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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人格)이란 무엇인가?

기사승인 2021.03.07  14: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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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와 信學 3

ⓒDonna Grethen/Getty Images

얼마 전 영화 <세 자매>(이승원 감독)를 보았다. 페북에 주인공 배우들의 연기(문소리, 김선영, 장윤주)를 평하는 한 평을 보고 찾아간 것이었는데, 보면서 이 영화가 예전 이창동 감독의 <밀양>처럼 한국 기독교의 뒤틀린 믿음 행태와 생태 환경을 핵심적으로 찌르는 것임을 발견하고서 큰 울림을 받았다. 많이 미안했고 책임감을 느꼈으며, 이러한 영화를 만들어준 감독과 배우들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한편 지금 이 연재에서 말하고자 하는 ‘인격’이라는 것이 바로 이 영화에서 세 자매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과거의 모든 상처와 아픔, 현재의 큰 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삶을 계속해 나가려는 고투, 그 고된 지속함을 가능하게 해주는 인간적인 근본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 삶에서의 매번의 선택, 비록 그 안에 여전히 위선과 거짓, 폭력과 비인간성이 난무하지만, 그래도 각자 나름의 형태를 갖춘 존재에로 남게 하는 근본적인 인간의 힘, 그 인간 존재의 근본 힘은 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믿음 체계도 완전히 죽일 수 없는 더 근본적인 보편의 생명적 힘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았다.

베르댜예프는 인격의 힘이란 결코 어떤 자연이나 사회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강변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의 침노이고, 돌연변이이며, 하나의 예외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구체적으로는 하나의 형태(Gestalt)를 갖춘 여기 지금의 구체적인 현존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는바, 과연 오늘날 인간이 철저하게 뇌나 지능(intellect), 각종 진화의 산물, 온갖 심리적인 치유나 교육의 결과, 또는 지적 능력 중심의 윤리적 차원에 국한해서 주로 논해지고 있다면, 오늘 이것을 넘어서 인간에 대해서 무엇이 더 말해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중심으로 인격에 대한 더 세밀한 탐색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인격과 이성

동아시아 유교 전통에서 공자가 주목한 인간성(仁)을 더욱 세밀히 전개 시킨 맹자는 그 인간성, 인간 마음(心)의 핵심을 ‘사유하는 일’이라고 했다(心之管則思).(미주 1) 이와 유사하게 서구 정신사에서 인간 마음의 핵심을 ‘이성(理性, reason)’으로 보면서 그 이성의 윤리적 차원을 부각시킨 칸트를 베르댜예프는 특히 높게 평가하는데, 이것으로써 인간의 인격 이해가 단순한 지적 능력(the intellectual)의 차원에서 행위와 실천의 윤리(the ethical)의 차원으로 이동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43쪽). 그리고 특별히 칸트에게서는 그 이후의 헤겔이나 피히테 등의 독일 관념주의에서와는 달리 인간 이성의 힘이 절대화되지 않았고, 그 한계와 더는 말할 수 없음의 영역이 지켜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칸트적 이원론이 담지된 것을 말하며, 그것이 탈각되었을 때의 결과는 20세기의 서구 문명에서 연원된 세계대전이나 히틀러 등을 몰고 온 일원론적 형이상학의 거대한 부패가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베르댜예프는 자신이 말하는 인격주의에서의 인격은 한편으로 이성적인 존재이지만 결코 이성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이성의 수단으로 정의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같은 책, 31쪽). 인격은 합리적인 존재이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역설하는데, 이것은 먼저 인간을 지적 능력 중심으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全 사유, 全 의지, 全 감정과 全 창조적 행위의 통전적 차원을 밝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차원을 인격은 결코 생물학적 내지는 심리적인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윤리적이고(ethical) 정신적인(영적인spiritual)”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는 말로 밝히기도 하는데(같은 책, 32쪽), 그러면서도 이러한 윤리적 차원을 밝힌 칸트의 인간론도 참다운 의미에서는 인격주의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칸트가 인간의 인격적(윤리적) 차원을 밝힘으로써 단지 지적 존재만이 아니라 義와 의무를 실행하는 실천의 존재임을 말했지만, 그 윤리적 인격을 다시 ‘단독’이 아닌 ‘보편(the universal)’의 차원으로 일반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같은 책, 43쪽).

