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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인격주의와 휴머니즘의 차이는 무엇인가?

기사승인 2021.04.04  15: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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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와 信學 5

▲ 개체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기를 개방할 수 있는 인격주의란 무엇일까 ⓒGetty Image

시작하는 말 - 인간학적 이해에서의 ‘수직적 긴장’

지난 ‘사유와 信學’ 4편에서 베르댜예프는 우리 인격의 자유와 선한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시 ‘신적 보증’을 말했고, ‘신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언어를 가져왔으며, 거기에 더해서 ‘원죄’라는 말까지 언술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매우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극단적 유물론의 시대에, 그것을 넘어서 다시 우리 삶의 다른 차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고투하는 상황에서는, 그와 같은 전통적 관습의 신학 언어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보다는 여기 지금의 인간 실존적 정황에 더욱 집중하면서 그로부터 새로운 초월에 관한 언어(信學)를 얻기를 원하고, 사실 베르댜예프도 유사한 의미에서 그토록 ‘인격’을 강조한 것이며, 자기 뜻을 ‘인격주의’로 밝히면서 통상적인 영혼soul과 육체의 이원론을 넘어서 ‘정신the spirit’을 강조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도 왜 신적 보증이나 신격 또는 초인격 등의 언어를 계속 쓰면서 자신 안에 모순을 감내하려는 것일까? 그런데 그러한 질문 전에 도대체 인간의 인격이라는 것이 어떤 보증이 가능한가, 또는 ‘최종 보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는 자신의 인격주의는 보통 통상의 ‘인본주의humanism’와는 다르다는 것을 매우 강조했는데, 그러나 그럼으로써 자신이 그렇게 넘어서고자 했던 서구 존재론이나 객체주의에 다시 빠진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의구심은 우리가 지금까지 베르댜예프의 인격주의와 많이 상관된다고 여기면서 계속 함께 살펴보고자 한 퇴계 등의 조선 성리학 언어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제기할 수 있다. 물론 퇴계 선생은 신의 보증을 말하지 않았고, 신神이나 상제上帝 등의 인격적 신적 언어는 거의 쓰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인간성(性/命)의 초월적 차원을 보증해 주는 우주적 리(天理 또는 理) 또는 태극 등이 거의 전제로서 우선적으로 명시되어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21세기가 되기까지의 서구 기독교적 존재론을 다시 한 번 크게 전복시키기 원하는 독일 하버마스 이후의 사상가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그의 2009년 저술 『너는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에서 인간 삶에서 어떤 경우에도 온전히 벗어날 수 없는 “수직적 긴장”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은 인간 문화가 지속적으로 권위와 계급을 탈신화화시키고, 해체시켜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계속 나름의 비교와 등급, 선택을 말하는 위계 의식의 구속력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것을 말한다. 즉, 인간과 그 삶은 강한 평등주의적 에토스에도 불구하고 항상 ‘더 높은’ 또는 ‘더 깊은’ 것에 관한 관심과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하는데, 비록 그 수직적 긴장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지만, 이 비교의식, 항상 더한 것을 추구하고 더 높은 것을 바라는 척도들의 실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미주 1) 그래서 캔 윌버 같은 사상가도 우주 존재자 전체를 ‘더’ 공평하게 자리매김 하기 위해서 ‘하이라키hierarchy’를 다시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대신 각 상위 차원이 하위 차원을 초월하고 동시에 포괄하는 ‘홀라키holarchy’의 새로운 위계론을 말했고, 여기서 베르댜예프가 말한 인격의 ‘신적 보증’이라는 언어도 나는 바로 그러한 인간 이해에서의 수직적 긴장의 실재가 표현된 것이라고 여긴다. 다시 말하면 인격에 대한 ‘최고’의 보증을 위해서, 최종의 증거는 여전히 ‘神’이라는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으므로 그러한 내적 아이러니를 감수한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 사회에서도 공평과 공정에 대한 열망과 평등주의에 관한 관심이 폭발하고 있다. 하지만 먼저는 주로 개인주의적 ‘능력 평등주의’에 머무는 것 같고, 거기서의 ‘능력’이라는 것도 주로 표피적인 인간 지식적 차원에 많이 매몰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늘은 그 능력 평등주의라는 것도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회 구조적 불평등과 불의가 이미 누적되어 표현된 것인가가 더욱 드러나면서 우리 사회의 공평과 공정에 대한 요구는 더욱 분화되고 급진화 하고 있다. 이번 성찰은 그러한 공평과 공정의 ‘최고’ 보증이 과연 가능한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근대 휴머니즘의 한계와 초월자

