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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젝트의 속성과 종교/예술

기사승인 2022.07.21  15: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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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스러운 체액’과 아브젝트(Abject) ⑺

▲ Art by Loren Crabbe, from the series “Purging Abjection.”

양가성/이중성/모호성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를 단순히 기피의 대상으로만 개념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양가성’ 혹은 ‘이중성’을 아브젝트의 주요 속성으로 제시하는데, 여기서 이중성이란 이분법의 경계가 불명확해지거나 해체되는 상태를 가리킨다.(1)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아브젝트가 끊임없이 분리되나 결코 완전히 제거되지 않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아브젝트는 주체와 개체, 안과 밖이라는 이항 대립으로 환원되지 않기에, 주체로부터 분리되고 경계에서 제외되어도 결코 완벽하게 제거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브젝트는 무의식 속에 남아 끊임없이 주체를 위협하면서 정체성을 비롯하여 기존 체제/질서/법칙과 이성적 사고를 어지럽히는 전복적인 요소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브젝트는 상징계 혹은 기성 질서가 요구하는 적합한 것과 부적합한 것, 질서와 무질서, 청결한 것과 불결한 것 등의 명확한 구분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아브젝트의 양가적 성격이 뚜렷한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의 몸으로, 후자는 삶과 죽음을 제공하는 존재이자 숭배와 공포의 대상이라고 말한다.(2)

또한 아브젝트의 양가성은, 미학적으로 작동될 때, 혐오스러우면서 동시에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것에도 확인된다고 한다.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가 지닌 이러한 혐오와 매혹의 양면성을 그녀의 책 서두부터 강조하고 있다. 즉 아브젝트를 자신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주관적인 정체성의 발달과 자아가 존재하는데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원래 자신을 지탱해 주던 모성적 풍요 혹은 원초적인 일체성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상실을 의미하여, 이 상실감이 아브젝트의 매혹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브젝트의 매혹성은 자신의 정체성이 소멸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가장 원초적인 생명과 다시 하나가 되려는 인간의 욕망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

전복성/혁명성/저항성

무엇보다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가 내재한 체제전복적인 힘을 강조한다. 그녀에 의하면 아브젝트는 완벽하게 제거되지 않고 주체의 정체성과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지만, 사회의 권력 체계와 폐쇄적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우리 안의 아브젝트, 즉 이질적 타자성의 수용이야말로 주체의 변화에 필수적인 요건임을 강조하며, 아브젝트를 억압하기보다는 적절하게 받아들일 것을 조언한다.(4) 한편 아브젝트의 전복성은 그녀가 아브젝트의 양가성을 서구의 이분법적/이원론적 체계를 해체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5)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의 전복적인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그녀가 의미화 과정의 커다란 두 축으로 상정한 기호계(the semiotic)와 상징계(the symbolic)에서, 아브젝트를 전자에 포진시킨다. 그녀에 의하면 모든 의미와 주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 기호계와 상징계 사이의 끊임없는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통한 의미화 과정 중에 형성된다고 한다. 여기서 상징계는 사회에 자리 잡은 체제 혹은 확립된 규제 체계이며, 기호계는 의미생산 이전의 전(前) 언어적 세계로–유아 심리에서 (타자성을 습득하는) 거울단계 이전 어머니의 몸과 연관된 전(前) 오이디푸스 단계로-예술의 표현양식인 무의식과 몸의 언어가 여기에 속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크리스테바는 기호계는 예술과 같은 비이성적 담화를 통해 표현되는 전복적이고 폭발적인 힘을 가지면서 상징계의 질서에 도전하고 균열을 가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예술작품은 상징계를 차단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6)

