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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창조 공동체의 이념2: 거류하는 객과 잃은 양에 대한 염려

기사승인 2024.10.18  05: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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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절 여덟째 주일(신 26:1-11; 고후 11:16-30; 눅 15:1-7)

1. 『참 아름다워라: 창조절 13개 주제별 성구해설집』

오늘은 창조절 여덟째주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계속해서 창조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창조절을 지킵니다. 유럽기독교환경연대(ECEN)와 캐나다연합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를 비롯한 전 세계 에큐메니컬 진영은 개정공동성서정과(RCL, Revised Common Lectionary)를 공통으로 사용하는데, 기독론 중심인 RCL은 창조절기가 없습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이 기후정의에 관심을 두고 창조절을 재정, 혹은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 『참 아름다워라』 표지와 창조절 주제별 성서일과

최근 호주의 ‘창조절기(Season of Creation)’ 에큐메니컬 그룹은 3년 주기의 창조절 성서 일과를 숲, 땅, 동물, 바다, 하늘, 광야 등 자연을 부분별로 구분하여 이와 관련된 세 본문과 시편 본문을 선정하였습니다. 이번에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는 호주의 창조절기 에큐메니컬 그룹의 체제를 참조하여 더 적절한 성서 본문을 찾아 3년 주기가 아닌 13가지 주요 생태 관련 주제로 『참 아름다워라: 창조절 13개 주제별 성구해설집』(ITS, 2024)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 순서에 따라 13가지 주제로 창조절기 성구해설집을 만든 것입니다(해설집이지만, 세 본문 설교도 가능합니다). 저는 해운대와 광안리 바다가 있는 부산에 살기에 ‘바다’를 맡았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창 1:31)이 창조의 기원과 토대이며, 목적이건만, 그 세계가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서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롬 8:22). 따라서 목회와신학연구소 집필진은 이를 통탄하며 다시금 창조 세계 질서 보전을 고민하며 해설집을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무뿌리에 도끼가 놓여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돌아보면 지구 생명공동체는 매우 위태롭습니다. 이 책 머리말에서 목회와신학연구소 최영 소장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원유와 화학 폐기물 누출, 지구온난화와 빙하의 급속한 해빙, 오존층 파괴와 산성비, 대기와 하천과 토양의 오염, 열대 우림 지역의 심각한 파괴, 수많은 생물 종들의 멸종, 기후 위기로 인한 폭염, 폭우, 가뭄, 산불 등. 지구를 파괴하고, 그 행성 위에 거주하는 생명체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이런 재난들은 끝도 없이 이어지며 긴 목록을 작성 중이다.”

비극적 전망은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마지노선으로 정한 2050년에, 결국 인류는 2˚C 기온 상승 저지에 실패하고 문명의 종말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새로운 창조 공동체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이 종말은 급속도로 진행될 것입니다. 최영 소장님은 이를 선교적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부재, 이른바 ‘궐위의 시간(interregnum, 최고지도자 부재 기간)’이란 있을 수 없다. 세상의 창조자와 화해자이시며, 약속대로 세상을 갱신하고 완성하실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세상을 통치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요 10:10). 오늘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이 풍성한 생명을 세상에 알리고, 생명 살리는 일에 나서야 할 선교적 사명이 있다.”

2.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구 열난화와 생태계 파괴의 시대에 창조절을 지킴으로 한국교회가 기후정의를 실천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창조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역시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새로운 창조 공동체의 이념’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새로운 창조 공동체의 이념 첫째 시간으로 ‘올바른 정의’와 ‘참된 경건’ 그리고 ‘진정한 회복’에 관해 살펴보았는데, 이번 주는 ‘약자 보호’에 관한 이념입니다.

