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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자유-신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과 자유

기사승인 2021.06.13  15: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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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와 信學 7

▲ 에티 힐레숨의 일기

< 1 >

시작하며: 지난번 4월 중순 ‘사유와 신학 6-존재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과 자유’에 이어서 거의 두 달 만이다. 그동안 다른 글 저술로 인해 늦어졌다. 본 성찰이 2천 년 서구 신학의 한 대안으로 생각하는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는 20세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많은 폐해와 한계를 겪은 후 다시 ‘인격’과 ‘자유’라는 오래된 언어를 가져와서 인류 문명의 나아갈 길과 방향을 탐색한다. 앞글들에서 살펴본 대로 서구 정신사와 우주 생명 존재의 보편적인 구조와 갈등을 그 개념 아래서 밝히고, 여기서 등장하는 첫 번째 보편 범주인 ‘존재’라는 사고와 더불어 인간 노예성을 살핀다. 이어서 두 번째로 어쩌면 그 ‘존재’라는 개념보다 더 큰지 모르는 ‘神’이라는 범주 속에 담긴 인간 노예성을 파헤치고, 이번 글은 그에 대한 것이다.

< 2 >

신에 대한 의인(擬人)론적, 의사(擬社)신적 노예성: 베르댜예프는 먼저 신(God)과 그 신에 대한 인간적인 이념(the idea of God)과의 차이를 강조한다. 또한 본질(His Essence)과 객체(God as Object)로서의 신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이 존재하고, 인간은 그 의식으로 신의 형상을 온갖 것으로 창조하면서, 특히 우리가 많이 들어왔던 ‘신인동형론적’ 신 이해로 그것이 마치 신의 본질과 신 자체인 여겨왔기 때문이다(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지음, 이신 옮김, 『노예냐 자유냐』, 늘봄, 2015, 110쪽). 그에 따르면 바로 이 객체화된 신이 인간의 노예적인 외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그 현실을 잘 지적한 포이에르바흐(L. Feuerbach, 1804-1872)는 옳았다. 하지만 베르댜예프에 의하면 그것만이 다가 아니고 신의 문제는 그러한 지적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온갖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신의 형상과 모습에 가까운 신을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의 조건이다. 그 조건 아래 놓여서 인간은 자신에게 계시하는 신에게 두 가지 각인을 씌우는데, 즉 ‘의인擬人신론(신인동형론, anthropomorphism)’과 ‘의사회신론(擬社會神論, sociomorphism)이 그것이다. 여기서 의사신론은 절대적인 신론을 사회계급적인 관점에서 규명하려는 논리로서 우리가 특히 서구 기독교적 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대부분 개념, 주인(Master)과 왕, 상전과 지배자, 가부장 등과 같은 개념이 바로 그것들이고, 베르댜예프는 그러한 의사회신론적 전이에 반대하며 가장 강조하기를, 신은 결코 ‘상전’이 아니고 ‘지배자’가 아니며, 그러한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권력의지는 결코 신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에 신은 “자유”이고, “해방자”이시며, 인간의 노예적인 경외를 요구하지 않고, “자유의 감정”을 주는 자이지 “굴종의 감정”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 3 >

자유와 신비로서의 신과 만남: “신은 영(정신)이며, 영은 지배와 노예성의 관계를 일체 알지 못한다”(같은 책, 111쪽)는 것이 그의 강한 신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을 자연주의 신학에서 ‘결정론’ 또는 ‘인과론 causality)’으로 제시하는 것은 잘못이며, 신은 어떤 일의 원인도 아니고, 한정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게 ‘의사회신론적 우주신론(cosmomorphic)’을 가지고 자연현상에서의 인과성이나 사회현상에서의 지배성 같은 것을 신적 유비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밝힌다. 그에 의하면 이렇게 신에 대한 그릇된 예속적인 이해나 신에 대한 노예적인 인식이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고 만들게 하는 최후의 보루이고 요새이다(같은 책, 112쪽).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잘 경험하는바, 인간이 아무리 탈종교적이고 세속적으로 자신 가치 규정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그것을 다시 한 신적 의미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 그 욕망이고 바람이었으며, 거기에 종종 걸려 넘어졌다. 그런 맥락에서 중국학자 후레드릭 W. 모오트가 유교 전통의 공자에 대해서 역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떠맡았으면서도 단지 한 인간으로 남았고, 그를 신성시하려는 후대의 온갖 시도를 물리친 것이 유교 전통의 고유성과 위대성이라고 지적했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시사이다.(1)