크리스테바의 기호계-상징계 도식은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Jaques Lacan)이 제시한 상상계와 상징계의 개념을 수용하되, 상상계의 역할을 보다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7) 이를 위해 크리스테바는 상상계(the imaginary) 대신 기호계(the semiotic)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해당 차원의 고착되지 않은 자유로움과 창조적 힘을 극대화하여 제시한다. 따라서 기호계는 크리스테바의 가장 특징적인 개념 중 하나로 상징계(the symbolic)의 규율로는 기술할 수 없는 영역으로, 주체와 사회의 한계를 확장하고 출구의 가능성을 제공하여 주체와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는 혁명적 힘을 발휘하며, 동시에 (사회의) 강제적인 질서를 해체함으로써 무법적 윤리를 끌어낸다는 것이다.(8) 여기서 대표적인 아브젝트인 유출된 체액은 인간이 주체가 되기 위해 배제한, 그러나 주체도 객체도 아닌 이 둘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것들로 상징적 질서에 저항함으로써 질서의 전복을 시도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브젝트는 정결하고 문명화된 몸에 대한 저항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9)

숭고함/성스러움

더 나아가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가 숭고함(the sublime) 그리고 성스러움(the sacred)과 일련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아브젝트와 숭고함은 무제한적이고 무정형적이며 예측할 수 없기에 위협적이라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며, 아브젝트는 공포스럽고 역겨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승화되면’ 미학적 측면에서 숭고함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녀에 따르면 숭고한 대상–예, 파괴적인 태풍이나 화산 같은 비합리적인 자연-은 유한한 인간이 알 수 없는 절대적 타자로, 그 크기와 힘을 상상할 수 없어 공포를 유발한다고 한다. 이렇게 숭고함은 힘과 위대함을 갖고 있기에 장엄함(the magnificent)으로 다가오면서 공포, 흥분,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숭고함은 감탄과 존경, 그리고 신성함과도 밀접하게 관련되면서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고 한다.(10) 한편 크리스테바는 성스러움(the sacred)을 동물과 언어적 존재의 사이, 자연과 문화 사이, 감각되는 것과 이름 지은 것 사이의 경계선에 있다고 말하면서, 성스러움을 경계를 넘나드는 모호한 성질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 그녀는 성스러움을 부정(不淨)의 공포스러운 힘과 연결 짓는데 이는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11)

크리스테바의 숭고함과 성스러움에 빗댄 이러한 아브젝트 기술은 루톨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가 ‘성스러움(die Heilige; the holy)’의 비합리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두렵고도 매혹적인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로 정의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를 ‘숭고함’과 ‘성스러움’에 연결하고 있지만, 이들 개념을 직접적으로 ‘종교(성)’와 연결하는 데는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성스러움은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과 같지 않을 수 있으며, 성스러움은 (종교)제도가 선전하는 보호와 전능을 향한 종교적 욕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한다.(12) 여기서 언급할 것은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 논의에서 종교는 처음부터 주요 관심사가 아니며, 그녀의 종교에 대한 시각 또한 기독교를 토대로 일부 교리/개념 – 죄, 죄책감, 희생 등 – 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녀의 ‘종교’에 대한 시각은 매우 주관적이고 편향적이며, 이에 상응하여 아브젝트 논의에서 ‘종교’의 의미와 역할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거나 축소되어 있다.

아브젝트의 처리: 종교 vs 예술

크리스테바는 종교, 도덕,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코드들은 아브젝트를 정화하고 억압하는 기구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녀는 모든 종교의 특징은 아브젝트를 정화시키는 의식과 그것을 통한 다양한 카타르시스라고 말하며, 이러한 정화의식은 반드시 소외와 배제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종교의 역사는 아브젝트를 정화하는 다양한 방법을 개발해낸 역사라고 말한다.(13)

