과 마치 독재가 되살아난 것 같은 이 상황은 이러한 저항정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번 행사는 사건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정신을 소환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이정훈 typolog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