이렇게 객체로서 이해된 신은 인간 예속의 원인이 되며, 신학(神學)과 신학의 매혹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그리하여 우상숭배가 바로 신과의 관계에서 성립하며, 베르댜예프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신에 관한 인간 지식의 역사에서 악마와 신을 바꿔놓는 일도 적지 않다고 일갈한다(같은 책, 113쪽). 여기에 대해서 그러한 유혹과 악마화를 피하고자 그가 제안하는 신개념은 ‘신비’와 ‘주체성’, ‘사랑’과 ‘자유’ 등으로서의 신이다. 즉 신은 사랑과 자유이며, 결정성이 아니고, 지배성이 아니며, 신 자신이 자유이고, 그는 자유만을 준다는 강조이다. 인간은 신에 관해서 그러한 주체성과 역동성 외 어떤 개념도 만들어서는 안 되며, 특히 ‘존재’의 개념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결정적 실체화와 합리화를 불러오고, 결국 ‘정신’과 ‘주체성’과 ‘자유’로서의 인격을 예속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댜예프는 신은 다만 상징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고, 그런 맥락에서 ‘긍정 신학’보다는 ‘부정신학’을 더 선호한다. 그렇다고 신은 ‘불가지(不可知)’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신과 협력도 하고, 극적인 싸움도 가능한데, 즉 인격으로서의 신이 인격으로서의 인간에게 원하는 것은 “응답적 사랑(responsive love)”과 “창조적 응답(creative answer)”이지 노예적 굴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상 주체성으로서 주체성 안에서 양 인격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거기서부터 초월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같은 책, 113쪽). 베르댜예프가 이렇게 ‘신비’로서의 신을 말하고, ‘부정신학’의 방식을 더 선호하면서도 다시 인격과 자유와 주체성을 통해서만 신과 만날 수 있다고 강변하는 것은 그의 사고 안에서 유신론과 무신론, 인격신과 범신론 등이 오묘하게 불이적(不二的) 공존하는 것임을 밝혀 준다. 이것을 통해서 진정으로 구체적인 ‘관계(公)’ 안에서 현현하는 초월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절대자(The Absolute)’ 관념은 추상적 사유의 객체화의 극치이다. 그 절대자 속에는 실존성의 흔적도 없고, 생명의 흔적도 없다. 그것은 단순한 “사고의 산물(a product of thought)”일 뿐이고, “존재도 아니고 인격도 아니다”(같은 책, 114쪽). 그러한 절대자를 향해서는 기도할 수 없으며, 극적인 만남은 불가능하다고 강술한다.

베르댜예프가 인간을 노예화하는 절대자와 군주적 권력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과 더불어 상관하는 신의 속성을 드러내고자 다시 가져오는 기독교 언술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더불어 고난받는 사랑과 해방자와 희생의 그것이다. 이것을 그는 “신은 자기를 휴매니티(humanity)로 계시한다”라고 표현한다(같은 책, 115쪽). 이 말은 그가 인습적인 기독교 전지전능한 절대자로서의 신은 부정하지만 참된 본래성 표현으로서의 기독론은 받아들이는 입장이고, 나는 여기서 이러한 사유가 동아시아 ‘휴매니티(仁)로서의 하늘(공맹의 仁者人也/仁也者人也)’ 이해나 ‘성즉리(性卽理)’ 또는 ‘심즉리(心卽理)’, 혹은 동학 최제우의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등의 의식과 잘 통한다고 본다. 베르댜예프에 따르면 인간의 형상을 스스로 왜곡시키는 것은 인간, 곧 가장 공포스럽게 비인간화된 인간 자신이다. 그러므로 의사회신론(擬社會神論)으로 신의 관념을 왜곡시키는 것에 대해 ‘부정신학’으로 저항하고, “잡신 숭배(theocracy)”에 대해서 저속하고 악의에 찬 무신론이 아니라 “순교자의 드높은 무신론”, “정당한 저항으로서의 무신론”과 함께 그 왜곡과 타락에 맞서야 한다고 주창한다(같은 책, 115쪽). 부정신학이나 무신론의 역설적 역할을 밝히는 것이다.