베르댜예프의 인격주의는 우리가 보통 익히 알아온 ‘인본주의humanism’와 어떻게 다른가? 그는 분명히 밝히기를, 인격 내지는 인격주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의 인격이 사회나 우주, 또는 객체화로 노예화된 세계와의 관계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神과의 관계(by its relation to God)”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아는 일이라고 명시했다. 그리고 이 감추어져 있고 소중한 관계로부터 인격이 세계와의 자유로운 관계를 위한 힘을 얻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래와 같이 이기적 자아주의에 빠진 사람의 자아주의나 개인주의가 어떻게 그가 말하는 인격과 다른지를 적시한다.

“자아 중심적인 개인은 나 아닌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속에 자기를 폐쇄하는 나 아닌 나 the non-I의 세계에 의해서 노예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자아주의는 세계에 의한 결정의 한 모습이다: 거기서 자아 중심적 의지가 외면적인 암시인 것은 세계가 자아 중심적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 인간의 인격이 하나의 우주인 것은 그 인격이 세계에 대해서 자아 중심적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조건에서이다.”(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지음, 이신 옮김, 『노예냐 자유냐』, 늘봄, 2015, 57쪽)

이 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낸 것처럼 베르댜예프는 참다운 인격이란 결코 자기폐쇄가 아니라 모든 것을 부수는 객체 세계를 자기 안으로 흡수하면서 자신을 사랑 속에서(in love) 개방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전개에서 휴머니즘은 “신적 인간성divine humanity”을 향한 한 변증법적 계기가 되는데, 거기서 휴머니즘의 오류란 인간에게 과도하게 주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긍정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점, 즉 인간에게 충분히 중점을 주지 않았고, 그를 세계에서 독립시키는 보증을 주지 못하고 사회와 자연에 예속시키는 위험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것은 곧 ‘인격’의 형상이 단지 인간의 형상만이 아니라 동시에 신의 형상도 나타낸다는 것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고, 휴머니즘이 “인격은 그것이 신적 인간적divine-human 인격일 때에만 인간적인 인격일 수 있다”라는 역설과 신비를 알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휴머니즘의 오류와 한계에 대한 언급과 함께 베르댜예프는 객체 세계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이 인격의 “신적 인간성divine-humanity”임을 강술한다. 그것은 인격은 결코 대상들의 세계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신적 형상이 숨겨져 있는 주체성에 의해서 되는 것이고, 그렇게 인격은 “신-인적 실존(神-人的, theandric existence)”이라는 말이다(같은 책, 58쪽). 이러한 선포 앞에서 전통 기독교 신학자들은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홀로 “신-인(God-man)”이고 인간은 피조물로서 신인일 수 없다고 반박할 것이지만, 그는 그러한 주장은 여전히 “신학적 합리주의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논법이라고 물리친다. 대신 자신이 말한 인간에 대한 진리는 그러한 교의적 공식 너머에 있으며, 그것에 의해서 완전히 담을 수 없는 “실존적 정신적 spiritual 경험의 진실”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인神人 것의 방식은 그 나름으로 “유일한(the Unique One)” 것이어서 인간이 그럴 수 없지만, 인간 속에는 신적 요소가 있고, 인간이 자기 속에 신의 형상을 지니며, 그것 때문에 인간이 인간 된다는 것은 어떤 신학적 또는 철학적 일원론이나 이원론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하나의 “상징”이며, “모순contradiction”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베르댜예프는 그 인격 이해로 전통적 인습의 서구 기독론이나 신학적 철학의 합리주의를 훨씬 뛰어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수의 그리스도 유일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각자 나름의 신적 유일성, 그 신적인 것은 인간을 넘어서는 것이며, 신적-인간적 형상 속에서 인간적인 것과 신비하게 결합하여 있는 초월적인 것으로 가능해지는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베르댜예프가 이 세상의 어떤 동일철학이나 일원론, 내재주의로는 파악될 수 없고, 그래서 그 신비의 표현을 위해서는 하나의 이원론적 계기, 초월 과정과 無와 그 무의 심원으로부터의 탈출 경험을 전제로 한다는 “신적-인간성 the divine-humanity”의 실제를 본인은 “聖의 평범성의 확대”라는 말로 표현했었다. 이 언술은 여기서 베르댜예프가 ‘내재주의 immannetism’를 비판했고, 우리가 계속해서 기독교 신학과의 대화로 이끄는 동양적 사고, 특히 신유교적 사고는 일종의 내재주의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대화는 베르댜예프도 자신의 인격주의로 나름으로 서구 전통적 ‘그리스도 독점’을 흔드는 것과 유사하게 예수에서만의 신적 인간성, 그리스도성의 전유를 해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적 보증의 보편성과 평범성을 더욱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2)