앞에서 동아시아의 易이나 ‘이기(理氣)’의 관계에 대한 탐색과도 견주어 살펴보았지만, 베르댜예프는 인간 인격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역동성과 불이성(不二性)의 긴장을 지시하기 위해서 서구 기독교 교리사의 ‘삼위일체(三位一體)’ 위격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한다. 이것은 초기 교부들이 희랍 언어에서의 ‘본질ϕύσις(essence)’과 ‘실체ύπόστασις(substance)’ 사이의 미묘한 차이에 주목해서 ‘하나의 본질과 세 개의 실체(휴포스타시스)’가 있는 神과 ‘하나의 인격과 두 가지 본성’이 있는 그리스도를 표현하고자 구성한 것이고, 이어 중세 라틴어에서는 극장에서 배역을 담당할 때 사용하는 마스크를 의미하는 ‘페르소나persona’라는 개념을 가져와 그리스도와 인간의 인격을 그리고자 한 것이지만, 그러한 것들이 모두 충분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이후 서양 근대에서 “단독자와 그 소유(Der Einzige und sein Eigentum)”의 개념을 부각시킨 막스 스티너나 인격을 인간 경험의 통일과 여러 행위의 실존적 통일로 파악한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1928)가 인격 이해의 전개에서 기여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러한 이해들보다도 러시아 사상가 니예스멜로프(A. Nyesmyelov)를 중요하게 언급한다. 그는 인간 인격 안에는 “어떤 조건을 붙일 수 없는 존재의 형식”이 반영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 인격은 “제한된 존재의 조건 속에 놓여 있는 물질적 세계의 것”이라고 보는 정신과 물질의 급진적인 이원성과 수수께끼 같은 모순적 공존을 함께 껴안으려 했다고 밝힌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베르댜예프는 현대 중국에서 양수명(梁漱溟, 1893-1988)과 같은 사상가에게도 큰 영향을 준 베르그송(H. Bergson, 1859-1941)의 생철학이 현대사상에 나름으로 이바지했지만, 오히려 반(反)인격주의라고 반박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철학이 생명과 생활문화를 강조하면서 인격을 우주적이며 사회적인 과정 안으로 해소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와 동시에 오늘 21세기 한국사회에서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유행하고 있는 각종 자아 중심적 쾌락주의나 자연주의적 범신론적 신지학(theosophy)이나 인지학(人智學, anthroposophy), 자유주의나 파시즘 등이 모두 유사하게 사회의 “자본주의적 기구”와 긴밀히 연결되어있다고 비판하는데(같은 책, 44-45쪽), 현대 부르주아 개인주의 사회의 자본주의적 반인격주의를 지적하는 것이다.

인격과 개인

베르댜예프는 현대 언어생활에서 제일 많이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는 ‘개인’과 ‘인격’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하면서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가 어떻게 반인격주의가 되는지를 탐색한다. 그는 분명하게 개인은 자연주의, 생물학, 사회학의 ‘자연주의적 범주’에 속하지만, 인격은 그와는 달리 ‘정신적 범주(not a naturalistic but a spiritual category)’에 속하는 것임을 확인한다(같은 책, 45쪽). 개인은 전체와의 관계에서 ‘하나의 원자(atom)’로서 그 불가분의 ‘부분’이 되지만, 그래서 전체 밖에 있을 때는 개인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인격은 우주적, 가족적 내지는 사회적 전체이든 어떤 전체와의 관계에서도 결코 부분이 아니며, 그보다는 오히려 ‘소우주(microcosm)’이고 ‘만유(a universe)’라는 것이다. 즉 개인은 전체의 종속이지만, 그리고 자아로서의 개인은 전체에 대해서 종속적 부분으로서의 독립에 불과하지만, 인격으로서의 인간은 그러한 종속과는 관계없는 그 자체가 우주임을 밝히는 것이다.