< 4 >

신정론과 무신론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알다시피 유대·기독교적 정신사에서 무신론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세계의 악과 고통의 실재에 대한 쓰라린 경험이 자리한다. 결정론이나 인과론으로서의 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정 이 세상에 만연해 있는 악과 고통, 개인적으로 강타하는 감내하기 어려운 불의 앞에서 신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 악의 문제를 선구적으로 제기한 기독교사의 마르키온(Marcion, A.D. 85-160)을 언급하고, 헤겔에 반하는 키르케고르, 그와 더불어 도스토옙스키를 앞세우는 베르댜예프는 다시 자신의 인격주의 사고 속에서 신정론과 칭의론, 의인론(義認論)의 문제는 바로 “인격의 문제”, 즉 “한 실존적 중심의 반복 불가능하고 유일한 인격의 문제”라는 것을 명시한다(같은 책, 117쪽). 그것은 비애와 환희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는 인격, 자기 고유의 운명과 세계 질서와 세계 조화와 관련된 인격의 문제이지 결코 합리론(理神論)적 신학이 내세우는 거짓된 신정론이나 그릇된 무신론의 물음이 아니라는 것이다(같은 책, 119쪽).

“세계 질서에서 전체의 조화 관념은 인간 예속의 근원이며, 그것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객체화의 위력이다”(같은 책, 117쪽)라고 일갈한다. 소위 세계 질서와 세계 전체를 일컬어 말하는 조화는 결코 신의 창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세계 질서나 전체의 조화는 항상 자유와 대립하는 결정의 영역일 뿐이고, 그것은 허위와 인간을 노예화하는 관념으로서 베르댜예프는 여기서 그렇게 ‘세계 조화’를 강조하는 세계 이성을 일종의 “거짓된 심미주의(a false aestheticism)”라고 비판한다(같은 책, 119쪽). 그에 반해서 신은 인간의 “실존”의 의미이고, 신은 항상 “자유” 속에 있으며, 인간의 고통과 세계 질서에 대한 자유의 투쟁 속에서 역사하지 필연이나 세계 질서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실존과 개체와 자유의 저항 속에서 표명되는 신을 부정하고, 허위의 무신론이나 합리주의적 신정론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결국은 “항상 신의 영광과 인간의 존엄성 양자를 (동시에) 모멸”하는 것이 된다. 또한 세계에 있는 악과 불의, 부정(不正)의 존재를 상관하지 않거나 없는 것으로 부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데, 그 무신론이나 합리론의 두 가지 방향을 모두 넘어서 우리는 세계에 대한 신의 섭리를 “설명할 수 없는 신비(an inexplicable mystery)”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은 ‘세계섭리자(world providence)’가 아니고, 서구 기독론에서 많이 등장하는 우주 지배자나 주권자, ‘용(龍) 퇴치자(판토크라토, Pantakrator)’로서의 만물 지배자도 아니다. 대신 자유와 의미(meaning), 사랑과 희생이며, 객체화된 세계 질서에 대한 항쟁이다. 이러한 일관된 인격주의적 맥락에서 지금 이 세계가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이라고 말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세계관이야말로 참으로 비관적인 언술이라고 비판한다. 눈앞의 극심한 악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세계에 대한 낙관론을 찾는 것이야말로 바로 “인간 노예성”의 증표라는 것이다. 베르댜예프의 확신으로는 “신정론의 문제는 개체화된 세계 질서 속에서 객체화하는 사유로는 해결이 안 된다”(같은 책, 120쪽). 거기서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처럼 세계의 모든 불행과 고뇌와 악을 신의 섭리와 우주 주권자의 관념으로 “정당화할 필요가 없고”, 또한 “정당화할 권리도 없다”고 강변한다(같은 책, 120쪽). 이것은 매우 강력한 신 변증인데, 동시에 ‘조건 지어진 존재(conditioned being)’로서의 인간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면서도 그 안에 내재하는 한없는 기적적 인격적 힘으로서의 저항과 항거,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자유의 행위력을 명시하는 것이다.

< 5 >

범신론에 대해서: 이렇게 베르댜예프가 세계 악과 칭의, 신정론의 물음을 실존적 지평에서 풀어내려고 해도 그 자신도 한편으로 외면할 수 없는 것이 ‘범신론(Pantheism/Panentheism)’의 물음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모든 신앙고백 중 소위 ‘정통’은 항상 범신론적 경향을 적발하고 그것을 비난해 왔지만, 그가 보기에 이것은 신비론이 사용하는 언어의 역설적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신비론자에게 범신론의 죄를 씌우지만, 그러나 한 번 더 살펴보면, 그렇게 말하는 정통주의도 끊임없이 ‘신만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고, 신만이 참다운 존재이며, 인간과 세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모든 것을 신에게 귀속시키는 사고야말로 유사하게 범신론이 아니며, 일원론이 아닌가 라고 반박한다(같은 책, 121쪽).

