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유와 信學 9
▲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 절대성을 우상화하고 인간을 노예화시킨다. ⓒGetty Image |
1. 시작하는 말
지난번 주제였던 우주의 매혹과 자연에 대한 인간 노예성 만큼이나 이번 ‘사회에 대한 인간 노예성’도 논쟁거리가 많다. 더군다나 21세기 팬데믹의 현실은 그동안 인류 사회에서 한껏 구가 되던 서구 근대적 개인주의가 몰고 온 악과 폐해를 혹독하게 겪고 있고, 그래서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날 길을 찾고 있으므로 이 상황에서 ‘사회’에 대한 인간 노예성을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의아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듯이 사회에 대한 강조나 공동체 정신을 주장하는 것의 반대는 ‘개인’ 또는 ‘개인주의’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여기서도 베르댜예프는 그러한 쌍의 반대는 잘못된 것이라고 우선 밝힌다. 그가 자연에 대한 반대가 인류 문명이나 물질, 또는 영혼 등이 아니라 거기서의 진정한 대극은 바로 인격, 정신, 자유라고 했듯이, 여기서도 그는 사회에 대한 반대는 개인이 아니라 바로 그 사회를 인간 삶에서 결정론화하고, 그래서 우리를 온통 사회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운명론적 결정론을 반대하는 것이다. 즉 사회에 대한 반대도 ‘인격’과 ‘정신’인 것을 말한다.
그는 인간이 빠지기 쉬운 모든 노예성의 형식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은 이 인간의 사회에 대한 노예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먼저 지적한다. 인간은 지난 수천 년의 긴 문화생활을 통해서 사회화된 동물이므로 사회학의 모든 이론은 인간을 창조한 것이 바로 사회였다는 것을 납득시키려 하고, 이러한 현실은 마치 인간이 “사회적 최면”에 걸려 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1) 그러므로 그 사회적인 요구에 반대해서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이 사회에 대한 인간 노예성이란 앞의 자연에 대한 인간 노예성만큼이나 참으로 어려운 주제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연에 대한 성찰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이 인간 사회적 삶의 현실에서 바로 그 사회성이 인간 ‘자연’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주장하는 사회적 자연주의로 인해서 어려움은 더욱 가중된다:
“너는 나의 창조물이다. 너의 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다 나에 의해서 거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것이다. 너는 자신의 전부를 나에게 돌려야 하느니라”(2) |
2. 개인과 인격의 차이와 사회에 대한 인간 노예성
베르댜예프는 “사회에 대한, 군집에 대한, 인류에 대한, 혹은 관념에 대한 인격의 예속은 인신 희생(human sacrifice)의 풍습이며 연장이다”라며 개인에 대한 집단의 요구를 날카롭게 비판한 헤르첸(A. Herzen, 1812-1870)을 인용하며, ‘개인’과 ‘인격’을 다시 뚜렷이 구분하면서 인격은 결코 사회의 일부가 아니라고 주창한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사회가 인격의 일부이고, 사회는 국가와 같이 인격의 구성 부분이다. 그리고 바로 그 사회를 외재화하고 그 사회가 만들어내는 관계를 객체화하면서 인간의 사회에 대한 노예성이 일어난다고 밝힌다.
이것은 내가 사회에 들어가는 것은 ‘나’라는 오직 한 ‘개인(an individual)’으로서 ‘우리’라는 사회에 들어가는 것이지 ‘인격(a personality)’으로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부분’으로서 ‘전체’에 들어가는 것인데, 그렇게 부분으로서의 나에 대해서 전체가 되는 사회는 한 특수한 현실이고, 현실태의 한 단계이며, 나와 타자와의 결합은 그러한 우리에게서 일어난다. 그래서 그 ‘우리’가 ‘나’의 질적인 내용이고, 사회적 초월이 되며, 나는 그 사회와 결합하기도 하지만, 그 우리는 집단적인 주체(subject)나 실체(substance)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즉, 사회는 실존적 의의를 지니고 있지만, 실존적인 중심(center)이 아니며, 실존적인 중심은 오직 ‘너’와 ‘우리’에 대한 관계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3)
그렇지만 그와 같은 인간 실존은 다시 객체화되고, 그것이 외부적인 것에 투사되면서 ‘사회’가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그 사회가 인간과 인격보다 더 크고 더 우선되는 존재라고 주장된다. 하지만 사회는 ‘나’의 그에 대한 관계 밖에, 또한 ‘나’와 ‘너’의 관계 밖에서는 어떤 현실성이나 실존성도 갖고 있지 않은 ‘우리(we)’를 객체화한 것이고, 이 우리는 실존성 있어서 집단이고, 결합이며, 단체이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은 다양한 통일인바, 그러나 그 차이가 미묘하여서 여기에 사회에 대한 인간 노예성이 감추어져 있다고 베르댜예프는 말한다.
