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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과 자유

기사승인 2021.04.18  0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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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와 信學 6

▲ James Mphahlele, 「Freedom and Security of the Person」 ⓒGetty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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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까지 ‘신적 인간성divine-humanity’ 또는 ‘신-인적 실존theandric existence’으로 표명된 인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 인격personality을 정신the spirit이나 자유, 영靈으로도 이름 지으며 인간의 내적 초월성으로서 오늘 온갖 물질화와 기계화, 일반화의 시세에 맞서는 개별적 실존적 정신의 자유로서 현현하는 장관壯觀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신적 초월적 차원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한편으로 한없이 수동적이고, 물질에 얽매여 있으며, 집단적으로 모여서 폭력을 행사하며 사는 존재이다. 베르댜예프는 그러한 인간의 양면성이 나타나는 방식을 “상전과 노예, 그리고 자유인”의 세 가지 방식으로 그리면서 상전과 노예는 동전의 양면으로서 모두 자유에 반하는 것인바, 그렇게 그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종속되어 있는 인간 노예성의 모순에 찬 모습이고, 그래서 “상전이 된 노예”라는 말이 성립되면서 인격이 그렇게 되는 일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일이라고 일갈했다.

인간의 신적 가능성인 ‘인격’과 ‘정신’과 ‘실존’이 그렇게 창조적 행위로서 바로 여기 지금에서 영원eternity을 드러내고, 그러한 자유가 영원과 영과 초월이 자신을 현현해 내는 방식이라면, 그와 반립하는 인격의 노예성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노예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 영원을 ‘존재being’ 안에 붙들어 매 두려는 것, 신과 하느님이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 어떻게든 나를 ‘존재자’로 확인시켜 지속시키려는 것, 내가 행한 모든 善을 존재와 업적과 기억으로 남게 하고, 또는 그와는 반대로 나의 악과 잘못과 부끄러움을 지우거나 왜곡시키고자 하는 것,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 악의 ‘존재’에 사로잡혀서 치를 떨 것이므로.

이러한 존재에의 인간 노예성을 유대·기독교 문명의 성서는 창세기 ‘선악과’의 설화로 원형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너’와 ‘나’를 구별하게 되었다는 것, ‘영원’과 ‘시간’의 구분을 알게 되면서 어떻게든 너에 대해서 나를 더 오래 지속하는 존재로 남게 하려는 시도, 그를 위한 욕심과 살인이 따라온다. 그리고 영원을 눈에 보이는 존재로 붙잡아 두기 위해서 제사가 생기고, 제단이 생겼으며, 종교와 문명과 성속의 구별이 생겨났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의식을 얻게 된 인간은 이제 자신은 풀 같은 찰나의 존재이고, 영원이 아닌 시간의 존재라는 의식 속에서 전율한다.

창세기 4장에 이어지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바로 그 인간의 존재에의 노예성을 드러내면서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 이야기가 아닐까 여긴다. 밭을 가는 농부인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고, 대신 양을 치는 목자인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다는 것, 땅을 차지하고 일구어서 거기서 농사를 짓고 나중의 ‘존재’를 위해서 곡식 등을 ‘존재’로 저장해두기 시작한 인간 농경 문명의 시작, 그 초기의 조상이 가인이었고, 거기서 하느님은 인간이 어떻게 ‘존재’와 ‘시간’과 ‘소유’와 ‘자기 경계’에의 노예성이 시작되는지를 아셨지 않을까? 그래서 그 인간 문명의 조상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고, 대신 그보다 훨씬 더 찰나와 순간에 살면서 유목인의 끊임없이 버리고 떠나기의 욕심 없음과 사심 없음, 세워진 경계를 계속해서 가로지르는 탈경계의 조상 아벨을 하느님은 더욱 인간다운 자유의 삶으로 보신 것이리라. 하지만 이 아벨은 가인에 의해서 살해를 당했고, 인간의 역사는 그리하여 가인에 의해 이어진 것을 서구 문명의 한 토대가 된 유대·기독교 성서는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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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의 또 다른 축인 그리스·로마 사상의 파르메니데스나 플라톤이야말로 서구 존재론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말 ‘변화란 없다’나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구상은 모두 초월을 ‘존재론ontology’으로 표명하기 위한 이상이다. 서구 중세로 넘어와서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긴 논쟁과 그러한 존재론적 사고의 극단인 ‘유명론唯名論nominalism’은 생명을 존재론화하고, 대상화하며, 객체화하려는 존재에 대한 인간 노예성의 적나라한 표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구 근대로 넘어와서는 존재와 지속에 대한 추구는 물질과 부, 재산에 대한 추구로 더욱 사물화되었다. 오늘 한국 사회가 극심하게 겪고 있는 부동산 신화 문제나 학벌이나 외모, 건강에 대한 몰두는 바로 그러한 노예성이 참으로 천박하게, 일반적으로, 가장 일차원적인 대상에 대한 투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오늘 우리의 삶에서는 오히려 그 원함과는 반대로 그 욕구하는 자아를 바로 자신의 육체와 자신 외의 어떠한 타자도 허하지 않는 자기만의 좁은 세계, 그리고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몸이지만 결코 그 몸이 써보지도 못하는 가상의 화폐에만 한정시키는 존재의 축소와 세계소외를 불러 왔다.