종교사상의 역사에서 범신론의 경향은 양면성을 가진다는 것을 지적한다. 한편으로 범신론은 우리가 이해하듯이 인간을 독재적 억압과 외재화된 초월과 객체로서의 신 이해로부터 해방시킨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예속화와 인격과 자유의 부정과 신성만을 유일한 실제적 힘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베르댜예프가 이렇게 범신론이라는 의식에서 드러나는 이율배반과 모순을 지적하는 이유는 신에 관한 일체의 사유는 결코 객체화일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어느 경우에든 그것은 노예성의 성격을 띤다는 것을 강조한다(같은 책, 121쪽). 그런 맥락에서 정통 신학에서의 신과 세계의 이원론적 계기를 그 많은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으려 하면서, 그것을 세상의 불의와 악에 대한 투쟁에서의 실존적 공동 투쟁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

그는 일체 함유의 통일이라는 관념은 “철학적 이성에 매력은 있으나 신에 대한 추상 관념”이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객체화된 사상의 결과이고, 그러한 통일 속에는 실존성이 없으며, 만남도 없고, 대화도 없으며, 소명이나 응답, 투쟁도 없다(같은 책, 122쪽). 그리고 진정으로 실존적인 더 높은 세계는 “통일의 세계가 아니고 창조적인 자유의 세계(a world of creative freedom)”이며, “사랑에서의 하나 됨과 협동”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신의 나라는 결코 ‘긍정’의 언어로는 잘 드러날 수 없고, ‘부정’의 언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긍정의 통일 관념 그 자체가 인간 노예성의 표현이고, 그것은 인격주의와는 대립하며, 사유의 환상적인 결과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신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과 자유’에 대한 성찰을 마치면서 니체 차라투스트라의 언어 ‘신은 죽었다’를 가져와서 거기서 신이 죽은 이유는 “인간에 대한 동정 때문에 신은 죽었다”라는 한 것을 의미지운다(같은 책, 114쪽). 만약 절대자와 군주적 권력자, 최고의 가부장으로서의 신이 죽지 않으면 인간과 민중과 여성, 그리고 자연 속 모든 개체의 생명과 창조성은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구체적인 존재 특히 인간의 인격이나 동물과 식물과 그리고 자연 속에 개체적 존재를 갖는 모든 것은 영원을 이어받을 것이고, 이 세계의 모든 왕국과 개개의 인격을 괴롭히는 ‘일반자’의 왕국은 완전히 불탈 것이다.”(같은 책, 118쪽)

< 6 >

마무리 성찰 1 - 퇴계 성학십도(聖學十圖)와 우리 안의 초월적 백신: 오늘 대부분 사람은 神에 관해서 무관심하다. 그래서 한국 信學은 먼저 우리 자신의 마음 감각을 검토하기 원했고, 우리 몸과 여기 지금의 적나라한 현실로부터 시작하기 원했다. 그래서 神學이 아니라 信學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위의 베르댜예프가 밝힌 것처럼 신인동형론적이거나 의사신론적 신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서 죽었고, 그런 차원에서 우리도 한편 무신론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무신론에 그냥 머물러 있기 원하지 않고, 다시 그것을 넘어서 새롭게 신과 초월과 만나기 원한다. 그 길이 한편 범신론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러나 그 범신론이 다시 마주하고 있는 추상적 일원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서구 기독교가 강조해온 초월과 내재 사이의 이원적 긴장을 놓치지 않고 초월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을 추구한다. 그것이 한국 信學의 유신론이고, 초월과 신비 이해라고 생각한다.

동아시아 유교 전통의 퇴계 선생이 그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밝힌 대로, 우리 마음(정신)속에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구체적인 인간 덕목(德)과 삶의 이치(理)로 내재하는 태극(太極)으로서의 초월과 神에 관한 이야기가 그 일에서 큰 의미가 된다. 그 이야기는 오늘 같은 회의(懷疑)와 불확실의 시대에 모두에게 훨씬 보편적이고 분명하게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우리 감정과 사유를 조절하며 이웃과 세계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이고 일상적으로 믿음과 신뢰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본인은 그처럼 분명하고 간이하게 우리와 함께 하는 우리 마음의 理와 道, 그에 관한 이야기를 바로 우리 마음의 신과 초월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것으로 여길 수 있을까 생각한다. 바로 여기 지금 곁에, 또는 우리 안에 그 가르침과 인도가 있으므로 삶에서 수없이 반복해서 다가오는 고난과 고통, 죄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바른길과 가르침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참으로 안심되고 감사하다.