베르댜예프는 인간은 하나의 상징이고, “어떤 유별한 것의 표징”으로서 세계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거기서 자유롭고, 인간을 예속에서 해방할 가능성이 유일하게 이러한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것이 바로 자신 인격론의 “종교적 기초”라고 밝힌다. “신학적 기초가 아닌 종교적 기초(not theological foundation but the religious)”라는 것인데, 즉 어떤 교리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경험된 것의 기초이고, 실존적인 기초라는 강조이다(같은 책, 59쪽). 일반 인본주의의 한계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상징성, 세계의 형상에 머물지 않고 신의 형상을 지니기도 하다는 것을 덜 강조한 것이며, 그래서 하나의 합리주의로 전락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인격성은 ‘신-인간God-human’이어야 하고, 사회는 ‘인간적human’이어야 하며 인격에 의해서 ‘침투 permeation’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강조이다(같은 책, 61쪽.)

인격과 성격, 사명의식, 동경과 사랑 그리고 죽음

인간이 그렇게 모순의 인격이고, 신-인간성의 상징이며, 세계와의 관계에서 인간이 맞닥뜨리는 가장 큰 위험이 바로 ‘자동화’와 ‘기계화’라고 했다면, 그것은 인간 삶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곤란이 어디에서 유래하는가를 잘 밝혀준다. 그것은 인간이 신-인간의 이중성의 존재로서 사회적이고 그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독립이고, 예외이면서 반복 불가능하게 자신의 자유를 실현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온다. 이러한 인간성의 이중성은 다시 그 인간성이 관계하는 세계가 다원적이라는 것과 연결되어서 오래된 ‘일一’과 ‘다多’의 관계의 문제, 어떻게 하나에서 다자多者로의 이행이 가능한지, 어떻게 하나가 다자에 도달하는가의  관계와 사랑의 문제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게 한다.