3. 사회 유기체론과 인간 노예성
이렇게 사회적으로 인간 인격을 노예화하는 힘이 사회적 객체화의 환상에서 온다고 보는 베르댜예프가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사회적 객체화 방식이 ‘사회 유기체론(the organic interpretation of society)’이다. 앞 편의 자연에 대한 인간 노예성에서 보았듯이 인간은 종종 자신이 절대화하고자 하는 가치를 ‘자연’으로 치환하여서 그것을 인간 실존이 어찌해볼 수 없는 운명론과 결정론으로 만든다. 사회 유기체론이란 그와 유사하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현실을 유기체론화 해서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를 종속적인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만드는 관점이다.
베르댜예프가 서구 정신사에서 대표적으로 드는 사회 유기체론자로 스펜서나 셰플레(A. Schaeffle)가 있고, 헤겔의 사회와 사회 과정에 대한 해석도 역시 유기적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모든 형태의 사회 유기체적 해석은 반인격주의이고, 인격에 대한 사회의 우위를 불가피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보편주의(universalism)라고 비판한다.(4) 즉 보편적인 것이 개인의 인격에서 추상(推想, abstracted)되고, 거기에 인격을 굴종시킨다는 것이다.
그가 지적한 대로 사회의 유기적 해석은 항상 계층적이 되고, 거기서 사회는 인간의 인격보다 더 높은 계층 단계의 인격인양 보이도록 한다. 하지만 그러한 유기체적 해석은 오류이며, 인격주의의 본질에 어긋난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을 노예화시키고, 사회를 유기적 자연으로 정신화하면서 사회생활에서 법의 지배를 이상화하고, 그것을 사회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으면서 역사의 거대한 중압에서 유래하는 필연성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콩트의 사회학이 그것을 계승했고, 심지어는 마르크스 속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발견되어서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의 그 혁명적이던 사고가 언제든지 다시 보수적인 반혁명주의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19세기 이후 러시아나 중국, 북한 등에서 잘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베르댜예프는 이러한 사회 유기체론의 반대가 결코 ‘개인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오히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진정한 대극은 ‘인격주의’이고, 그것은 인격주의가 가치의 기준을 인격과 양심의 깊은 곳에 두고서, 거기서의 선악의 판단이 유기적인 것으로 현현되는 사회 집합적 전통 속에서보다 더욱 깊게 계시된다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격 깊은 곳에서 그와 같은 판단과 변별을 할 수 있는 양심이 결코 고립과 자기 억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항상 보편적 내용에로의 개방과 다른 인격들과 자유로운 교제와 하나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여기서 그의 인간 인격에 대한 깊은 믿음이 다시 표현되는데, 더군다나 그 인격은 단지 산 자들과의 교제만이 아니라 죽은 자와도 자유롭게 교제할 할 있는 전통에 대한 자유의 우위를 믿고, 또한 그 전통 속에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5)
그는 강조하기를, 사회적 삶에는 세대를 연결한 고리와 산 자와 죽은 자의 교제가 있으나 이 세대를 연결하는 고리는 인격 위에 외면적으로 놓이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인격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어떤 계층적인 유기적 원리가 아니라 인격 안에 있는 사회적 보편성의 계시와 그 인격의 확장된 내재적 경험이다. 그렇게 인격은 일순간이라도 어떤 유기체의, 혹은 어떤 계층적 전체 중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고, 사회는 항상 부분적이지 전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강조이다. 만약 그렇게 부분인 사회에 유기적 원리나 통체성이나 전체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상대적인 것에 “신성성(sacredness)”의 그릇된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 되고, 사회 속에서 유기를 보는 객체화의 환상이 일어난다. 자연이 부분인 것처럼 사회도 역시 부분이라는 주창인데, 전체주의 국가가 거짓된 노예화인 것처럼 전체주의 사회도 똑같이 노예화의 허위라고 밝힌다.(6)
