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자연과 자유 - 우주의 매혹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

기사승인 2021.07.04  16:45:56

공유
default_news_ad1

- 사유와 信學 8

▲ 좋은 인류세가 될 것인지 나쁜 인류세가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Getty Image

1. 시작하는 말: 자연이란 무엇인가?

‘존재’와 자유, ‘신’과 자유에 이어서 세 번째 ‘자연’과 자유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고, 이 관계에서 야기되는 인간 노예성에 관한 것이다. 베르댜예프는 자신의 성찰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말하기를, 존재와 신에 대한 인간 노예성을 말하면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반박하기도 하지만, 이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가 『노예냐 자유냐』를 쓸 1930년대는 근대 산업 문명이 오늘처럼 크게 문제시되지 않던 때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과학을 통해서 자연을 길들이고, 그로부터 이익을 얻어서 인간 문명을 융성하게 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21세기는 생태위기와 특히 기후위기가 심각해서 예전처럼 자연을 인간에 대극으로 놓는 일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그런데도 자연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을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베르댜예프를 통해서 들어보고, 오늘 21세기의 정황에서 그 의미를 성찰해보고자 한다. 베르댜예프도 이미 당시에 분명히 말하기를, 자신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을 말할 때의 자연이란 결코 동물이나 식물, 광물, 별, 산림, 바다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이런 모든 것들은 각자 나름의 “내적 실존”을 가지고 있고, “실존적인 것”에 속하며, 그런 의미에서 객체화된 사물의 기구가 아니라는 것이다.(1) 이렇게 우리가 보통 쉽게 오해하듯이 그가 말하는 자연이 서구 근대의 기계론적 과학주의가 표방하는 자연이 아니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에서 그의 사상이 지니는 뛰어난 선취성과 앞으로의 인류 시간을 위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2. ‘자유(freedom)’에 대극하는 ‘자연(nature)’에 대한 인간 노예성

베르댜예프는 자신은 자연(nature)이라는 말을 문화(culture)나 문명, 또는 초자연이나 은총이라는 것 등과 대립하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다. 또는 자연이 우주(cosmos)나 하느님의 창조(the creation of God)라는 낡은 의미도 아니고, 특히 영혼(soul)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공간상의 물질(matter) 세계라는 의미로는 더더욱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 그 모든 것보다도 그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바로 “자유”에 대립하는 것으로서,(2) 즉 그에게서 자연이란 ‘자유’의 반정립으로서 ‘인격(personality)’에 대한 반정립이 되며, ‘정신(spirit)’에 대한 대극이 되어서 “근본적인 이원론은 자연과 초자연의 이원론이나 물질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또는 자연과 문명의 이원론이 아니라 자연과 자유, 자연과 정신, 자연과 인격의 이원론이다”라고 선언한다.(3)

이러한 선언과 이해는 그가 지금까지 밝혀온 정신적 인격주의의 관점에서 우리의 통상적인 자연 이해와는 많이 다르게 자연을 “객체화”, 즉 “소외, 결정화, 비인격”의 세계로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우주적 생명과의 친교 물음은 이처럼 자연을 객체화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그는 밝힌다. 즉 인격은 자연의 결정론적 순환에 대해서 전혀 다른 질서에서, 자유의 영역에서, 정신의 왕국으로부터 기원하는 하나의 새로운 힘으로 돌입해 오는 것을 밝히는 의미인 것이다. 물론 인간됨 안에는 우주적 순환과 연결된 자연적 기초 원리가 있다. 하지만 인간 안의 인격적인 것은 그와는 다른 별종의 기원과 별종의 질에 의한 것으로서 항상 자연적인 필연으로부터의 결렬과 단절을 나타내는 것임을 강조하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격이라는 것은 자연에의 예속에 대한 “저항(rebellion)”이라는 것이다.