인격은 바로 ‘하나’와 ‘여럿’의 ‘결합union’이다(같은 책, 64쪽). 이 문제는 그러나 결코 합리적 기반에서는 풀 수 없고, 역설과 관계되는 인격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것인데, 이렇게 인격이 하나와 여럿의 결합이고, 거기서 선택과 판단과 분별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 ‘성격 character’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격이란 하나의 자연적인 재질인 ‘기질 temperament’과는 다른 것으로서 ‘자유’를 전제로 하고, 인격의 집중이며, 세계와의 관계에서 무분별하고 상관없음이 아니라 ‘선택’을 했다는 것, 구별을 만들었다는 것, 그래서 “성격은 인간에게 있어서 정신적 원리 the spiritual principle의 승리”가 된다(같은 책, 61쪽). 하지만 여기서 자유라는 것은 다시 초보적인 의미의 의지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깊은 ‘통합체 integrity’로서의 인간의 실존과 연결되어 있는, 곧 정신의 자유, 창조적 정신적 역량의 자유를 말하는 의미에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앞선 성찰에서 우리는 한국의 古 인간학 언어인 ‘性·命·精’과 ‘心·氣·身’의 언어를 가져와서 인간 영(정신, spirit)과 혼(soul), 그리고 육체(body)의 세 활동을 지시하는 말로 이해했다. 이 세 차원을 주체적으로 통합하고, 리드하고, 종합하는 정신(性/心)의 힘, 인간의 혼적 삶뿐 아니라 몸적 삶도 관통하면서 정신은 통합체로서의 인격의 형태와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는 것으로 파악했고, 그런 의미에서 정신(인격)의 자유는 결코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어야 하며, 인간은 자유로워야지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론한 베르댜예프의 언어는 매우 강력한 진실을 밝혀준다.

“자유는 인권의 선언이어서는 안 되고 인간의 의무 선언 곧, 인격이 되기 위한 인격의 성격의 힘을 발휘하기 위한 인간의 의무적 선언이어야 한다. 사람은 인격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생명을 거부할 수 있고 때로는 그것을 거부해야 하지만 인격 곧, 인간의 존엄성과 결부된 자유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같은 책, 62쪽)

이렇게 인격의 자유는 권리가 아니고 오히려 의무이며, 우리가 통상 인간의 권리로 이해하는 것은 다만 예속에 불과할 뿐이라고 보는 베르댜예프의 인격 이해는 우리의 통상적인 인권 의식을 크게 뛰어넘는다. 그는 인격이 성격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모든 삶에서의 사명(使命) 의식과도 결합하여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여기서 사람들이 자신 내부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금욕주의’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만약 그것이 또 다른 굴종으로 변하면 배제해야 하지만 참다운 금욕주의는 결코 굴종이나 복종이 아니고, “인격의 본질은 저항이며 부단한 창조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인간 삶에서의 영웅주의의 실행을 지시한다고 밝힌다(같은 책, 65쪽). 이것은 또 하나의 수직적 긴장의 실재를 밝혀주는 설명이다.

인간이 위로 또는 내면의 깊이로 초월하고자 하고(“인격은 초월자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인격은 공동적이다”라는 말대로 관계가 본질인 인간의 초월과 관계에 대한 추구는 동경yearning이나 사랑love의 경험으로도 표현된다. 인간 속에는 거룩한 생활과 순결, 또는 낙원에 대해 동경이 깊이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21세기 오늘날은 인류 삶에서 신들의 황혼이 더욱 가속화되는 가운데 ‘사랑’이라는 인간 경험이 그 신의 자리를 거의 대신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모든 추구와 하나 됨에의 열정과 인내, 불안은 인간 안에 인격적이지 않은 것과 인격적인 것, 아니면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유한과 무한, 상대와 절대, 하나와 많은 것,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 등이 서로 모순과 상극으로 함께 있으며, 또한 그 하나 됨이란 무한의 객체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의 주체성, 거기서 자기가 초월 되는 인격의 주체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야기되는 것이다(같은 책, 77쪽).