구약의 말씀은 십일조와 첫 열매에 관한 규정이지만, 이 예물을 레위인과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거류하는 객은 나그네죠? 요즘 말로 하면 난민입니다. 이렇게 약자와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새로운 창조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죠?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음식을 먹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근거립니다. 그러나 잃은 양 한 마리 비유를 통해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기뻐합니다. 여기서 죄인은 당시 유대교 시스템에 의해 소외된 약자들입니다. 결국 이러한 약자들과 연대를 선언한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 때문입니다. 이것이 약한 자들과의 연대입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그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신 26:1-4)

▲ 첫 열매 감사

십일조와 첫 열매에 관한 규정이죠? 모세는 히브리 백성이 가나안 땅에 입국하여, 첫째 소산물을 얻으면 그 첫 열매를 감사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방랑하는 사람으로 애굽에 소수로 거류했으며 또 압제당할 때 택하신 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신 26:5-9)

이렇게 구원받은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신 이유를 깨닫고 새로운 창조 공동체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들 가운데 거류하는 객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신 26:10-11)

여기 레위인은 땅을 몫으로 받지 못한 이들이죠? 객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약자 보호입니다. 이것이 복음서에는 잃은 양의 비유로 나오죠?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3.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눅 15:1-6)

▲ 잃은 양 찾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하고 식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빈정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회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그런데 가만히 보면, 누가복음 15장은 모두 잃은 것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 비유(1-7)’,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8-10)’, ‘잃었던 한 아들을 찾은 기쁨 비유(11-32)’입니다. 첫 번째 비유인 잃어버린 양 비유는 마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만(18:12-14),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와 ‘돌아온 탕자’ 비유는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말씀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죠? 이렇게 예수님은 잃은 것에 관해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리고 잃은 것은 어쩌면 나약하고 버림받고 소외된 것의 다른 이름입니다.

4. 동물 착취(육식)는 다수자의 소수자 폭력이라는 사회적 지배 체제에 다름 아니다!

잃은 양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금 약자는 동물입니다. 앞서 기후 위기를 말씀드렸는데, 여기에 육식도 문제가 됩니다. 사실 이상기후의 주범으로 육식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소고기입니다. 소는 되새김질을 하면서 메탄가스를 발생시킵니다(90% 이상을 트림으로, 나머지 10% 미만은 방귀로 배출). 메탄가스는 온실효과가 아주 심각합니다. 대기 중의 열기를 가두는 효과가 이산화탄소보다 80배 이상이라고 합니다.

▲ 이상기후의 주범인 육식(특히 소고기)

소 한 마리가 트림이나 방귀로 하루에 배출하는 메탄가스의 양은 최대 500ℓ 소형차 한 대의 1일 배출량과 맞먹습니다. 이렇게 소를 비롯한 전 세계의 가축들이 배출하는 메탄가스는 온실가스 중 18%에 이릅니다. 모든 교통수단에서 배출되는 가스(13.5%)보다 높은 수준입니다. 자동차를 안 타는 것보다 소고기를 안 먹는/줄이는 것이 지구온난화 현상을 막는다는 말입니다. 통계를 보면, 소처럼 되새김질하는 가축의 수는 2014년 32억 마리에서 2023년 280억 마리까지 늘었습니다. 엄청납니다. 9년 새 9배 이상 육류 소비를 늘린 셈입니다. 그런데 TV 방송은 너도, 나도 먹방을 통해 고기의 육질을 보여줍니다. 육식을 장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을 고기로 보지 않고, ‘동물인 타자’로 보는 것이 가능할까요?

▲ 철학자 자크 데리다와 고양이

해체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말년에 매달렸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동물’에 관한 사유입니다. 데리다는 「‘잘 먹어야 한다’ 또는 주체의 계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동물과 인간 사이의 구별은 하이데거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엄격하다. 동물은 결코 주체일 수도, 현존재일 수도 없다. 동물의 얼굴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레비나스), 동물은 무의식을 갖지도(프로이트), 타자로서의 타자에 대한 관계를 갖지도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데리다가 샤워 후, 밖으로 나온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에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물론, 메를로퐁티는 인간은 동물의 시선 앞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지만). 따라서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에서 데리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것은 동물의 집요한 응시 앞에 발가벗은 채, 진실한 모습으로 서는, 이 곤란한 만남의 원초적인, 단일하고 비교 불가능한 경험이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선악을 아는 지혜를 깨닫게 되어 자신이 발가벗었음을 알고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철학적으로, 아니 문화적으로 인간은 옷을 만들어 입음으로 동물과 구별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데리다에 의하면 ‘발가벗음’은 양가성을 생산하는데, 곧 ‘문화 속의 인간/자연 속의 동물’이라는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늘 그렇듯이, 데리다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 / ’을 해체합니다. 이것은 로고스 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인간 이성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은 이성을 지니지 못한 존재이기에 동물은 소유의 객체일 뿐 어떠한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기계와 같다고 말하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데리다는 동물이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동물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환대’를 베풀 대상을 동물까지 확장합니다. 이것이 데리다의 ‘동물 타자를 대하는 기본 윤리’입니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동물에게 아픔이나 두려움의 감정이 존재함을 매시간 목격할 수 있으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들이 느끼는 불안, 슬픔과 같은 연민에 반응해야 한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타자와의 경계를 흐림으로써, 동물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동물로 향해야 한다.”