이러한 서구적 존재에의 노예성에 대해서 동양적 삶과 인식의 방식은 우선으로 그보다는 좀 더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도 전통의 불교 방식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해서 空을 말하니 우선 그렇다고 할 수 있고, 동아시아 신유교 방식은 감각으로 확인되는 세계 존재에 관한 관심보다는 그 감각으로는 볼 수 없는 인간 마음心과 그 사이間에 대한 성찰에 집중해왔기 때문에 서구적 존재에의 집착보다 훨씬 자유로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두 문명의 차이는 세계 현실에서는 19세기 말 서로 간의 만남에서 신유교 국가 조선의 참패를 불러왔고, 이후 이를 만회하기 위한 한반도의 행보는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게 되면서도 한 가지로 세계 어느 곳에서의 삶보다 덜하지 않은 물질적 노예성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어쩌면 세계 조화의 관념이나 무극無極이나 태극太極, 리理와 같은 전체 포괄적 일자一者에 대한 존재론적 노예성이 너무 강해서 야기된 것일 수 있다. 서구 중세의 존재론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 세계의 다원성과 다면성, 생명과 있는 것은 갈등과 분열, 단절과 심연과 역설이라는 것을 외면하고 먼저 큰 존재론의 틀로써 만물을 한정하고, 거대한 조화the great Harmony의 관념으로 단독자 생명의 역동성과 창조성을 보지 않으려는 형이상학적 수동성이 전제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그리하여 우주적 일원론으로 흐르기 쉬운데, 여기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易’과 ‘道(길)’로서의 초월과 생명 이해, ‘삼신일체三神一切’의 역동성이 실존의 참모습이라는 한국 古사상의 이야기, 또는 같은 신유교적 사고이지만 ‘생리生理’로서의 理 이해를 강조한 것 등이 그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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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사유적 산물이라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양 사고에서 칸트가 그 인간 사유의 힘을 철저히 파헤쳐서 우리 앞의 모든 대상과 자연, 존재가 감성의 사유 형식인 시공과 지성의 형식인 범주를 통해서 구성된다는 것을 밝히기 전에는 내 앞 존재의 강력한 힘에 눌려서 노예처럼 살아왔다. 여기서부터 해방되기 시작한 인간 사고의 역사가 서구에서 계몽주의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러나 인간은 아직도 자신 사유의 구성의 힘을 믿지 못하고 외면에 끌려다니고 있다. 아니면 그 구성을 왜곡시켜서 거짓 외물을 만들고, 그것을 우상화하기도 하고, 그리고 한번 구성한 것을 영구히 고정하고, 사물화하고, 객체화해서 그것으로 다른 변화와 움직임, 차이와 나아감을 막고자 한다. 전체주의의 시작이 바로 그것이고, 각종 독재와 기득권의 보수화와 가부장주의, 온갖 이즘의 탄생, 거기에 더해서 사실 사회 제도나 리추얼, 우리의 역사나 언어도 그런 존재론화와 무관하지 않다.