개인은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고, 생물학적 기원을 가진 종적 과정에 의해서 탄생하기 때문에 가족이 없는 개인은 있을 수 없고, 개인이 없는 가족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개인 이해이다. 하지만 인간은 참으로 그러한 개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서부터 모든 변화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인간이 우주이며, 인격적 내용이 가득 차 있는 것은 그가 개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인격이기 때문에 그러하며, 그런 의미에서 인격은 자연과 사회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자유이며 독립이라는 것이다. 또한 현실에 있어서 개인은 세포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인격은 결코 세포가 아니라는 것인데, 인격은 부분이 전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유기적 관계가 아니라 타자, 다른 모든 물건, 세계, 사회와의 관계가 ‘창조’와 ‘자유’와 ‘사랑’의 관계이지 결코 ‘결정’의 관계가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격주의의 자유와 독립은 개인주의의 그것과는 달리 자기중심적 고립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같은 책, 46쪽).

인격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어떠한 자동 작용(automatism)에 대해서도 반대의 위치에 있는 것이며, 자신의 인격을 위해 질료로 쓰는 물질적 세계로부터의 독립이라고 강술한다. 하지만 개인과 인격은 두 개의 분리된 인간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인간 안의 개인이면서 인격인 두 종류의 서로 다른 힘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여기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고독의 경험을 견디고 자아 중심적으로 자신 속에 함입되며, 자기를 기다리는 위험들에 대해서 자기를 지키는 투쟁을 지속하지만, 인격으로서의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자기 폐쇄를 극복하고, 자기 속에 하나의 우주를 전개하면서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기의 독립과 존엄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밝힌다(같은 책, 47). “인격은 전면적으로 세계와 국가의 시민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격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48쪽) 라는 선포와 함께 인격은 어떤 경우에도 신과 인간, 정신과 자연, 자유와 필연, 독립과 의존 간의 이원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인간이 두 둘 사이에서 만나는 지점으로서 그 속에서의 투쟁이고, 여기서 인격은 神으로부터 나오는 혁명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정신적 원리의 승리는 인간이 우주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우주가 인격에 계시되는 것을 의미한다”(같은 책, 37쪽)는 말로 베르댜예프는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종종 혼동되는 개인과 인격 사이의 구분을 분명히 하며 19세기 이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온갖 자연주의와 과학주의, 사회주의로 환원되고 축소되는 것에 저항하면서 다시 인간 고유의 위치와 가능성을 밝히기 원한 것이다.

인격과 영혼과 육체

인격이 무엇인가를 살필 때 위의 ‘개인’ 의식과의 혼동이 있는 것처럼 아주 쉽게 서로 뒤섞이는 것이 인간의 ‘영혼’ 이해와 관련해서이다. 오늘의 한국어에 있어서 ‘영(靈)’과 ‘혼(魂)’은 주로 함께 쓰여 일반적으로 육체적인 것에 대한 심적(soul)이고, 정신적인 것을 뜻하는 언어로 쓰이지만, 이 단어의 구조를 좀 더 세밀히 살펴보면, 그리고 서양 언어를 번역하는 일과 관계하여 톱아보면, 영은 ‘spirit’ 또는 ‘mind(理)’를 번역해서 ‘정신(精神)’으로 하는 것이 적실하고, 혼은 ‘soul(氣)’을 번역해서 보다 정적(情的)이고 기운적(氣運的)인 측면을 지시하는 언어로 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베르댜예프는 인격의 문제는 ‘영혼(soul)과 육체(body)’의 관계라는 보통 문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적시한다(같은 책, 39쪽). 인격은 인간을 자연의 생과 연결된 육체에서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영혼(soul)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면서 여기서 “정신적 원리(spiritual principle)”라는 말을 쓰는데, 인격이란 이 정신적 원리가 인간의 영혼(soul)과 육체(body)의 모든 힘을 다스리는 원리로 작용하는 전체적 모습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도 보듯이 베르댜예프도 ‘spirit, soul, body’를 셋으로 구분해서 쓰고-물론 이 영어 단어도 원래 러시아어에서 번역된 것이지만-, 이 영어 단어를 한국어 번역자 이신(李信, 1927-1981)은 ‘정신’, ‘영혼(또는 혼)’, ‘육체’라고 하면서 인격은 ‘정신’의 힘으로서 영혼과 육체를 통일시키는 또 다른 차원임을 밝힌다.

