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조절 열한째 주일(왕상 3:5-14; 딛 2:1-10; 눅 19:1-10)
1.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창조절 열한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창조절 넷째 주일부터 새로운 창조 공동체에 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넷째 주일부터 여섯째 주일까지는 ‘새 창조의 시작인 가족과 그 확장인 영적 공동체’의 내용과 구성, 필요한 규정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주일부터 지난주 열째 주일까지는 ‘새로운 창조 공동체의 이념’을 살펴보았습니다(창조절 7주: ‘정의와 경건 그리고 회복’, 8주: ‘약자 보호’, 9주: ‘사회적·종교적 약자를 살피는 것’, 10주: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지 않는 것’ 등입니다).
이제 열한째 주일부터 마지막 열셋째 주일까지는 새로운 창조 공동체가 나아갈 지향점에 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매주 살펴보겠지만, 먼저 창조절 열한째 주일에는 ‘말씀과 도덕성’, 열둘째 주일에는 ‘새로운 세상의 모습’, 열셋째 주일에는 ‘머리털까지 세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통한 새 하늘 새 땅 추구’ 등을 새로운 창조 공동체의 지향점으로 소개합니다.
오늘 말씀은 새로운 창조 공동체의 지향점으로 ‘말씀과 도덕성’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한 인물로, 구약과 복음서에서 솔로몬과 삭개오의 이야기를 각각 들려줍니다. 먼저 솔로몬은 참된 교훈으로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합니다.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말씀과 도덕성이죠? 삭개오 역시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의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빼앗은 것은 네 배나 갚겠다고 합니다. 말씀에 기초한 도덕적 실천입니다. 따라서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이러한 말씀과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 신앙교육 지침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물론, 이것은 디도 뿐만이 아니라, 그레데 섬(크레타 섬) 교회 모든 성도(노인, 젊은 성도와 종까지)에게 해당합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 루카 조르다노 <솔로몬의 꿈>(1694-96) |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5-9)
다윗 왕의 죽음 이후, 조선 왕조 초기 왕자들이 벌인 왕위 다툼처럼(1) 왕자들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솔로몬이 넷째 아도니야 왕자를 제거하고 후계자로 지목됩니다(왕상 1:5-53). 이후 적대 세력을 제거함으로(차기 대권주자인 형 아도니야, 군 장성인 요압, 고위 성직자인 아비아달) 내부적으로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이룬 솔로몬은, 이제 대외적인 안정을 이루려고 합니다. 이때 솔로몬이 제일 처음 한 일은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린 것입니다(왕상 3:1).
여기, ‘애굽 공주와 결혼했다’가 아니라,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었다’라는 말은 정략결혼을 했다는 말이죠?(공주보다 바로에 중점을 둠) 당시 강대국이었던 애굽은 정치적 동맹관계를 맺기 위해 다른 나라 왕과 공주를 결혼시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솔로몬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솔로몬의 통치 아래, 이스라엘이 고대 근동의 신흥 강대국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러한 정략결혼을 통한 이방 여인의 이스라엘 내부 진입은 솔로몬 왕 말기에 큰 문제가 되죠?