베르댜에프는 진정한 불사不死는 바로 이러한 인격의 불사를 말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보통 영혼 불멸에 관한 심령 주의자들spiritualists의 통속적인 주장이 말하듯이 인간 몸의 구조가 분해하는 즈음에서 몸의 형상이 상실되면서 (영)혼soul이 몸에서 분리한다는 것이 인격의 불멸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같은 책, 70쪽). 인간의 자연적인 불멸성은 없고, 기독교 신앙이 통속적인 영혼불멸설과는 반대로 ‘부활’, 특히 ‘몸’의 부활을 말하는 것은 바로 ‘인격’의 부활, 즉 몸과 혼과 영 전체를 관통하는 全 인격(정신)의 부활을 밝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또한 몸의 부활이며, 인격의 불사인 것이다. 이것은 그러나 다른 의미로는 인격만이 진정으로 죽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러한 베르댜예프의 사고를 번역 소개한 신학자 이신(李信, 1927-1981)은 자연적 몸으로서의 인간은 오히려 이 세계에 머무는 동안에 남겨지는 유전자 등으로 불사이고, 진정한 죽음은 객체화의 노예로 전락하는 인격과 정신의 죽음이라고 발설한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인격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죽음이라는 것이다.(3)

마무리 성찰 - 인간공학Anthropotechnik 대 仁學·信學

신의 죽음 이후 그래도 인간 삶에서 상승과 초월과 동경의 “수직적 긴장”이 없을 수 없다는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의 언술대로 베르댜예프도 그러한 실재의 표현으로서 인격의 ‘신의 보증’을 말했고, 초인격, 신격, 초월자, 사명의식 등을 말하면서 인간 인격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어떤 ‘최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그려주었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공학人間工學”을 제시한다. ‘너는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라는 모토 아래서 인간의 자기 수행력에 근거해서 어떻게 훈련과 극기, 자기 수련의 연습을 통해서 21세기의 인간이 자본주의와 자아주의의 극단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를 제안한 것이다.

2천년대 초 한국의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이름을 바꾸어서 IMF 이후 인간 존재를 철저히 자원화하고 기계화하고자 했던 의도와 유사한 감을 풍기는 이 언어 ‘인간공학’은 서구 현대에 와서 특히 미셸 푸코(M. Foucault, 1926-1984)의 자기 테크놀로지로서의 자기 수련적 사고를 크게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최근 푸코와 동시대의 철학자 ‘기 소르망’은 푸코가 1960년대 말 아프리카의 튀니지에 머물면서 8-10세의 소년들을 상대로 저열한 성 착취를 저질렀다고 폭로했다. 특히 감옥제도와 성(性)의 역사에 관한 연구로 지금까지 서구 문명을 이끌어왔던 핵심 도덕 권위들을 해체하면서 신 없는 자기 수련의 테크놀로지를 제안한 사상가가 그와 같은 “저열하며, 도덕적으로 추한” 아동 성 착취자였다는 것이다.(4)

이러한 뉴스에 더해서 오늘 한국 사회에서 듣는 또 다른 뉴스는 우리가 본 성찰에서 베르댜예프의 인격주의에 대한 대화 파트너로서 많이 거론한 한국 신유교 정신의 청학동 서당에서 아이들 사이에서 말할 수 없는 폭행과 가혹 행위가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서구 기독교적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에서 다시 동아시아적 유교의 도의와 예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명분으로 세워진 청학동 서당에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동양의 내재적 자기 수련의 도덕주의가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한다면 그것은 너무 환원주의적이고 지나친 언술인가?