그에 따르면 사회를 유기적인 것으로 보려는 사회의 유기적 이상과 관념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우주의 매혹과 자연에 대한 인간 노예성에 버금가는 것이다. 사회는 결코 유기체가 아니고 협동적 행위(co-operation)인데,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인간의 사회는 “우주를 본떠서 만들어질 것이 아니라 정신을 본떠야 할 것”, 즉 “계층주의의 모형”이 아니라 “인격주의의 모형”에 기초해야 하고, 그것은 다시 말하면 결정론이 아닌 자유를 본떠야 하며, “힘과 강자의 지배 모형이 아니라 심정의 연대성과 자비의 모형”을 따라야 한다.
그 경우에만 사회가 인간을 노예화하지 않는데,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인간적 자유의 근원은 결코 사회에서 찾을 수 없고, 오직 정신에서 나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역설한다.(7) 이처럼 사회철학 속에는 항상 필연성과 노예화에 그릇된 신성성을 부여하는 자연주의와 우주주의가 있지만, 인격주의 철학이란 바로 그러한 여러 종류의 “유기적인 것의 이상화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8)
4. 가족, 부권사회, 교회와 모권제
이렇게 인격주의 철학이 사회의 자연화, 정신의 자연화와 유기체화에 반대하는 가운데 그중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가족과 친족, 가부장제나 모권제 등을 어떻게 자리매김하는가이다. 이들의 유기체성을 부인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일찍이 퇴니스(Toennies, 1855-1936)는 ‘공동사회(Gemeinschaft)’와 ‘이익사회(Gesellschaft)’를 구분하여 가족, 계급, 마을, 민족 등을 게마인샤프트라고 하면서 그것은 혈연이라고 하는 육체적 유대 속에 이루어진 유기적인 통합체라고 밝혔다. 하지만 베르댜예프에 따르면 이러한 퇴니스의 이론도 유기적인 것을 이상화한 자연주의의 일종이고, 거기에는 ‘유기적인’ 것도 ‘기계적인(조직적인, fabricated)’ 것도 아닌 제3의 ‘정신적인’ 공동체에 대한 자리가 없다. 예를 들어 ‘교회’라는 것은 유기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의 두 가지 결정론(determination)을 뚫고서 다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인데, 이 교회가 역사 속에서 다시 객체화되고 하나의 ‘조직(organization)’으로 전락하기도 하지만, 오직 정신적 공동체만이 인간을 해방하며 유기적 가족적 공동체와 기계적 구성적 사회는 인간을 노예화한다고 밝힌다.(9)
베르댜예프에 따르면 부권제 사회는 모든 사회 중에서 가장 유기적이다. 그것은 기계적 사회보다 인간적으로 좋은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유기적인 것(organism)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그 배후에는 이전 유기적인 것과 피비린내 나는 오랜 전쟁과 배척이 있었고, 그러는 가운데 조직의 기계적인 것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일갈한다. 여기서는 특히 스위스 사상가 바코펜(J. Bachofen, 1815-1887)이 주장한 부권제 이전의 ‘모권제’와의 투쟁 사실을 드는데, 그렇게 인간 사회의 기원에는 아무런 신성한 것이 없고, 오늘까지도 아직 잔재하고 있는 가부장주의 부권제도 다만 조건적인 상징주의일 뿐 객체화의 영역으로서 정신의 소외이며, 또 하나의 결정주의에 굴복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렇게 인간은 유기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유기적’이란 것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에서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그는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 대해서 우월성을 가질만한 유기적 현실로서 존재하는 사회란 없으며, 비록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은 모두 죽는 데 반해서 사회는 계속 존재하면서 그러한 시대 사이에서 우리를 연결하는 일반자(common)가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거기서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은 인간적 실존 공동체이며, 일반자는 그 관계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인간 밖이나 인간 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한다.(10) 서구 중세 때 일종의 신비적 단일체로 여겨졌던 ‘인류’(mankind)’라고 하는 것과 또한 공산주의 사회에도 나타나는 사회적 ‘계층주의’도 유비적으로 말하려는 추세에서만 유기체로서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지 그것을 하나의 신성한 객체로 여기는 것은 오류이고, 사회가 유기체가 아닌 것처럼 인류도 신비체가 아니고, 사람들의 진정한 합동과 공동체는 주체성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 주체성이란 보통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처럼 결코 개인주의가 아니다. 법의 필연성과 그 지배도 종종 정신화되면서 사회적 악과 부정을 정당화하는데, 오늘 한국 사회에서도 지금 혹독하게 겪고 있는 검찰 독재와 사법 농단의 현실이 그것을 잘 웅변해 준다.