모든 존재자는 이미 ‘과거’이다. 과거의 경험과 사유의 구성이 응축된 것이고, 그러므로 존재에의 노예성은 과거에의 노예성이며, 거기에 대한 자유는 바로 그 올무를 털어내는 것이다. 인간 인격의 자유와 정신과 실존의 역동성과 창발성을 강조하는 베르댜예프는 존재에의 인간 노예성을 가장 근본적인 노예성으로 파악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자유와 실존, 정신이란 그러한 과거적 결정론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을 역설한다. 모든 존재가 이미 사유의 합리화의 산물이라면 그 합리화의 응고체, 과거의 관념으로부터의 벗어남이며, 뛰어넘기이고, 저항이며, 투쟁과 초월인 것을 밝히는 의미이다(니콜라스 N.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이신 옮김, 늘봄 2015, 108).

자유는 그러나 단순히 이성적 합리화의 연장선상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신적 인간성으로서의 인격의 초월적 정신성을 밝힌 의미에서 자유는 존재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無, 무근저, 비존재에 근거하고, 근거가 결여되어 있고, 존재 때문에 결정되지 않는다. 또 존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닌 자연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다(같은 책, 101쪽). 이것을 자연과 합리와 결정론과 운명, 그리고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자유와 정신과 실존과 인격의 현존이라고 명명하고, 신비와 역설, 믿음(信)의 창조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초월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신적 인간성이고, 동아시아적으로 말하면, 성·명·정과 심·기·신(性·命·精/心·氣·身)의 세 차원을 모두 묘합하는 인간 정신과 마음의 주체적 자유로서 표현되는 인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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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화와 실체화를 추구하는 존재에의 인간 노예성과는 달리 인격과 자유, 정신은 단독적이다. 매 순간 새롭게 되는 것이며, 일반과 필연은 없고, 일체가 개체적이며, 주체적이고, 유일무이하다. 이 단독과 자유와 실존을 훼손시키고 정지시켜서 객관의 존재자로 만들어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고 하고, 심지어는 신까지도 그렇게 물질과 자신의 관념과 개념 안에 가두려고 하는 것이 잘못된 종교화이고, 왜곡된 영성화이면서 배타적인 합리화와 신학화이다. 여기에 반해서 참된 초월은 오로지 단독자 안에서 현현되고, 자유와 정신으로 드러나며, 구체성 안에서 창조하고, 삶을 바꾸고 해방한다. 객체로서의 존재나 보편적인 일반자의 존재는 주체의 관념적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성이지만, 그러한 추상의 일반자가 먼저가 아니라 실존의 심층에 있는 주체와 개체적인 것이 먼저이고, 그 구체적이고 반복 불가능한 개체적 실존을 통해서 보편이 개시開示되는 역설인 것이다.

보편은 결코 서양 중세의 신의 존재 증명에서처럼 여기 이곳의 구체와 개체와 실존과 동떨어져서 절대의 존재로 존재화되어 또는 사유화思惟化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응축과는 달리 찰나의 영靈으로서, 인격의 자유로운 판단과 결단 속에, 사랑과 연민의 움직임 안에, 되어 감 속에서 계시된다. 그래서 자유의 영역은 일반자(the common)의 영역이 아니라 특수자(the unique and particular)의 영역이고, 정신의 영역이며, 신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who I am. 출애굽 3:14)’라고 했다면, 거기서 역점이 ‘나’에게 있는 것이지 ‘존재한다’라는 데 있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같은 책, 100쪽).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세계를 구상하지만, 그 세계는 객체화이며, 타락 때문에 만들어진 존재와 일반과 필연의 영역이다. 그리하여 “존재는 실존하지 않는다(Being does not exist)”. 그러한 관념화는 거기에 반하는 자유조차도 ‘필연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필연과 결정론의 요청으로 환원하고, 그래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서구 근대의 계몽주의와 관념주의는 “이성의 승리”는 될지언정 모든 개별성과 인격성과 정신의 창조성을 죽게 만들고, 결국 오늘 우리가 21세기의 현실에서 잘 목도하듯이 세계 존재론화의 또 다른 극단인 ‘자동화’와 ‘기계화’는 모든 생명을 반생명과 비인격과 동일화의 전체주의 제국 안으로 삼켜버린다. 자유는 결코 필연이 아니고, 일반이 아니며 예외이고, 돌출이며, 창조와 낯설음, 돌연변이와 예측불허이지만, 그에 반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 자동화와 기계화 세대의 깊은 불신앙이며 불경不敬인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딱정벌레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계층적 질서는 사물과 추상 간의 파괴적인 질서이다. 그것은 파괴적이고 노예적이며, 거기에는 관념적 질서로서도 또 현실적 질서로서도 인격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인격은 모든 존재의 밖에 있다. 그것은 존재의 반대편에 서 있다. 인격적인, 참으로 실존적인 의미에서 현실적인 일체의 것은 일반적인 표현을 취하지 않는다. 그 원리는 비유사성dissimilarity/같지 않음이다.”(같은 책, 106쪽)