한편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를 다루는 데 있어 종교와 예술이 가지고 있는 일련의 공통점을 언급한다. 즉 예술과 종교를 통해 인간은 카타르시스 또는 감정의 정화를 통해 부정적 충동을 방어해 왔으며, 사회적 코드 내에서 희생과 폭력을 통제하고 승화하였다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예술적인 경험은 아브젝트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아브젝트를 정화하는데, 이는 종교성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크리스테바는 우리가 아는 역사적 종교는 붕괴하여도 종교는 살아남을 것이라 말한다.(14)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아브젝트를 보다 효과적으로 대면하고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것이 그녀의 입장이다. 이는 크리스테바가 예술로부터 억압적인 사회질서 혹은 상징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역사적 역할을 기대하고, 예술을 상징계에서도 기호계가 전면에 나올 수 있는 비정형적인 통로로 간주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그녀는 예술을 통해 상징계의 강압을 차단함으로써 집단적인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예술의 힘을 상징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기호계의 저항성에서 찾고 있다.(15) 이에 반해 크리스테바는 종교를 오히려 상징계에 근접하게 위치 지우면서 종교를 아브젝트를 다양한 방법으로 정화하여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게 하는 하나의 기제로 보고자 한다. 그 결과 그녀는 아브젝트를 다루는 데 있어 종교의 체제유지적 성격을 강조한다면, 예술의 경우는 창조적이면서도 혁명적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

미주

(1) 정연이,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애브젝트(abject) 개념 연구: 현대미술에 나타난 여성의 몸을 중심으로〉, 이화여대 박사논문, 2018, 39쪽, 142쪽.

(2) 정연이, 위의 글, 50-51쪽, 131-136쪽.

(3) Julia Kristeva, Powers of Horror: An Essay on Abjection (L. S. Roudiez, Tran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2, p. 1, p. 11; Carolyn Korsmeyer, Gender and Aesthetics: an Introduction, New York & London: Routledge, 2004, pp. 149f.

(4) 정연이 앞의 글, 39쪽, Julia Krestiva, ibid., p. 15.

(5) 정연이, 위의 글, 21쪽.

(6) 위의 글, 58-59쪽, 70-71쪽; Julia Krestiva, op. cit., p. 232; 이문정, 〈기호계(the semiotic)의 시각적 재현과 무법의 공간〉, 《미술이론과 현장》 17, 2014, 8-10쪽.

(7)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주체가 대상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그 세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구분하였다. 여기서 상상계는 일종의 ‘거울단계’로 유아는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따라 ‘상상적인’ 자아를 구성한다. 이후 아버지의 권위/법을 내면화하는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쳐 상징계 즉 현실 세계에 진입하는데, 이 세계는 언어로 구성되고 언어를 통해 관계를 맺는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욕망이 상징계의 질서를 넘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그러나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실재계가 있다. 이숙경, 〈현대미술에 있어 ‘타자’(the Other)의 문제〉, 《현대미술관연구》 8, 1997, (http://www.mmca.go.kr/study/study08/study8-4.html)

(8) 이숙경, 위의 글; 이문정, 앞의 글, 37-38쪽, 42쪽.

(9) 정연이, 앞의 글, 38쪽.

(10) 정연이, 위의 글, 51-52쪽; Julia Kriesteva, op. cit., p. 12; Carolyn Korsmeyer, op. cit., p. 149.

(11) 사실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 개념은 상당 부분 바타유의 이론을 토대로 정신분석학적 요소를 추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타유는 1930년대 L’Abjection et les formes misérables(아브젝시옹과 비천한 형태)에서 사회적 아브젝시옹을 근대 국가가 행사하는 배제의 폭력으로 보아 아브젝시옹을 이질성과 연결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바타유는 강한 사회적 결속력을 일으키는 것은 동질의식이 아닌 혐오의 힘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 이론이 철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이라면 바타유의 것은 사회학적이라 할 수 있다. 정연이, 위의 글, 40-41쪽.

(12) Catherine Clement & Julia Kristeva, The Feminine and the Sacred (Trans. Jane Marie Todd),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1, pp. 26f.

(13) 정연이, 앞의 글, 43쪽(재인용), 49쪽, 53쪽.

(14) Julia Kristeva, op. cit., p. 4, p. 17.

(15) 정연이, 앞의 글, 79쪽.

우혜란 박사(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woohairan@hotmai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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