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 35
▲ 성소수자와 성소수자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공존이 가능할까 ⓒGetty Images |
1.
이훈삼 기장 총무님. 안녕하십니까.
우선 총무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4년간 중책을 맡아서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총무 직무 수행의 원칙으로 스스로 강조하신 교회의 본질 회복과 사회적 책임의 수행을 위해서 일하실 때 영적/육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저는 1년 전 총무님이 아직 교회 목회를 하실 때 이 에큐메니안 지면에 총무님의 SNS 글을 읽고 의견을 드리는 기고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총무님에게는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지실 일이었을 텐데 저의 기고에 대해서 응답해 주시고 이후 대화를 더 이어갔던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총무님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 때처럼 다시 한 번 총무님께 글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이번에 글을 드리는 이유는 총무님의 취임 기자회견 보도 기사에 나온 다음 구절 때문입니다.
“취임 기자회견 중 이 총무는 성소수자 문제에 관한 교회의 입장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교회가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포용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며, “성소수자와 반대자 모두의 인권을 존중하며 교회 안에서 갈등을 조율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총무님의 이런 입장을 듣고 우선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겠습니다. 적어도 총무님의 재임 기간 중에는, 총무님과 제가 함께 몸담고 있는 기장 교단에서는 지난 감리교 총회에서 퀴어신학을 이단으로 규정한 것 같은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소수자와 반대자 모두의 인권을 존중하며 교회 안에서 갈등을 조율해나갈 것”이라는 총무님의 말씀에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이 글을 총무님께 드리게 된 결정적 이유입니다.
과연 총무님은 ‘성소수자의 인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반대자의 인권도 존중한다”는 단서가 붙은 상태에서, ‘성소수자의 인권’이란 것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반대자의 인권”이란 말씀을 굳이 하신 것도 그렇고, “갈등을 조율해 나간다”는 말씀도 그렇고, 총무님은 ‘성소수자’와 ‘반대자’가 교회 안에서 ‘공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시는 듯 합니다. 이러한 저의 해석이 맞다면, 그 앞에 나온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포용적 공동체”라는 말씀 역시, ‘성소수자’도 ‘반대자’도 모두 ‘차별하지 않는다’라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기장 교단 내의 많은 분들의 스탠스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도 듭니다.
기장 아닌 다른 교단에는 ‘반대자’의 숫자도 훨씬 더 많을 테고 ‘성소수자’는 차별해야 마땅하다는 걸 아예 교단 공식 규정으로 삼은 경우들도 많을 테니 ‘모두 차별하지 않는다’는 스탠스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럼에도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 ‘반대자의 인권’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자의 인권’이라고 하면 “동성애를 반대한다”, “성소수자를 반대한다”, “동성애는 죄다” 등의 말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권리로 인정해 달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특히 “동성애는 죄다”라고 성서에 나와 있다니까,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는 것은 성서를 따르는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당연한 종교의 자유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도 이해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모두 차별하지 않는다”는 스탠스에 서 있으신 분들이라면 자신들 스스로 “동성애를 반대한다”, “동성애는 죄다” 이런 말을 하지는 않더라도 저런 ‘자유’는 인정해야 되는 것 아니냐라는 생각을 하실 법도 합니다. 물론 ‘반대자의 자유’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지난 10월 27일 이른바 200만명 운운하며 열렸던 광화문의 개신교 집회에서 나왔다는, “동성애자들은 짐승처럼 살고 싶어서 차별금지법을 만들자고 한다”느니 하는 식의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점에는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짐승처럼” 운운하는 저런 ‘심한’ 말만 안 나오면 ‘반대자의 자유’라는 게 성립할 수 있는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제가 보기엔 저런 심한 말은 ‘반대자의 자유’라는 바로 그 자유를 펼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3.
이른바 ‘반대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말해지는 “동성애를 반대한다”, “성소수자를 반대한다”, “동성애는 죄다” 등의 말은 어떤 의도와 경로로 나온 말이든지 간에 한 가지 의미로 귀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더러,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니, 당신의 동성애자/성소수자로서의 존재를 포기하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은 거칠게 말하든, 세련되게 말하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모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그리스도교 영역 내부에서는 성서에 ‘동성애는 죄다’라고 나와 있다니까 저런 말이 나올 만한 여지가 있다고 생각이 될지도 모릅니다만, 일반 사회 영역에서 저런 모욕적인 말을 어떻게 쉽게 꺼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차별금지법’과 같은 일반 사회 영역의 이슈를 두고서 “동성애를 반대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려면, 거기에는 동성애자/성소수자를 “그런 모욕을 받아 마땅한 나쁜 사람들”로 몰아붙이는 말이 덧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앞에서 언급한 “짐승처럼 살고 싶어서” 운운하는 심한 말들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소수자와 반대자들이 ‘공존’한다는 것은, 즉 ‘반대자’들이 ‘반대자의 자유’를 행사한다는 것은, 소위 '반대자'들이 성소수자들에게 저러한 “존재를 포기하라”는 모욕을 계속 할 ‘자유’를 인정하겠다는 것이고, 성소수자들이 저러한 모욕을 계속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도’ 말입니다.
전세계 어느 그리스도교 교단이든 당연히 그러하겠습니다만 특히 기장 교단 안에 성소수자 교인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점 총무님이 모르시지는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총무님께, 그리고 제가 이 글에서 총무님과 비슷한 ‘중립적’ 스탠스일 거라 짐작했던 여러분들께 이렇게 여쭙고자 합니다.
성소수자들이 저러한 모욕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는 조건에서 ‘성소수자의 인권’이란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아니, 가능하기라도 한 것입니까? 신앙적인 차원에서 더 나가 보자면(물론 지금까지의 이야기도 ‘신앙적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만), 교회 안의 특정한 사람들에게 저러한 모욕을 감수하라는 것은, 사도신경의 “모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이라는 구절의 뜻에 대한 명백한 훼손 아닐까요?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소위 ‘반대자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버릇 중에 “성소수자라는 소수의 인권만을 보장하려고 다수를 탄압한다”는 식의 말이 있습니다. 저는 총무님의 경력으로 보아 총무님이 인권 이슈에 대해서 당연히 다음과 같은 감각을 가지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권 이슈란 바로 ‘소수’가 겪는 차별과 배제의 이슈로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니 “소수의 인권만을” 어쩌고 운운하는 저 말은 애당초 어불성설이라는 감각 말입니다. 여기에 덧붙이면, 성서는 하나님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버려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분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성서를 따른다는 분들의 입에서 “소수의 인권만” 운운하는 말이 나오면 안 된다는 감각도 함께 가지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4.
저는 지금까지 쓴 제 글에 대해서 총무님이 전적으로 동의하실 부분은 그리 많지 않으실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년 전 교회 목회자로서 제 글에 답변을 주실 때와는 달리 지금은 맡은 직책이 직책이시니만큼 총무님 본인의 의견을 다 표명하시기가 쉽지 않으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드린 이 글에 총무님의 답변이 없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총무님과, 그리고 이 글에서 제가 총무님과 비슷한 스탠스일 거라고 짐작했던 분들께 기장 교단의 사회선교사로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서 생각하실 때, 기장 교단 안에, 그리고 기장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교통하는 여러 교단 안에, 아니 명시적인 교통 관계가 없더라도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모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관계 안에, 성소수자 그리스도인들이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는 점을 먼저 전제하고 생각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