베르댜예프에 따르면 인간은 객체화와 결정화에의 예속인 자연에의 노예성으로부터 부분적으로만 벗어날 수 있는데, 심지어는 자연이 아닌 사회(society)에서조차도 그 사회적 삶을 하나의 영원한 자연의 형태로 보기도 하고, 이것이 종종 사회의 이상적인 기반이 되기도 한다. 또한, 여기서 더 나아가서 정신 자체와 정신적 삶도 주로 동양주의적 사고에서 많이 등장하는 방식으로 자연주의적 이해로 ‘자연’으로 말하여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역에 자연적 결정론이 들어온 예라고 밝힌다.(4)

이러한 지적과 이해를 따른다면 동아시아 유교 텍스트에서 ‘초월(理)’의 개별적 내재를 뜻하는 ‘성(性, 性卽理)’이 종종 ‘자연(nature)’으로 번역되어 서양에 소개되는 것은 오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유(freedom)’나 ‘실존(existence)’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베르댜예프는 반복해서 강조하기를, 인간이 비록 자연의 부분으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결코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자연이 인간 내에 있지만 인격으로서의 인간은 자연이 아니라는 강조인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소우주”이지 우주의 일부가 아니고, 그 소우주로서 자연적 인과의 관계를 끊어내면서 의미와 목적으로 가득 찬 정신과 인격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존재임을 강술한다.(5)

그에 의하면 심지어는 자연의 영역조차도 완전히 닫혀 있는 질서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도 필연성과 인과관계의 불변성이거나 방해받지 않는 일관된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자연 질서의 통계적 해석이 그러한 자연에 대한 결정론적 해석을 제한하는데, 그것은 자연조차도 봉쇄된 질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심지어는 정신과 신조차도 종교 철학적으로 자연주의적으로 이해하면서 객체화의 결과인 자연에 대한 인간 예속을 정당화해 왔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객체로 변환되고, 소외되며, 비인격화되는데, 이렇게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광물이나 별까지도 그 실존을 예속하고 요술을 부리는 장소인 ‘이 세계(this world)’는 인격에 의해서 파기되어야 하고, 노예화되었으며 노예화하는 상황으로부터 놓여나야 한다고 강조한다.(6)

3. ‘우주에의 매혹’과 인간 노예성

이렇게 인간도 그 일부분이기도 한 산이나 바다, 광물이나 식물, 동물 등의 자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밝히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에의 노예성은 주체를 객체화시키고, 외부적인 결정론과 필연성에 얽매고, 항상 의존을 뜻하며 외적인 결정화를 의미하는 자연과 물질에의 예속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자연과학이나 기술과학을 발전시켜서 벗어나고자 했던 자연적 필연성으로서의 자연에의 예속성은 아주 소박한 예속성일 뿐이라고 한다. 그에 반해서 좀 더 미묘하고 섬세한 자연에의 인간 노예성을 그는 “우주의 매혹(the lure of the cosmos)과 그 노예성”이라고 명명하면서 이에 대해서는 인간이 깊이 황홀에 빠지며 동의하는 바라고 한다.

이 매혹은 인간이 한편으로는 자연법칙의 결정론과 지배에 대항해서 싸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주에 대해서 또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서, “세계의 조화(world harmony)”와 “세계 전체(world whole)”, “세계 일치(world unity)”나 “세계 질서(world order)”로 나타나는 우주의 매력에 기꺼이 빠지고, 그 안에서 “신적 조화와 질서” 또는 “세계의 이상적인 기반”을 보는 것을 말한다.(7) 이 우주에의 매혹과 노예성은 현실의 삶에서 여러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데, 베르댜예프는 예를 들어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D. H. 로렌스가 빠졌던 에로틱한 성적 매혹, 러시아의 ‘브 나로드(인민에게로)’ 인민주의 운동, 토지의 지상적 매혹과 혈족 종족주의, 또는 집단주의와 공산주의적 신비주의 등이 모두 그것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우주의 어머니 가슴’에 도달하려는 동경이고, ‘어머니 대지’에로의 귀환을 꿈꾸는 것이며, 인격적 실존의 고뇌와 제한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 얻고자 형상 없는 요소와의 융합을 희구하는 것인데,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개체적 실존이 도달하고자 하는 민족적 또는 사회적 집단주의도 그 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베르댜예프는 서구 정신사에서 ‘낭만주의자(the romantics)’의 ‘자연’에의 복귀와 그들의 자연 이해를 이러한 맥락에서 자리매김한다. 루소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고, 톨스토이에게도 자연은 거룩한 것이고, 은혜를 주는 것이며, 문명화된 인간에게 치유를 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베르댜예프에 따르면 인간이 주기적으로 이러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해도 그러한 우주적 자연에의 귀일적 태도는 노예적인 “의식의 환상(illusion of consciousness)”일뿐이라고 일갈한다.(8) 즉 인간은 자연의 필연성으로부터 구출을 바라고 문명을 통해서 그에 투쟁하기도 하지만, 우주의 자유를 구하고, 우주적 생과의 융합을 꾀하며, ‘세계영혼(a soul of the world)’의 존재에 대한 낭만주의적 신조를 통해서 우주 내부 생명과 하나됨을 꿈꾸어도 그러한 방식에서 추구하는 세계 통일과 조화로서의 우주 존재와 세계영혼의 존재는 객체화에 의해서 노예화되고 상처받은 인간 의식의 환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베르댜예프는 전체는 ‘정신(spirit)’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자연(nature)’ 속에는 없다는 것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우리의 인격이 그 관계에서 하나의 부분이 되는 우주의 계층적 통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세계영혼과 우주적 전체의 관념은 아무런 실존적 의미가 있을 수 없으며, 심지어는 자연과학에서의 현대물리학도 ‘전체적인 통일체’로서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음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낭만주의자들의 우주에 대한 오래된 매혹은 인간 정신의 또 다른 노예성이고, ‘소피아의 교리(a doctrine of a Sophia)’라든가 ‘신지학(神智學)자들’의 신비 사조 속에 있는 일원론적 우주 계층 이론이 인간의 인격을 그 안에 종속시키는 예라고 언술한다.(9)