베르댜예프는 데카르트에게서 연원된 영혼과 몸이라는 오래된 이원론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고, 오히려 진정으로 보면 인간 영혼(혼)의 생명은 全 신체적인 생명에 침투하고, 마찬가지로 신체적 생명이 영혼의 생명에 작용을 미친다고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원론은 존재하지만, 결코 ‘영혼’과 ‘육체’ 사이가 아니라 ‘정신(spirit)’과 ‘자연(nature)’ 사이, ‘자유(freedom)’와 ‘필연(necessity)’ 사이의 이원론인 것이고, 자연에 대한 정신의, 필연에 대한 자유의 승리가 인격의 승리라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인간 신체의 형태(the form of the human body)가 이미 자연적 혼돈에 대한 정신의 승리라고 지적하는데, 신체의 형태는 단순히 질료나 물리적 세계의 현상이 아니고 영혼과 관계하고 정신적인 것이라고 밝힌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얼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같은 책, 40쪽).

“인간의 얼굴은 우주적 과정의 정점이며, 우주에서 발생한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으로서, 자연의 힘의 영역 위에서 우주적 과정의 정점을 떠올리게 하는 정신적인 힘의 작용을 연상시킨다. 인간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놀랄만한 것이다.”

베르댜예프에 따르면 “다른 세계(another world)”가 얼굴을 통해서 빛난다. 얼굴은 인격이 그 독특성과 유일성, 반복 불가능성을 띠고서 세계 과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얼굴을 통해서 한 인간의 신체적 삶뿐 아니라 그의 (영)혼의 삶도 이해할 수 있고, 그처럼 신체의 형식(the form of the body)은 ‘정신-(영)혼(the spirit-soul)’에 속하는 것이며, 바로 이곳의 전체성 안에 인격이 드러난다고 역설한다. 즉 정신은 신체까지도 자기 속에 포괄하고, 그것을 “정신화(靈化 Spiritualized)”하며, 그에게 다른 질을 전달한다는 것이다(같은 책, 41쪽). 정신(the spirit)은 영혼(the soul)과 신체(the body)에 형식(the form)을 전달하고, 그들을 통일체(a unity)로 모은다. 다르게 말하면 정신이 전체성의 인격에게 형태를 주는 것인데, 여기에 몸이 들어가고, 인간의 얼굴이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같은 책, 41쪽).

그러므로 결코 정신은 몸을 압박도 하지 않고 파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베르댜예프의 확언이다. 오히려 이러한 전체성의 시각은 일반적으로 생명(삶)을 기계론적으로 보는 것, 즉 몸에서 영혼을 빼앗고, 몸의 형식에 보이는 적대적인 태도를 극복하는 것을 말하며,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물질주의)은 몸의 형식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된다고 밝힌다. 이렇게 인격주의는 “인간 몸의 존엄성(the dignity fo the human body)”을 진정으로 받아들여 그 몸이 잘못 다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그것을 진정으로 “인간 존재의 권리”로서 인정한다(같은 책, 41쪽). 그래서 “매일의 빵의 문제도 곧 정신의 문제가 되며(even the problem of daily bread becomes a spiritual problem)”, 이렇게 신체의 권리가 인격의 가치와 결부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인격에 대한 가장 가공할만한 침해가 먼저 몸에 대한 침해라는 것을 적시한다. 굶기고, 때리고, 죽이는 일이 신체를 통해서 全 인간에게 전해지지만, 그러나 정신 그 자체는 결코 때릴 수도 죽일 수도 없는 것이라고 확언한다(같은 책, 42쪽).