퇴계 선생은 그 다섯 가지 길에 관한 가르침 중 첫 번째인 ‘仁’의 길을 ‘애지리(愛之理)’와 ‘생지리(生之理)’의 ‘사랑’과 ‘생명과 창조’의 마음으로 밝히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바로 그러한 하늘의 마음을 자신 마음으로 받아서 태어났고, 그에 더해서 마지막 다섯 번째의 ‘信(믿음)’을 “성실지심(誠實之心)”과 “실지리(實之理)”로 풀면서,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그러한 생명과 사랑으로 선택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열매가 맺힐 때까지 지속하는 일(誠實)이라고 밝히셨다. 믿음이 바로 그러한 일이라면 오늘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 왜곡과 거짓과 허무의 가상과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우리가 한번 그 일에 몰두해 볼 만하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어떤 다른 특별하고 비의적인 계시나 권위, 지식에 얽매임이 없이, 만약 그랬다면 참으로 힘들고, 방황하게 되고, 어려웠을 것이지만, 바로 여기 지금, 그처럼 평이하고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옳고 그르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면서 요청하는 일이므로 그 일은 우리 인간적 힘의 반경에 있다는 것이다.

오늘 더 이상 어떤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초월 신에 대한 믿음이 가능하지 않고, 그러한 신은 지금까지 인간의 창조성과 자발성을 한없이 억누르고 노예화해온 것이 드러났다면,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 정신을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무신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더 높은’ 세계와 ‘그 이상’의 차원’으로 이끄는 대안의 실재와 만나고자 한다면, 그 일을 위해서 이러한 동아시아적 ‘심학(心學)’이나 퇴계적 ‘경학(敬學)’이 많은 것을 줄 수 있다고 여긴다.(2) 퇴계 선생은 당시에도 자칫 인간 의식과 공동체 삶의 지향이 차가운 우주론이나 젊은 학자 기대승의 도전을 받아서 또 하나의 자연주의, 즉 오늘의 언어로 하면 무신론적 물질주의나 과학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감지했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초월자 태극과 理, 우리 마음에는 사랑과 생명의 힘으로 내재하는 신적 정신에 대해서 당시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호발설(互發說)’이나 ‘리도설(理道說)’을 말하며 그 초월의 역동성과 자유, 우리와 실존적 사귐이 가능함에 대해서 역설했다. 우주와 우리 마음의 신과 초월이 결코 어떤 이신론적 관념의 차가운 도덕 원리나 당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매일의 삶에서 우리 판단과 선택의 현장에서 우리를 이끄는 경외의 존재자인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3)

< 7 >

마무리 성찰 2 - 에티 힐레숨과 우리 신앙의 미래: 이러한 동아시아적 믿음의 표현과 참으로 유사하게 연결되는 접점을 본인은 최근 한국기독교연구소의 김준우 대표가 펴낸 독일 홀로코스트의 또 다른 희생자 에티 힐레숨(Etty Hillesum, 1914-1943)의 깊은 신앙적 언어에서 새롭게 만난다. 2014년 한국사회가 겪은 끔찍한 세월호 참사를 한국 여성신학적으로 이해하고자 할 때 본인은 힐레숨의 독일어판 일기를 읽으면서 큰 위안과 도움을 받았다.(4) 그런데 이번에 그녀의 삶과 사상을 전체적으로 조명하는 책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니 천은(天恩)으로 여겨진다.(5) 1943년 9월 7일 암스테르담에서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그녀는 그곳에서 11월에 희생되기까지도 일기 쓰기를 계속했다. 가까스로 전해져서 겨우 1981년 10월이 돼서야 처음 세상에 드러난 그녀 일기는 “사유하는 가슴(das denkende Herz)”으로서의 그녀가 어떻게 당시 서구 기독교 전통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새로운 신 이해와 신앙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오늘 신(神) 부재와 믿음(信)의 어려움과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범 인류적 문명 위기 상황에서 에티 힐레숨의 신비와 기적의 신앙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오늘 절망과 좌절 속에서 앞길을 헤쳐나갈 힘을 크게 잃고서 방황하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이 힐레숨의 이야기는 참된 “초월적 백신”으로 역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인류는 점점 더 큰 불확실과 지금까지 우리 공동체 삶의 모든 기반이 흔들리는 큰 위기의 시간에 봉착했고, 거기서 전통의 절대자, 기계적인 구원의 신은 참으로 무력하고,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깊은 아시아적 내재 영성과 초월의식과 많은 접점을 보이며, 그러나 자신 전통 고유의 인격적 신앙의 역동성과 친밀성, 주체성을 간직하고 있는 힐레숨의 신앙 이야기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 참된 자유의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거기서 그녀는 철저히 이타의 사람이 되어서 자신을 도울 수 없는 신을 오히려 자신이 돕고, 그와 같은 죽음의 상황에서도 결코 ‘인간다움’과 ‘인간성’이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해 내면서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그 신적 내재의 인간성을 알아보고 그들을 도와주고, 위로하고,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하면서 그들의 인간성을 북돋우는 것을 자신 신앙의 일로 삼았다. 그녀의 ‘사유(denken)’와 가슴의 ‘신앙(glauben)’이 함께 어우러져 고백 된 이 이야기는 오늘 전통의 군림하는 신, 외부에서 체제의 주인으로서 명령하고 기적을 행하고 서비스하는 신이 아닌 그녀의 또 다른 나로서, 내면의 깊은 목소리로서 전통의 신에 대한 노예성을 넘어서 다시 새길을 찾고자 하는 모두에게 큰 힘과 희망이 된다.