4. 세계 과정의 ‘목적론적 해석’과 인간 노예성

베르댜예프는 자연에의 인간 노예성을 말하면서 세계 과정의 목적론적 해석도 바로 이에 속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우주 과정의 목적론적 해석으로서의 객관적 목적론도 인간의 자유와 인격과 창조성에 역행하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상적으로 정신화된 결정론”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목적성은 오직 부분적인 것이고, ‘전체’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목적성은 세계의 어떤 부분적인 과정에 내재하는 것이지 객체화된 세계의 무한성은 우주적 전체일 수 없다.(10) 그런 맥락에서 예를 들어 만약 두 유성 간에 충돌이 생겨서 그 결과로 지구의 파괴와 같은 우주적 파괴가 일어나도 그것은 비목적적이고 우연적인 사태일 뿐이지, 그것을 어떤 목적론이나 그러한 사고가 일어날 법칙 같을 것이 있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기적’은 결코 어떤 자연법칙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적 삶 안에서 “의미(meaning)가 출현”하는 것이고, 부분적이고 특수한 법칙에 종속되는 자연에서 “정신적인 힘이 자연 질서 속으로 돌파”하여 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전체의 법칙은 없고, 우주의 법칙도 없으며, ‘만유인력’의 법칙도 결코 우주적 법칙이 아니고 부분적이며 부분적인 것과 관계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인간 자연관이 한편에서는 이미 완전히 논파된 자연에 대한 유물론적 기계론의 일원론으로 빠지던지, 아니면 세계영혼이나 세계 조화를 인정하면서 정신주의적 이상주의의 그릇된 일원론적 유혹에 넘어가는데, 그러나 그 모두는 인간 자연에의 노예성이고, 거기서의 자연과 우주는 진정한 세계가 아니고, 타락의 상태에 있는 것이고, 소외되고 비인격화된 노예화의 세계라고 일갈한다.(11)

베르댜예프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을 파괴하면서 문명을 건설하는 기계주의에 계속 머물 수가 없다. 그래서 그렇게 자연의 내적 생명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반복적으로 자신 속에 우주가 복귀하기를 바라는 것인데, 특히 “우주의 매혹”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서 좁은 개인적 존재의 경계를 넘어 우주적 원초적인 요소와 하나 됨을 희구하는 것이고, 거기서 모든 “밀의적 제사(orgiastic cults)”가 기인한다고 말한다. 서구 정신사에서 휠덜린의 비극작품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속에 묘사된 우주의 매혹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밝히면서 그러한 “인간을 포용하고 그 인격을 삼키는” “이교적 우주 중심주의”에 대해서 그는 “기독교적 인간 중심주의”를 대치시키기도 한다.