신의 황혼의 시대에 이렇게 동서의 두 대안적 시도가 모두 좌초한 것처럼 보이는 때에 한국 古 역사를 읽다가 다시 반가운 ‘말씀’을 만났다. 그것은 “만성환강(萬姓歡康)”이라는 표현인데, 단군 조선 34세 오루문의 시기(B.C. 795로 추정)에 큰 풍년이 들어서 “만백성이 기뻐하면서” 찬가를 지어 불렀다는 서술에서 나온다. 여기서 ‘모든 백성’을 가리키는 ‘만성(萬姓)’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있지만, 이번 본인의 발견에서는, ‘성(姓)’을 보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한 가부장주의적 영향으로 사람의 성(姓)을 주로 ‘아버지 남성’에게서 따오지만, 그 이전에 이 ‘姓’ 자를 보면, 인간은 누구나 다 ‘어머니 여성(女)에게서 태어난다(生)’는 사실을 더욱 밝히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원래 여성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고(姓), 그 본성으로서 ‘생명을 낳고 살리고 기르는 마음의 일(性)을 하는 것이며, 그래서 또 다른 고전 『중용』도 그 본성과 인격과 생명을 살리는 일을 ‘인간에 대한 하늘의 명령(天命之謂性)’이라고 했으며, ‘그것을 따르는 일이 진리이고(率性之謂道)’, ‘그 진리를 세상의 정치와 교육과 문화로 잘 펼치는 일이 참된 가르침(종교)이다(修道之謂敎)’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姓·性·誠’의 세 쌍의 언어를 얻었다. 이것은 참된 인격의 정신은 몸(姓)을 관통하고, 여성과 어머니는 인간 존재 됨의 기초와 토대로서 결코 차별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근거라는 것을 확연히 가르쳐준다. 그 姓이 바로 聖이고 초월이며, 그 몸으로서의 토대는 다시 또 다른 초월과 거룩인 정신(性)에 의해서 관통되고, 흡입되어야 하며, 마침내는 온전한 통합적 인격의 사람(誠)이 되어서 그의 말은 참된 믿을만한 인간적인 말(信)이 되고, 그의 행실은 진실하고 믿을 만해서 그 언어와 행위가 공적 기준이 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기르고, 그런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를 이루려는 일이 우리의 새로운 仁學과 信學의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철저히 인간에게만 집중하는 ‘인간공학’이나 아니면 반대로 초월적 神에게만 집중하는 전통 神學으로는 안되고, 그 둘의 모순적 연결, 그래서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고, 신비이며, 역설이지만, 동시에 다시 无이고 空이고, 虛이기도 하지만, 역동적인 易의 인간 수행력과 판단력과 행위력으로 나타나는 ‘인간성(仁)’, ‘인격’을 바탕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仁學과 信學은 그렇게 ‘더욱’ 여성주의적이고, 통전적인 神學이다.

이렇게 몸과 혼과 정신이 모두 통전되고 관통되어서 현현되는 것이 부활이고, 예수는 그것을 이루어서 이 땅의 몸의 세계에서 정신을 하늘에 두면서 몸으로 저항했고, 진정으로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살펴서 ‘필사적必死的’으로 아니면 ‘필생적必生的’으로 참 자유를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부활한 것이고, 우리도 진정 그러한 부활을 살아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닌가?(5) 仁과 信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듯이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명멸明滅’하고, 동아시아 『易經』 64괘의 마지막이 ‘미제未濟’의 진실을 가르쳐주듯이, 우리 인격은 그렇게 지속해서(誠) 우리 인격이 진정 인격이 되는 두뇌처인 타자와의 장에서 공경과 겸비의 ‘경敬’을 간단없이 살아가야 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자유와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왜 이 세상의 다원성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자유의 존재로 살지 못하고, 오늘에서 영원을 살지 못하고 노예처럼 사는가? 왜 이 세상은 인간적이거나 믿을 만한 세상이 되지 못하고 이렇게 서로 갈등하고 싸우며, 점점 더 파국을 향해 가는 것처럼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베르댜예프와 한국 信學의 성찰을 계속 따라가 본다.

미주

(미주 1) 페터 슬로터다이크, 문순표 옮김, 『너는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 오월의 봄, 2021, 31쪽 이하.
(미주 2) 이은선, 『한국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1, 29쪽 이하.
(미주 3) 이신 지음, 『李信 詩集 돌의 소리』, 동연, 2012, 135쪽.
(미주 4) 연합뉴스, 2021.3.31. “미셸 푸코, 소년들 상대로 성 착취했다” 기 소르망의 폭로. 영국 더 선데이타임스 인터뷰.
(미주 5) 이신, “병든 영원 永遠”, 같은 책, 130쪽.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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