5. 사회적 노예성으로부터의 창조적 해방과 종말
사회 유기체론을 포함해서 사회에 대한 인간 노예성도 결국 영원성(eternity)과 불멸성(immortality)에 대한 추구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베르댜예프는 사회 유기체설은 “반종말론적”이고, 그것의 보수성은 바로 구체적인 역사적 제도를 신성시하는 것이므로 반그리스도교적이고, 그런 면에서 자신의 인격주의에도 모순되며 기독교 종말론에도 모순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그의 종말론 이해와 죽음, 부활 등의 그리스도교적 물음들에 대한 이해가 부분적으로 드러난다.(11) 그는 사회는 항상 살아있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의 사회이기도 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과거를 ‘기억’하는 인간의 정신적 힘을 말하는 것이며, 그 기억을 통해서 사회는 개별적 인간보다 더 영속적이 되는 것을 지적하는 의미이다.
하지만, 베르댜예프에 따르면, 그렇게 역사적 시간을 이어주는 과거의 추억은 결코 정태적이지 않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단지 “보존하는(conserving)” 기억이 아니라 “창조적인 변모를 일으키는(a creatively transfiguring)” 기억이고, 과거 속에서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 과거 속에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을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으로 가져오려는 “정신적 기억(spiritual memory)”이다.(12) 이 정신적인 기억은 인간의 과거 속에는 정신의 위대한 창조적 운동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원성(eternity)을 상속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또한 그 기억은 우리에게 오늘 우리 실존적 삶이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만큼이나 과거에 그렇게 구체적인 인격으로 산 사람들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말은 죽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 부활에 속”하고, 또한 그 부활도 “과거가 그 악과 허위 속에서 회생하는 것이 아니라 변모하는 것”이라 주창이다.(13)
이것은 참으로 힘찬 생명과 부활에 대한 선언이고, 여기서 베르댜예프가 과거와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 과거와 역사는 결코 인간을 옥죄고 노예화하는 결정론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와 함께, 또한 그 과거와 함께 떠난 사람들과 더불어 새롭게 변모하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변모된 실존적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다른 세계로부터 오는 목소리(a voice from another world)”라는 것이다. 베르댜예프는 톨스토이나 입센과 같은 사람들의 역사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 속에는 현실 사회의 억압과 허위, 거짓을 비판하고 깨부수는 영원한 진리(eternal truth)가 들어있다고 본다. 또한, 결코 과거의 역사나 사회 통체에 대한 인격과 정신의 자율은 실제적 상태(factual condition)가 아니라 질적인 노력의 극치이며, 추상적인 권리의 선언이 아니라 사람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상태라는 것을 명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해방과 정신적 해방은 함께 제휴해서 나가야 하고, 결코 사회 속에 머무르지 않는 “천재(the genius)”의 창조적 행위는 “다른 질서(another order)”에서 오는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리스도교적 이원론의 긴장을 포기하지 않고, 그런 맥락에서 자신의 인격주의를 종종 “그리스도교적 인격주의(Christian personalism)”라고 밝힌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다시 천재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사회나 국가보다 높은 위치를 점유한다고 강조한다. 사회적 전체의 질서가 필요한 것은 결코 전체를 위한다거나 전체가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격 때문(for the sake of personality)”이라는 것인데, 이 가치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진리의 계시이고, 사회는 그렇게 “신뢰(belief)”에 의해서 보존되는 것이지 “힘(force)”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 근저에 있어야 하는 신뢰와 신앙이 최고의 신성성으로 허위로 변질되면서 거기서의 신화와 상징뿐 아니라 그에 근거한 사회나 국가도 결국 해체되고, 사멸하고, 루소의 인민주권 신화나 일반의지의 무오설, 마르크스 프롤레타리아 신화도 그런 예였다고 밝힌다.