그는 인간 정신과 인격은 결코 자연적 유기체의 일부분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래서 인간 사회성을 강조하면서 그 사회성을 유기체적 관념으로 설명해서 거기에 속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거부한다. 그는 분명한 어조로 밝히기를, 사회생활에서의 “우주주의(Cosmism)”는 특히 정신적으로 반동적인 성격을 가지는바, 사회철학을 하나의 우주주의나 신비적인 생물학적 근거로 토대 지우려 하는 것은 모두 자연에의 인간 노예성의 표현이고, 하나의 착각(환상, illusion)이며, 인간은 결코 그러한 자연주의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정신적 질에서의 인격성에 근거해서만이 참된 자유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주제인 ‘사회와 자유, 사회적인 매혹과 사회에 대한 인간의 노예성’에서 더 살펴볼 것이다.

5. 한국 信學의 성찰 1: ‘자연의 종말’이 아닌 ‘좋은 인간세(good Anthropocene)’로

여기서 베르댜예프가 우주의 매혹에 대해서 이처럼 경계하고, 그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특히 서구 기독교 문명의 고유한 기여로 밝히면서 “이교적(pagon)” 또는 “마귀숭배(demonolatry)”, “범정령주의(pandemonism)” 등의 용어를 쓰면서 평가하는 일은 오늘날 서구 주도의 근대 인간 기계문명이 불러온 생태위기로 크게 고통 받고 있는 현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구태로 보일 수 있다. 특히 그 서구 근대를 넘어설 다른 문명적 대안을 찾고자 하는 본 성찰에서는 더욱 그러해 보인다. 하지만 베르댜예프의 자연에의 인간 노예성에 대한 성찰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위에서 보아왔다. 그는 결코 주체로서의 식물이나 동물, 더 먼저는 광물 등의 자연을 폄하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인간 정신이 그 정신성과 인격적 자유를 저버리고 다시 객체화된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의 결정론에 굴복하거나 그것을 ‘유기체’와 ‘정령’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 정신주의적 유기체성에 자신을 포괄시켜 버리는 방식을 넘어서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우주에의 매혹과 자연에 대한 인간 노예성에 대한 언급은 21세기 오늘날은 오히려 심한 백래쉬(backlash)를 받을 수 있다. 그만큼 지구 환경 문제와 기후위기 등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의 많은 사람은 오히려 다시 자연에의 귀의를 말하고, 우주의 매혹, 자연과의 하나됨을 강조하며 그 길이 인간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성찰을 진척시키기 위해서 본인은 우선 지난 2000여 년 이후로 논의가 비등해진 ‘인류세(Anthropocene)’ 또는 ‘인간세’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류세’는 농경사회가 시작된 약 1만여 년 전부터 ‘완전히 최근’이라는 뜻을 가진 ‘홀로세’ 다음으로 인간이 지구 생태계와 지구 시스템의 결정적인 인자로 등장한 지구 지질시대를 일컫는 새로운 말이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 삶과 능력이 전례 없는 방식으로 지구 행성을 변경시킨 것에 관한 새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12)