이렇게 동물 윤리는 사회적 지배체제 해체까지 나아갑니다. 사실 데리다는 동물 착취의 현실 안에서 다수자의 소수자 폭력에 의한 사회적 지배체제에 대한 문제를 강조합니다. 새로운 창조 공동체는 이렇게 폭력의 상황에 직면하여 고통, 연민, 동정과 같은 파토스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거류하는 객뿐만이 아니라, 동물의 신음, 나아가 모든 피조물의 신음까지입니다.

5.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이렇게 우리는 약자의 개념을, 인간을 넘어 모든 피조물까지 확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약한 자에게 긍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약점을 가진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인 고린도후서 마지막 구절을 볼까요? 공동번역 말씀으로 보겠습니다.

“이런 일들을 제쳐놓고라도 나는 매일 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우가 허약해지면 내 마음이 같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어떤 교우가 죄에 빠지면 내 마음이 애타지 않겠습니까? 내가 구태여 자랑을 해야 한다면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 (고후 11:28-30)

물론,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이 진정한 사도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이 당한 고난과 수고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의 발로입니다. 나아가 약한 자들에 관한 관심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거듭 말해 두지만 아무도 나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만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되거든 그런 사람으로 쳐주어도 좋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좀 자랑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주님의 명령을 받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렇게 장담하며 자랑하는 것은 내가 어리석어서 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속된 것들을 가지고 자랑을 하고 있으니 나도 자랑해 보겠습니다. 그 어리석은 사람들을 그렇게도 잘 받아주니, 여러분은 어지간히도 똑똑합니다! 누가 여러분을 종으로 삼아도 그만, 잡아먹어도 그만, 착취해도 그만, 깔보아도 그만, 뺨을 쳐도 그만, 여러분은 그저 참아주기만 하니 말입니다. 부끄럽게도 나는 너무 약해서 그런 짓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무슨 자랑을 한다면 나도 그와 똑같은 자랑을 해보겠습니다. 이것은 물론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라 치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들입니까? 미친 사람의 말 같겠지만 사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는 그들보다 낫습니다.”(고후 11:16-23a)

바울은 자랑하는 것을 꺼리지만, 고린도 교회가 거짓 사도들에 쉽게 현혹되는 것을 보며, 자신도 어리석게 자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고난을 통해 자신이 진정한 사도임을 보여주려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에 충실했음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자기를 비난하는 것에 대해, 그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혈통, 신앙적 배경, 그리고 사역 경험에서 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추구하는 반면, 바울은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희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많은 고난을 나열합니다.

“나는 그들보다 수고를 더 많이 했고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도 없이 맞았고 죽을 뻔한 일도 여러 번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고후 11:23b-27)

▲ 틴토레토 <성 바울의 순교>(1556년경)

이러한 고난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했는지를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해 왔으며, 이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사도직을 확고히 하고자 합니다. 결국, 바울은 자랑이 아니라, 자신이 겪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거짓 사도들과 달리 진정한 사도임을 증명하려 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새로운 창조 공동체를 위한 바울의 염려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허약한 자, 죄에 빠진 자에 대한 애타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바울의 애타는 마음이, 또한 예수님의 긍휼하신 마음이, 그리고 모세의 권면이 거류하는 객과 잃은 양과 같은 약자 보호인 것을 깨닫고 그 약한 자의 범위를 날마다 넓혀가며 새로운 창조 공동체를 만들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종교인문학연구소 소장)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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