6. 보편과 구체, 보편의 독점과 객체화에 대한 저항
베르댜예프는 마지막으로 ‘보편(the universal)’과 ‘구체(the concrete)’에 대한 성찰로 이 인간 사회적 노예화에 대한 사유를 마무리한다. 인간이 사회적 공동체 삶을 이루고 살기 위해서 토대가 되는 서로 간의 믿음과 신뢰, 그 일을 위대하게 이루었던 과거의 조상들에 대한 기억이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보수적 신화로 경직되고 추상화되면서 거기서 차별과 억압, 싸움과 압박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서구 정신사에서 기독교의 기독론도 이 스캔들을 넘지 못했고, 거기서 기독교적 보편의 독점이 예수를 배타적인 신적 우상으로 전락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화의 오류에 대해서 베르댜예프는 분명히 선언하기를, “보편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고, 또한 가장 구체적인 것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다”라고 주창했다.(14)
이어서 어떤 한 구체적인 특성이 너무 두드러진 사람은 그가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이지 결코 그의 부유함이나 풍요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가 프랑스인이나 한국인, 부르주아나 교수, 공무원, 노동자 등, 한 가지 특수성의 “양(quantity)”에 매몰된 사람은 결코 자유한 사람이 아니고, 특별하게 구체적인 인간도 아니며, 오히려 그 특별한 사회성으로 추상화된 인물임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체성이란 “통체성(integrity)”을 말하는 것이고, 보편성이란 “충만함의 성취”로서 “보편성의 현실화(the actualization of universality)”가 구체성이기 때문에 가장 구체적인 인간은 보편적인 인간이고, 그는 민족이나 국가, 사회적 내지는 직업적 특성의 배타성과 고립, 자기주장을 극복하고 있기 때문이다.(15)
물론 구체적인 인간은 사회적인 인간이며, 그를 그 사회성으로부터 추상화시킬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 사회성이 ‘배타적(exclusive)’이 될 때 그것은 그의 사회성이 객체화되고 추상화되는 것을 말하며, 거기서 그는 노예화된다. 진정 구체적인 인간일수록 가장 확실하게 결정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말하고, 인격적으로 고양된 사람을 말한다. 인간을 사회적으로 예속하는 것은 상징이지 현실이 아니며, 어떤 면에서는 사회 자체가 그대로 ‘상징’으로서 세계의 종말은 바로 그러한 객체 세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과 다르지 않으며, 바로 이 세계 속에서의 종말을 향한 운동임을 강조한다.(16) 2천 년 전 한 유대인 남성이나 역사상의 어느 교회, 하나의 민족 공동체나 국가가 배타적으로 보편과 진리, 종말을 ‘소유’하고 ‘독점’할 수 없다. 보편과 진리, 종말은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고, 시간과 공간 자체를 낳은 창조성이자 자유이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아시아적인 언어로 易이고 仁이며, 空과 理인 것이다.