정확히 어느 때부터를 인류세로 지칭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여러 분야 과학자들 사이에서 지금도 계속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 인류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구 생태계 위기를 그 출구와 치유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비관적인 인류세 이해나, 그와는 다르게 “제2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또 다른 “프로메테우스적 진화의 패러다임”으로 보든지 간에 모두 지금까지 수십억 년을 이어온 지구의 역사에서 상당히 최근에 와서야 한 종류의 동물로 등장한 인간이 지구의 모습을 너무도 명백하게 변화시켜서, 이제 지구 지질의 역사는 인간을 의미하는 ‘안드로포스(Anthropos)’에서 따온 ‘인류세’로 진입했다는 것을 동의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본인은 이 두 가지 방향 중에서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베르댜예프의 자연에 대한 인간 노예성의 지적과 우주의 매혹에 대한 경고는 이제 우리가 진입한 인간세를 ‘자연의 종말’이나 ‘지구의 종말’ 등과 같은 언어로 극단적으로 비관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다시 인간에 의해서 참된 지구 생명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회복되고, 그래서 지구 생명체의 ‘마음(心)’으로서의 인간의 회심과 역할을 통해서 지구 생명 공동체가 ‘영화(靈化)’되고, ‘정신화’되며, 보다 포괄적이고 심층적으로 ‘주체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지시한다고 이해한다. 즉 ‘좋은 인류세’에 대한 지시이고, 그 방향으로서의 명(命)을 말하는 것이며, 그 일에서의 ‘믿음(信)’과 ‘사유(思)’를 놓지 말라는 설득이고 경고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대로 베르댜예프는 온 자연의 생명권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빵 한 덩어리조차도 인간의 의식과 더불어 ‘정신’이 될 수 있다고 했으며, 자연에 대한 기계론은 자연과학적으로도 이미 논파 되고 격파된 저급한 물질주의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제 인간에 의해서 창출된 기술을 ‘제2의 자연’이라는 더욱 확장된 자연의 개념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이것은 오늘의 ‘좋은 인류세’ 이해가 ‘지구공학(Geoengineering)’이나 기후변화에 대한 2016년 파리협정과 같은 ‘지구 환경 거버넌스’를 통해서 그동안 인간에 의해서 교란되고 파괴된 지구 생태계를 치유하는 데 힘을 쏟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인간과 자연 생태계가 변화된 관계로 ‘새로운 생태계’를 이루어 나가려는 구상과 상치되지 않는다는 이해이다.

여러 지구과학 연구는 45억 년의 나이인 지구에 38억 년 전에 박테리아가 나타남으로써 지구 생태계는 엄청나게 다양한 생명의 형태로 진화해나간 것을 밝혀준다. 그런데 거기서 지난 수억 년에서 수천만 년 사이에 다섯 번의 대멸종 시기가 있었고, 그로 인해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생물종의 99%가 멸종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지구의 여섯 번째 대멸종이 도래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13) 오늘 그 가운데서 고작 30만 년 전에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가 “거대한 가속”으로 지구 육지의 80% 이상을 점령하면서 지구 시스템의 거의 모든 권역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멸종을 가속화 하고 있지만, 거기서 인간은 단지 기존의 지구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자만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인공의 권역을 창출시키는 “기술권(Technosphere)”의 창발자로서 역할을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기술권역을 포함한 새로운 지구 생명권의 창출로 ‘인류권(anthroposphere)’의 호모 사피언스가 예를 들어 앞으로 새로운 빙하기의 도래를 감지한다면 그 빙하기를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기 바라는 것이다.(14) 45억 년의 지구의 역사에서 지금의 지구 문명이 가능하게 된 홀로세는 지구 지질시대 구분 중 260만 년 전에 시작된 제4기의 상대적으로 덜 추웠던 가장 최근에 해당하는 ‘간빙기(間氷期)’일 뿐이라고 한다.(15) 최근의 지질학연구에 따르면 이미 지구 상의 5000여 종의 ‘자연광물’에 비해서 실리콘 소재 컴퓨터 칩, 산업용 연마재, 고대 도자기와 유리 등 인간활동으로 만들어진 17만 종 이상의 ‘광물과 유사한 합성 물질’이 감별되었고, ‘물리적 기술권’의 규모가 30조 톤 이상으로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 몸무게 합을 10만 배나 넘었고, 오늘 크게 문제가 된 플라스틱 물질만 해도 누적 생산량이 50억 톤이며, 그렇게 인간은 소위 ‘기술화석(technofossil)’을 남기는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16) 즉 다시 말하면 이제 전자기기 가전제품, 산업 제품 등 인공적 ‘기술종(technospecies)’이 대략 1000만에 이르는 지구상의 생물종보다 더 다양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17) 이것은 더 이상 지구 시스템이나 지구 생태 환경이 인류세 이전의 제1 자연만의 생태 환경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베르댜예프가 우주의 유혹을 넘고, 자연의 결정론을 넘어서 정신과 영, 자유의 행위자로서 살아갈 것을 요청했다는 것은 과거의 인간이 단지 ‘생물학적인 행위가’로서 자연과 상호작용해왔다면 오늘은 인간이 그것을 넘어서 기후마저 변화시키는 질적으로 달라진 “지리물리학적 행위자”가 된 것을 깊이 자각하고 더욱 책임적이고 주체적으로 더 깊은 시간성과 공간성에 대한 인격적 자각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인은 해석한다.(18) 이렇게 스스로가 새로운 ‘자연의 힘’이 되어서 ‘자연사’와 ‘인간사’이 구분이 점점 더 사라지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행보는 그 안에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댜예프는 한편으로는 유신론적 인격주의가 되는 자신의 정신적 인격주의로 ‘신의 형상’을 담고 있는 인격으로서의 인간의 일로 보았다고 본인은 이해한다.