“불변의 질서 영역으로서의 존재, 추상적 일반자 영역으로서의 존재라고 하는 추상적 관념은 항상 인간의 자유로운 창조적 정신의 노예화이다. 정신은 존재의 질서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질서에 뛰어들고, 질서를 방해하고, 질서를 변경할 때도 있다. 이때 정신의 자유에 인격적인 실존이 관계한다. 정신은 존재를 이차적 문제로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노예성의 기원은 대상으로서의 존재 곧, 합리적이든지 생기론적이든지의 형태로 외재화 되는 존재이다. 주체로서의 존재는 전혀 다른 종류를 의미하고, 다른 명칭을 가져야 할 것이다. 주체로서의 존재는 인격적 실존이며 자유이며 정신이다.”(같은 책,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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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자유에 대한 메시지는 인류 정신 사조로서의 실존주의가 물러난 후 많이 잊고 지내던 것이었다. 사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인간의 문명과 특히 한반도의 시간은 모두가 얼마나 스스로의 존재(시공)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몰두한 시간이었나? 자본주의의 남한은 거기에서 아무리 종교와 신이 번창했다 해도 그 태반이 물질과 부라고 하는 참으로 가벼운 존재의 확장을 위해서 쓰인 경우이고, 나 개인의 경우에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그에 더해서 일종의 命이라고 생각해온 ‘글쓰기’와 관련해서도 누군가가 지적한 대로 자신의 사유를 글로 써내기 위해서 책상 앞에 앉는 순간 그는 아류에 불과한 사람으로 전락할 뿐이라는 지적처럼-그 이유는 자신 사유의 창조를 ‘글’이라는 실체와 시공의 존재물로 더욱 공고히 하고 영구화하려는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존재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은 정말 떨쳐버리기 힘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가운데 사실 우리 ‘언어’와 ‘말’, ‘글’이라는 것도 모두 과거에 이루어진 것이고, 과거 실존의 축적물이고, 응축이며, 생명의 응고되고 경화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로부터의 해방과 자유함, 저항과 새로운 창조도 추구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 모든 경전은 나의 마음의 각주’라는 표현은 웅대한 선언이고, 그에 반해서 자신 종교의 경전만을 유일무이한 진리의 모집으로 고집하는 것, 또는 한 경전을 오로지 그 경전의 언어로만 주석하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등은 모두 위에서 살펴본 존재에 대한 인간 노예성의 뚜렷한 표현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언어가 없으면 인간의 삶은 가능하지 않으며, 無와 空, 사이(間) 또는 행위라는 것도 형태의 존재(有)와 가만히 있음(가능태)이 없다면 나타나지 않고, 드러나지 않으며, 알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다시 그 필연을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다. 정신의 초월과 보편이 오직 형태와 개별과 단독의 자유와 창조, 행위를 통해서 나타난다고 했다면, 즉 글과 말과 표현이 없다면 그 초월과 정신과 자유도 없는 것이 되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시 ‘일원론’도 아니고, ‘이원론’도 아닌 ‘불이不二’를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천동설(하느님)’도 아니고 ‘지동설(세계)’도 아닌 ‘인동설(주체)’의 易이나 자유를 말할 뿐이며, 그래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오로지 그 不二에 대한 실존적 ‘믿음(信)’과 그 신비와 모순과 역설 앞의 ‘두려움과 떨림(敬)’의 행보를 ‘지속하는 일(誠)’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 信學과 仁學이 요구되는 근거이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경전, 사회공동체적 규율과 습관, 언어와 종교적 의식(ritual儀式) 등은 또다시 생각해 보면, 앞에서 우리가 언급한 ‘너는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슬로터다이크도 지적한 대로, 이미 우리가 과거의 무수한 순간에 우리 개인적 삶과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창조하고, 저항하고, 구습에서 벗어나고자 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행위하며 얻은 새로운 계시들의 집적이고 응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계시들을 기억하고, 반복하고, 체화하고, 정리하고 체계를 세워서 우리 몸의 습관과 공동체의 습속으로 다듬은 것이 그러한 예禮와 리추얼로 표현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것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여기 지금의 실존의 자유에 대해서 반대하고, 억압하고, 노예화하려는 악한 보수(保守the conservative)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 성찰이다. 다시 생각하면 오히려 우리가 여기서 행위할 수 있고, 창조할 수 있으며, 더욱 자유하고 인간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고, 토대이며, 근거(誠)라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동아시아 전통의 경전 《중용中庸》은 그 26장에 그와 같은 정리와 지속성의 체화(誠)를 찬양하는 송가에서, “성실함은 스스로를 이룰 뿐 아니라 만물을 이루는 것이다. 자기를 이룸은 ‘인仁’이고, 만물을 이루는 것은 ‘지知’니, 인간성(性)의 덕이다. 안과 밖을 합하는 道니, 그러므로 때에 따라 적용하여 쓰는 데 마땅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어진 27장에서 “넉넉하고 크도다! 예법의 의식儀式이 삼백 가지이고, 행동거지의 의식儀式이 삼천 가지로다!”라는 노래로 인간 지속성의 노력과 자기 단련과 수련의 위대함을 밝혔고, 시중의 도로서 결단과 요청의 순간에 인간 정신의 덕으로 현현되는 초월의 계시를 찬양했다.(1)