7. 한국 信學의 마무리 성찰
- 후천개벽의 종시(終始)에서 비롯되는 또 다른 자유와 평등, 평화
동아시아 《역경》의 마지막 64괘의 이름은 ‘미제(未濟)’이다. 미제는 처리할 일이 마무리되지 못하고 아직 남아있는 것을 말하고, 그래서 첫 초육(初六)에는 작은 여우가 강을 건너다가 깨끗이 건너지 못하고 그만 꼬리를 적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역경》이 그 마지막을 ‘미제’괘로 끝냈다는 것은 앞의 베르댜예프가 보편(eternity)은 어느 누군가가 의해서 한 번에 이루거나 소유할 수 없고 매번의 구체(now and here) 속에서 다시 새롭게 현실화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서로 통한다. 그리고 종말은 한 번에 보편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 사회, 한 시대, 한 종교나 개인이 독점하고 절대화할 때 그것은 추상으로 전락하고, 사람들과 생명은 그 절대화된 보편 아래 노예화되는 것을 말해주는 의미이다.
기독교 易 사상가 김흥호 목사님은 그의 『주역강해周易講解』에서 이 미제괘를 “번뇌즉보리”라는 말로 푸셨는데, 이 말도 다시 앞의 베르댜예프의 보편과 종말 이해와 잘 상관되는 것 같다.(17) ‘번뇌’, 즉 구체가 없으면 보편의 ‘깨우침’도 없는 것이고, 죽음(終末)이 없으면 부활(終始)도 없고, 그래서 부활은 ‘명멸(明滅)’하는 것이라는 의미이겠다. 그렇게 보편은 매번의 구체의 실현으로 드러나고, 부활은 명멸하는 것이어서 지속하는 부활 속에서 발전이 있고, 질적인 변화가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이 미제괘는 전혀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발전’의 괘로 읽히기도 한다. 부활은 미제이고, 발전도 미제이며, 종말과 종시는 그렇게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오늘 21세기 근대 이후를 살아가면서 코로나 팬데믹을 만나고, 자본주의의 극악한 절대화로 생명체의 고통이 극심한데,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제일 빠지기 쉬운 노예성이 자연에의 노예성이고, 그것을 다시 그대로 사회로 옮겨와서 사회 유기체설 등을 통해서 가족이나 특수한 지역 공동체, 민족이나 그와 연결된 개별 종교 그룹을 절대화하는 사회에의 노예성일 것이다. 베르댜예프는 이것을 깨기 위해서 다시 참된 보편과 종말, 인격의 자유와 인간 정신의 영적 기원을 강조했다. 어떤 눈에 보이는 시간과 공간 안의 대상도 그것을 그대로 절대화시키고 보편화시키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 노예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또한, 그것을 노예성이라고 해서 부정적으로 말했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와 유기체적으로 연결되는 대상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의지와 노력으로 우리 삶이 꾸려지고, 거기서 뜻하지 않게 새로운 생명과 존재가 창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은 서구 남성 사유가인 베르댜예프에 대해서 아시아 여성 사고가의 관점으로 그가 ‘속(屬, genus)’을 통한 생명의 영속은 “임신을 통해 계속되는 삶을 알 뿐 영원한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종의 성적(性的) 범신론”이라고 비판한 것에 대해서 다시 비판했다. 즉 지금까지 앞에서 살펴본 그의 사회 유기체설에 대한 비판을 동아시아 여성의 시각에서 다시 그 현실적 한계를 들어서 비판한 것이다. 여기서 본인은 서구인 베르댜예프가 동아시아적 사고에서는 ‘성(性)’이라는 언어가 한편으로는 다시 ‘거룩(理)’을 말하는 언어(性卽理)라는 것을 모르고, 또한 그도 포함해서 지구상의 남성은 그 ‘성(性)’이 다시 여성 몸의 태의 역할을 밝혀주는 ‘성(姓)’과 깊이 연관된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하고자 한다.(18)