“나의 하나님, 아주 끔찍한 시간들이에요. 오늘 처음으로 타는 듯한 눈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며 어둠 속에서 누워서 인간적인 고통의 많은 상들을 내게 떠올렸어요. 당신께 아주 작은 것밖에 약속드릴 수 없어요. 미래에 대한 나의 염려를 무겁게 오늘 여기에 걸쳐놓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려면 확실한 연습이 필요해요, 한 날의 염려는 그날에 족하다. 내가 당신을 돕겠어요, 당신이 나를 떠나지 않도록, 처음부터 보증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단 한 가지가 나에게 점점 더 확실해져요, 당신이 우리를 도울 수 없고, 오히려 우리가 당신을 도와야 하고,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당신의 한 조각, 하느님을 구해내는 유일한 일이지요. 그리고 아마도 그 일을 통해서 우리가 고통으로 찢어지는 다른 사람들의 가슴 속에 다시 당신을 부활시키는 일을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나의 하느님, 내 안의 당신과 이런 대화를 통해서 점점 더 안정을 찾아가요. 다음에도 계속 이런 대화를 많이 나눌 것이고, 나를 떠나가려는 당신을 이렇게 막을 거예요. 나의 하나님, 당신도 앞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낼 거예요, 그러나 저를 믿으세요, 저는 계속 당신을 위해서 일할 것이고, 당신에게 충실히 머무를 것이며, 그리고 당신을 내 안에서 쫓아버리지 않을 거예요.”(6)

“나는 나 자신 안에 안식한다. 바로 그 자신, 내 속의 가장 깊은 곳 그리고 가장 높은 곳, 거기에 내가 쉬는데, 나는 그곳을 신이라 부른다.”(7)

“누구든 본집에 있다. 하늘 아래 본집에 있다. 만일 스스로가 모든 것을 짊어지기만 하면 땅의 어느 구석에 있든지 본집에 있다.”(8)

 

미주

(미주 1) 후레드릭 W. 모오트, 『중국 문명의 철학적 기초』, 권미숙 옮김, 인간사랑, 1991, 78쪽.
(미주 2) 이은선, “우리 시대 인물위기(認物爲己, 세계소외)의 병과 그 치유-유교와 기독교의 대화 관점에서”, <토계아카데미 봄 강연, <퇴계 사상에 비추어 본 현대인의 삶과 克己復禮>, (사)퇴계학진흥회, 2021.5.27., 역삼동 한국발명진흥회 대회의실, 052-087쪽.
(미주 3) 같은 글, 22쪽.
(미주 4) 이은선, “세월호 참사, 神은 죽었다. 나의 내면의 神은 이렇게 말한다”,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한나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 동연, 2018, 68쪽 이하.
(미주 5) 패트릭 우드하우스, 『에티 힐레숨-근본적으로 변화된 삶』, 이창엽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21.
(미주 6) Das denkende Herz, Die Tagebuecher von Etty Hillesum 1941-1943, Rowolt, 24Auflage, 2013, 149-150.
(미주 7) Ibid., 176.
(미주 8) Ibid., 179.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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