동아시아 유가의 역사에 전설적인 孝의 성인聖人으로 이름이 높은 순舜임금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그의 인격적 품성을 드러내는 말로 맹자는 ‘사기종인舍己從人(나를 버리고 남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을 썼고, 조선의 퇴계 선생도 그의 언행록에 “불능사기종인不能舍己從人, 학자지대병學者之大病(나를 버리고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학자들의 큰 병이다)”이라는 말씀을 하면서 당시 서로 목숨까지 빼앗는 극한의 대립과 갈등으로 당파로 나뉘어 싸우는 세태를 크게 염려하셨다. 그런데 이 말은 언뜻 들으면 오히려 지금까지 우리가 여러 면에서 비판한 존재에의 노예성에 부합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표피적인 해석으로만 보자면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따르라’라는 것이 지금까지 강조한 주체와 정신의 자유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피동적으로 따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이 유교 성인聖人 순임금의 인격을 지시하는 언어라고 했다면, 거기서의 ‘나(己)’란 실존적 정신의 자유로서의 내가 아닌 좁은 사적인 나, 물질과 부와 이름에 모든 것을 거는 이 세상적인 나를 버리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고, 그에 반해서 ‘다른 사람(人)’이란 가장 가깝게는 바로 나 밖의 또 다른 나, 즉 ‘너’의 의견을 경청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그와 함께 협력으로 조화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보면, 여기서 기(己), 나의 정체성이란 이미 과거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나를 버리라는 것은 과거 나 자신으로 알았던 모든 습속과 패턴과 잘못을 버리고, 다시 말하면 매 순간 너의 삶을 변화시켜 바로 너 안의 본디 정신과 실존의 자유성과 창조성, 인격성으로 자리하고 있는 ‘보편의 인간성(人)’을 따르고 실현하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다. 매번 매일의 실존에서 사기종인의 메시지는 그렇게 과거 존재에의 고착을 끊고 다시 새로운 몸과 나로 거듭나라는 주체와 행위와 사랑과 용기의 자유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이 된다. 인간 존재에의 노예성이 가장 절실하게 표현된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이고, 거기로부터의 해방이 어떠한지를 더 따라가 본다.

미주

(미주 1) 이은선,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16, 292쪽 이하.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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