동아시아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여겨지는 앞의 《역경(주역)》도 19세기 이후 그 보편의 자리가 위협받고 있다. 1881년 조선의 주역 연구가 김일부(金一夫, 1826-1898) 선생은 그 주역을 대신하는 ‘정역(正易)’을 내놓은바, 세상의 만물을 혁신하는 2대 요소인 ‘금(金)’과 ‘화(火)’가 서로 협력하여 1년이 360일이 되는 후천(後天)의 세계가 시작되고, 인간성의 근본 개조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이상국의 세계가 열린다고 선언하였다.(19) 이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로운 공동체에서는 ‘천하일가(天下一家)’의 균평과 고도의 복지사회가 구현되고, 종교가 서로의 싸움을 그치며, 인종차별이 없어지고, 남녀평등과 특히 선남선녀의 민중이 주인이 되는 ‘일부(一夫)’와 ‘범부(凡夫)’의 세계가 됨을 말하였다.(20) 오늘 이러한 새로운 이상국 건설을 위해서 인류 문명이 나아가는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고, 어쩌면 현금의 코로나 팬데믹도 그러한 큰 문명적 전환의 시기를 지시하는 한 상징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플라톤 이후 서구의 모든 철학은 그 각주에 불과하다고 평가받는 플라톤도 일찍이 자신의 ‘이상국가론’을 펼치면서 세 가지 핵심적인 요소를 들었다. 그것은 철학자, 즉 사유하는 사람을 공동체의 지도자로 세우는 일을 강조하면서, 먼저 국가 교육에서 생물학적으로 드러난 여남 신체의 차이를 본질적 차이로 여겨서 그들을 차별하는 일을 그만두는 일, 둘째, ‘처자공유’라는 여성 비하적인 말을 쓰긴 했지만, 지도자가 나와 너의 가족의 분리 속에서 좁은 가족주의에 빠지는 일을 극복하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이상사회로 가는 길 위에 놓여있는 장애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를 의심하는 의구심을 극복하는 일로 들었다. 즉 그도 인간의 가장 심각한 사회적 노예성으로서 사회 유기체론을 든 것이고, 인간 사고와 상상력, 믿음이야말로 그 일에서 핵심이 되는 일임을 밝힌 것이다.
오늘 과거 인간 공동체 삶에서 얻은 기득권과 재산, 지위 등을 어떻게든 지키고 그것을 손 대대로 유지하려는 고집과 욕심, 욕망이 드세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 거기서 가장 견고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그룹이 언론과 법조계이고, 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계나 대학, 학계 등 사유하는 사람들에게도 퍼져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곧 대선을 맞이한다. 이번 여름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지독한 기후 이상도 겪으면서 진정한 평등과 평화, 남북 사이에 놓여있는 38선(휴전선)이 단지 한반도의 38선만이 아니라 세계 인류사적 의미인 것을 자각하라는 후천개벽의 ‘정역(正易)’의 소리도 함께 생각하면서(21) 앞으로 어떤 지도자와 대통령을 선출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잘 실행할 일이다.
미주 |
(미주 1)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이신 옮김, 늘봄, 2015, 138쪽. (미주 2) 같은 책, 139쪽. (미주 3) 같은 책, 140쪽. (미주 4) 같은 책, 141쪽. (미주 5) 같은 책, 142쪽. (미주 6) 같은 책, 143쪽. (미주 7) 같은 책, 143쪽. (미주 8) 같은 책, 144쪽. (미주 9) 같은 책, 145쪽. (미주 10) 같은 책, 147쪽. (미주 11) 같은 책, 149쪽. (미주 12) 같은 책, 149쪽. (미주 13) 같은 책, 150쪽. (미주 14) 같은 책, 152쪽. (미주 15) 같은 책, 153-154쪽. (미주 16) 같은 책, 156쪽. (미주 17) 김흥호, 『周易講解』 券 二, 김흥호 전집 주역강해2, 사색, 2003, 550쪽. (미주 18) N. 베르쟈에프, 이신 옮김, 『인간의 운명』, 현대사상총서, 1984, 322쪽; 이은선, 「한국 페미니스트 그리스도론과 오늘의 기독교」,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1, 97쪽. (미주 19) 이정호, 『원문대조 국역주해 정역』, 아세아문화사, 1996, 110쪽. (미주 20) 같은 책, 115쪽. (미주 21) 같은 책, 122쪽. |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leeus@sejo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