마무리 성찰 - 性·命·精의 삼신일체(三神一體)와 인격

이렇게 베르댜예프는 인간의 인격을 여러모로 성찰하면서 20세기 이후 현대에 와서 인간의 격이 한없이 추락한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고투한다. 그 가운데서 인격이 보통 인간 ‘이성(지성)’이나 ‘개별성(개인)’, ‘영혼(soul)’ 등과 쉽게 등가화되고 혼동하여 이해되고 있는 것을 반박하고, 그와는 다른 차원, 그 모든 차원을 함께 포괄하는 전체성의 차원을 지시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오늘 세속의 시대이지만 다시 한번 인간의 영적 차원, 초월의 차원을 부각해서 인간 이해가 오늘날처럼 유물론적 일원론이나 각종 진화론적 자연주의, 사회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아서려는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잘 몰랐고, 거의 찾지 않았던 한국인 고유의 오래된 우주와 인간 이해가 생각한다. 단군조선 등에 대한 古기록(桓檀古記)에 표현된 민족 고유의 그것은 지난 편에 살펴본 중화 중심의 신유교적 이기론(理氣論)과도 또 다르게 우주와 인간의 ‘삼차원’을 적시하면서 그 세 가지 차원이 어떻게 서로 관계되고 연결되는지를 밝히고 있다. ‘환국’과 ‘배달국’에 이은 단군왕검의 ‘고조선(古朝鮮)’의 역사를 기록하여 전하고는 고려 후기 행촌 이암(李嵒, 1297-1364) 선생이 지은 『단군세기 檀君世紀』의 첫머리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일에서 ‘역사(史學)’를 아는 것과 더불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 가장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삼신일체의 도는 크고 원융하며 하나 되는 뜻에 있으니, 조화(造化)의 神이 내려와 우리 본성(性)이 되었고, 교화(敎化)의 神이 내려와서 우리의 (기운인) 명(命)이 되었으며, 치화(治化)의 神이 내려와서 우리 (몸의) 정(精)이 되었다. 그러므로 만물 가운데 인간이 최고로 귀하고 존엄하다.”라고 밝혔다.(2)

여기서 표현된 인간 존재의 세 가지 신적 기원(三神一體)을 드러내는 ‘性·命·精’의 언어는 다시 구체적인 현실적 존재에서 ‘心(마음)·氣(기운)·身(몸)’의 세 쌍으로 표현되고, ‘느낌(感)·호흡(息)·촉감(觸)’의 세 가지 활동으로도 밝혀진다. 이러한 한국 고유의 이해는 베르댜예프가 인격을 ‘영(the spirit)’과 ‘혼(the soul)’과 ‘육(the body)’을 모두 포괄하는 전체성의 정신(the spirit)으로 본 것과 잘 상통한다고 필자는 이해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고유성을 주로 이성적 지성(理)으로 보거나 육체와 대극 되는 의미에서의 영(理)이나 혼(氣)으로 보는 것과는 구별된다고 여긴다(3) 이와 같은 삼신일체의 ‘정신(精神, the spirit-soul-body)’은 또한 다른 곳에서는 “심뇌(心惱)”라는 말로도 표현되는데, 단순히 신적 본성이 마음(心)에만 드러나거나 뇌라는 몸이나 지적 능력과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뇌(마음과 뇌, 즉 정신)’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일석삼극(一析三極)’이나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인간 속에서 천지가 하나가 된다)’의 미묘한 통전성의 차원을 말하는 지경이라고 할 수 있다.(4)

베르댜예프는 우리 시대에 인간에 관한 초월적 차원을 다시 지시하기 위해서 ‘인격’이라는 이미 지극히 일상화된 세속 언어를 가져오면서도 어떻게든 그 초월적 기원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원적 모순성과 신비(神)를 표현하기 위해서 ‘정신(靈, the spiritual)’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와 유사하게 한국의 古사상도 性·命·精이나 心·氣·身 등의 세 쌍의 언어를 쓰면서 그중에서도 理나 天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세계내적인 ‘性’이나 ‘心’이라는 언어로써 인간 존재의 최고의 신적 차원(三神)을 그려내고자 했다. 즉 일반 서구 기독교 사상으로부터의 고유성을 드러내 주는 러시아 사상가 베르댜예프나 중화 문명권에서 또 다른 독자성을 드러내는 한국 古사상은 훨씬 더 오묘하고 농축적인 형태로 하늘과 땅, 초월과 내재, 신과 인간, 정신과 물질, 지성과 감성 등의 두 차원을 연결하고 관계 맺게 하려고 고투했으며, 거기서 인간의 역할, 인극(人極), ‘그냥 인간(仁)’은 그 중심극으로서 둘 사이의 긴장성을 하나로 화합해가는 역할을 맡는다는 의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인(神人, Homo-Deus)’의 출현을 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베르댜예프의 언어로 하면 ‘인격’이라는 것인데, 19세기의 또 다른 한국 사상가 김일부(一夫, 1826-1898)는 오늘 놀랍도록 발전해 가는 우주 천문학이 밝혀주는 대로 태양계를 넘어서 무한대로 펼쳐지는 우주 생명(별)의 세계가 있지만, 그렇게 수많은 생명 중에서도 거기에 ‘태양과 달(日月)’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이며, 또 그 태양계 안에서 인간이 사는 지구 안의 인간이 없다면 그것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다.(5) 이것은 인간의 삶이 ‘천동설(天動說)’과 ‘지동설(地動說)’을 넘어서 그 모두를 포괄하는 ‘인동설(人動說)’, 다른 말로 하면 ‘인간세(人間世, Anthropocene)’의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서구 문명에서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인간세의 참뜻은 인간이 우주의 삶을 죽이는 존재가 아니라 ‘살리는(性/生理)’ 존재로 역할 할 수 있다는 것을 베르댜예프의 인격주의나 한국 古사상은 지시해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밝히려는 것이 또한 전통의 ‘神學(theology)’이 아닌 본인의 ‘信學(fiedeology)’이고, 유발 하라리와 같은 서구 사상가가 ‘호모 데우스’를 말하기 훨씬 오래전에 줄기차게 ‘신인(神人, Homodeus)’이나 ‘겸성(兼性)의 성인(聖人)’을 말해온 한국 古사상이 전하려고 한 메시지가 그와 유사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6)