아무튼, 솔로몬은 성전이 아직 건축되지 않아서 기브온 산당에서 제사를 드립니다(일천 번제). 그러자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어 한 말씀 하십니다. “너는 구하라!” 다른 말씀은 없으시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 대한 신뢰가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애굽을 의지하는지,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한마디로 물어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살펴보면, 첫 번째 왕인 사울은 12지파의 인정을 받고 왕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왕인 다윗은 처음에는 무력을 통해 유다 왕국을 세웠고, 나머지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에 지파 장로들의 승인을 받아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형제들 간의 왕위 다툼을 한 후에 왕이 되었습니다. 앞서 사울과 다윗처럼 백성들의 승인, 12지파 장로들의 승인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승인은 일천 번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구한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해달라는 것에 있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왕상 3:10-14)
솔로몬이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의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 외에 구하지 않은 다른 것들도 주십니다. 물론, 전제가 있습니다.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다른 말로 말씀과 도덕성입니다. 이를 듣고 행하면 구약에서는 “네 날이 길” 것이지만, 신약에서는 “영생(구원)을 누릴 것”입니다. 삭개오가 그렇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2.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속여 빼앗은 것은 네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 19:1-4)
▲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삭개오의 개종>(17세기 중반) |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마을로 지나가신다는 것을 듣고 만나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 갑니다. 이렇게 삭개오는 키가 작은 편이었지만, 부자였으며, 직업은 ‘세리장(a chief tax collector)’이었습니다. 당시 세리장인 삭개오는 여리고 사람들에게 창기나 다른 흉악한 범죄자와 동일한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우두머리(세리장)였고, 부유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세리들은 로마 정부를 대신해서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일을 담당했는데, 문제는 그들이 로마 정부에서 요구하는 세금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거둬 나머지를 착복했다는 데 있었습니다(마 21:31).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세리는 로마에 빌붙어 같은 동족을 압제하는 사람들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친일파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따라서 삭개오는 심적으로 열등감과 잘못된 일을 한다는 죄책감에 짓눌려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눅 19:5-7)
삭개오는 나름대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세리장이 되기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을 것이고,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 취급하면 할수록 보상 심리 때문에 더 악착같이 돈을 모았을 것입니다. 결국 어느 정도의 지위를 얻었고, 많은 재물을 소유했지만, 어느 날 문득, 지금까지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자기 삶에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남몰래 고민하던 삭개오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 수많은 사람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자신이 살고 있는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예수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8-10)
삭개오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후에,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 강탈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라고 결단한 것은 변화의 근거입니다. 이것은 난생처음 의미 없는 껍데기 같은 삶을 살아온 삭개오 안에 감추어진 순수한 영혼을 사랑과 용서와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아 주셨던 예수님을 만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주님 앞에서 자신이 생명처럼 붙들고 있던 많은 재물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음을 알았고, 그동안 자신이 의지하며 살아왔던 삶의 방식도 아무 가치가 없었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삭개오는 예수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든 것을 버리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후, 삭개오는 변화되었다. 더 이상 ‘잃어버린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탐욕스러운 부자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진정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순수, 순전’한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 계기는 바로 말씀이었고 그 완성은 바로 말씀에 기초한 도덕성의 실천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삭개오처럼 말씀을 듣고 결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실천하기는 더 어렵지요. 우리 안에 있는 침팬지의 본성 때문입니다.
3. 수평적 관계의 보노보와 수직적 관계의 침팬지
세계적인 영장류 학자이자 에모리 대학교 심리학과 석좌교수인 프란스 드 발 교수는 『내 안의 유인원』(김영사, 2005)에서 침팬지(pan troglodytes)와 보노보(pan paniscus)라는 두 종의 영장류 친척을 등장시켜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의 논의를 넘어서는 종합적이고 균형 잡힌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드 발 교수는 자신의 책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 프란스 드 발교수는 『내 안의 유인원』 표지와 보노보와 침팬지 암컷, 수컷 |
“이 책에서 나는 권력과 공격성, 섹스, 사랑, 협력, 도덕성에서 유인원과 인간이 어떤 행동을 나타내는지 직접 비교할 것이다. 이 모든 차원에서 인간의 본성은 두 가지 측면을 다 드러낸다. 어떻게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한편으로 관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이 두 가지 성향을 함께 지니고 있을까? 나는 다른 많은 사람이 한 것처럼 우리의 본성을 성선설 또는 성악설로 딱 잘라 말하는 대신에 그 다면성을 탐구하고 조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결론은, 인간 내부에는 수평적 관계의 보노보와 수직적 관계의 침팬지가 모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내부의 양면성을 통제할 수 있으며 한쪽 면이 다른 쪽 면보다 더 잘 표출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이나 동기를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는 민중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서입니다. 일찍이 한완상 전 부총리는 민중을 ‘즉자적(卽自的) 민중’과 ‘대자(對自的)적 민중’으로 구분했습니다. 뇌과학적으로 말하면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시스템1’의 뇌를 가진 민중이 즉자적 민중이고,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시스템2’의 뇌를 가진 이들이 대자적 민중입니다. 유인원으로 말하면 즉자적 민중이 침팬지이고 대자적 민중은 보노보입니다. 드 발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스니아와 르완다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할 때처럼 사람들이 나쁜 짓을 저지를 때, 우리는 그들을 짐승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거나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같은 이타적인 행동을 하면, 우리는 그러한 행동이 인간 특유의 도덕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치부한다. 기독교에서 흔히 이야기하듯이 야수와 천사 사이에 머물고 있는 이러한 인간 본성의 이중성이라는 주제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두 친척 동물, 침팬지와 보노보를 살펴봄으로써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침팬지는 폭력적이고 권력에 굶주린 동물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는 반면, 영장류 세계의 히피족이라 할 수 있는 보노보는 ‘전쟁이 아니라 섹스’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침팬지와 보노보 사이에 유전적 거리는 가깝지만, 행동형질의 차이는 매우 다릅니다. 그렇다면 침팬지와 보노보는 어떤 성향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침팬지는 수컷 중심의 엄격한 위계질서와 잔인한 폭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공격적 성향으로 싸움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며, 성적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래서 침팬지를 ‘도살자 유인원(killer ape)’이라고 합니다. 반면, 보노보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성욕이 왕성한 낙천성(카마수트라 영장류),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돕는 동료의식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감(empathey) 능력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보노보는 암컷 중심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짝짓기를 통해 서로 연대하고 수컷을 견제합니다.
이들 유인원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 사회 역시 ‘먹이’와 ‘성’을 두고 경쟁합니다. 따라서 제한된 자원과 성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전쟁과 학살, 정치적 탄압과 노사 갈등, 차별과 강간 등의 폭력성은 침팬지적 성향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보면, 우리 인간은 ‘카인의 후예’인 것입니다. 반면, 식량원조나 불우이웃 돕기, 각종 기부활동, 지진이나 화재 시 낯선 사람을 구하는 행위 등 ‘측은지심’을 통해 평화를 지키려는 것은 보노보적 성향을 드러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침팬지와 보노보의 성향을 모두 지닌 야누스적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중도 이렇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 인간의 뇌도 ‘시스템1’과 ‘시스템2’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침팬지가 득실거립니다. 학교에도, 교회에도, 정치에도, 문화에도, 마침내 우리 마음속에도! ‘자유경쟁’이라는 신자본주의를 지향하는 한국 사회가 침팬지를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침팬지 실험이 있습니다. ‘오이’는 괜찮은 음식이지만, 옆에서 ‘포도’를 먹는 원숭이가 있으면, 오이를 먹던 원숭이가 오이를 던져버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보노보를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 도덕성을 실천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창조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레데 섬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바른 교훈에 합당하게 살라고 디도에게 전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4.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딛 2:1-5)
▲ 그레데 섬 위치와 성 디도 교회 |
바울은 디도에게 신앙 교육 지침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이것은 그레데(크레타) 교회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합니다.(2) 첫째 노인 성도들(늙은 남자)을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늙은 남자 성도들에게는 절제와 경건, 신중과 믿음, 사랑과 인내입니다. 그리고 늙은 여자는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 여자 성도들에게 자녀를 사랑하며 순전하고 선(善)해지라고 교훈하라고 합니다. 이후 젊은 남자 성도들에게 주는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6-8)
선한 일에 본을 보이라고 하죠? 바른말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들에게 주는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모두 다 도덕적 실천입니다.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딛 2:9-10)
종들에게도 순종과 참된 신실성을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법도와 명령을 지키고 주께서 가신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우리 안에 침팬지 근성이 우리를 가로 막지만, 말씀에 힘입어 이겨 내고, 도덕성을 실천하여 진정 새로운 창조 공동체를 완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
(1) 제1차 왕자의 난은 1398년 왕위 계승권을 에워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으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반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방원의 난으로도 불리며, 무인정사(戊寅定社)라고도 불린다. 제2차 왕자의 난은 2년 후인 1400년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과 이방간이 세자 자리를 두고 싸운 것으로 방간의 난, 박포의 난 등으로 불린다. 제2차 왕자의 난이 동복(同腹) 형제간의 싸움이라면, 제1차 왕자의 난은 이복 형제간의 싸움이었다. 솔로몬은 조선 초기 제1차 왕자의 난과 같다. (2) 바울이 언제 크레타 섬에 가서 교회를 개척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첫 번째 로마 감옥에 2년 동안 갇혀 있다가 나온 후(AD 62)에, 마게도냐 지역과 아가야 지역을 돌아보면서 디도를 데리고 크레타로 가서 교회를 개척한 후에, 디도를 거기 남겨두었다고 추정합니다. 크레타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입니다. 초기 크레타 시대는 미노스 왕, 테세우스, 미궁을 만든 다이달로스와 아들 이카로스 같은 신화 내용으로 호메로스 같은 시인들의 입을 통해 오늘날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최후의 유혹』 등으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크레타섬 출신으로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
최병학 목사(종교인문학연구소 소장) hak-9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