그 古사상의 보고 중 하나인 이암의 《단군세기》는 하늘(天)의 위대함은 ‘검은 말 없음(玄默)’을 통해서 우주의 기초(眞一)를 놓고, 땅(地)의 위대함은 ‘축적하고 저장함(蓄藏)’으로써 큰 생산을 하고(勤一), 바로 “인간은 그 사유함의 일로써 위대하고, 원만함을 택해서 협력하고 합하는 일이 그 일이다(人以知能爲大 其道也擇圓 其事也協一)”라고 했다.(7) 하늘과 땅을 합하고, 민족을 합하고, 서로의 마음을 합하며, 인간과 자연, 자연과 기계, 우리 마음과 몸을 합해서 큰 하나 되게 하는 일이 인간의 사명이고, 추구이며, 생명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주를 원만한 협력과 하나 됨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왜 우리는 신인(神人)이 되지 못하고, 진인(眞人)이 되지 못하며, 인격을 잃어버린 노예처럼 사는 것일까를 탐색해 가는 일이 계속된다.

미주

(미주 1) 『맹자』, 「告子上」 15.
(미주 2) 《환단고기 桓檀古記》, 이기동·정창건 역해, 도서출판 행촌, 2019, 70쪽.
(미주 3) 이은선, “3.1운동정신에서의 유교(대종교)와 기독교-21세기 동북아 평화를 위한 의미와 시사”, 『동북아평화와 聖·性·誠의 여성신학』, 동연, 2020, 129쪽 이하.
(미주 4) 《천부경 天符經》. 1909년 한일병탄이 코앞에 있던 시점에서 홍암 나철(1863-1916)과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1909) 등이 중광한 대종교(大倧敎)가 그 핵심 경전으로 삼는 《천부경》과 《삼일신고 三一神誥》는 행촌 이암의 후손 이맥(李陌, 1455-1528)이 지은 『태백일사 太白逸史』에 포함되어서 전해진다. 그리고 그 후손 해학 이기는 다시 이러한 古사상을 『태백속경太白續經』 또는 『진교태백경眞敎太白經』 등으로 전해주었다. 박종혁, 『한 말 격변기 해학 이기의 사상과 문학』, 아세아문화사, 1995.
(미주 5) 김항, 『정역正易』. 8면 “天地匪日月公穀, 日月匪至人虛影,”, 류승국,  『한국사상의 연원과 역사적 전망』, 유교문화연구소, 2008, 261쪽.
(미주 6) 이은선, “한말의 저항적 유학자 해학 이기의 신인(神人/眞君) 의식과 동북아 평화”, 『동북아평화와 聖·性·誠의 여성신학』, 동연, 2020, 261쪽 이하.
(미주 7) 이암, 『단군세기檀君世紀』, 《환단고기桓檀古記》, 이기동·정창건 역해, 도서출판 행촌, 2019, 138쪽.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leeus@sejong.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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