그는 ‘전체’는 정신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자연 속에는 없고, 그래서 “호소는 신에 대해서만 하는 것이지 세계영혼이나 전체로서의 우주에 대해서 할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19) 인간이 문명에 대한 실망과 절망 속에서 종종 빠지는 우주의 매혹과 자연에의 노예성을 경계하였다는 말이다. 서구에서 일찍이 ‘생물권(biosphere)’ 다음으로 ‘정신권(noosphere)’의 출현을 말하고, ‘공동사고’와 ‘초사고’ 또는 ‘초인격화’ 등을 통해서 ‘좋은 인류세’에 대한 상상을 깊이 촉발한 인물로 종종 거론되는 고생물학자이자 신부였던 떼야르 드 샤르뎅(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6)과 같은 사상가도 그 목표와 지향점을 매우 기독론적으로 “오메가 포인트(le Point Omega)”라는 말로도 표현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20)

6. 한국 信學의 성찰 2: 천동설로의 회기가 아니라 동아시아 仁學과 ‘인동설(人動說)’로

이미 밝힌 대로 베르댜예프는 우주의 매혹과 자연에의 인간 노예성을 말하면서 ‘이교적 정령주의’ 내지는 ‘우주주의’ 등의 언어로 일반적으로 동양적 자연관과 우주관으로 이해되고 있는 자연 내재주의적 초월관을 비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즈음 한국 사회에도 인간 문명에 대한 실망과 절망 속에서 노장사상에 관한 관심이 비등하고, 각종 애니미즘과 무속에 관한 관심이 증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동양에 대한 이해가 일천했다는 것을 우선 지적하면서, 동양사상의 층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말하며, ‘다른 동양’, ‘다른 아시아’, 아니 그보다 오늘 서구 기독교 문명이 불러온 잘못된 인류세의 폐해를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른 동아시아적 사고 속에 있다는 것을 간략하게나마 언술해보고자 한다. 앞에서 이해한 대로 베르댜예프의 지향도 현금의 ‘좋은 인간세’의 방향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고 보면서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사고가 서구의 사고보다 그 방향으로의 인도를 더 잘 할 수 있다고 본다는 의미이다.

동아시아 『역경』의 사고가 그 하나라고 생각한다.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 ‘낳고 낳는 것을 역(易)이라고 한다’라는 언어를 가지고, 만물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창발하고, 새롭게 변신하고, 또다시 낳고 낳는다는 의식은 ‘우주’라는 고정된 틀을 상정하지 않고, ‘神’이라는 유일한 행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세와 인류권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과거 오늘의 지구권과 지구 시스템을 이루는데 ‘생물권(biosphere)’이 주인공이 되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오늘이 있게 한 것처럼 그렇게 이제 이 지구권에서 새롭게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류권’이 ‘좋은 인간세’를 이루도록 역할을 하는 데 관심을 두는 것이지 그 자체가 영원하도록 요청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과학적 연구는 지금이 지구의 종말 혹은 인간 역사의 종말은 아니고 아마도 최소한 10억 년 이상 지구는 계속해서 생명을 지탱해주리라 예측한다. 그 가운데서 대부분의 다른 생물종처럼 지금 형식의 인간종도 그때쯤이면 사라질 터이지만, 아주 먼 미래에 어떤 존재가 자신이 아닌 존재 때문에 영구히 크게 변형된 지구를 보게 된다고 해도 거기서 여전히 있는 것은 易이라는 것이다.(21) 즉 易, 간단없이, 지속해서 낳고, 창조하고, 창발하고 변화하는 행위만이 영원한 것이지 그 과정과 변화에서의 모든 고정과 고착은 악(惡)이고, 불의(不義)이며, 사랑(仁)이 아니고, 다른 것에 대한 예의(禮)가 아니며, 그렇게 될 때 易의 기쁨(樂)은 사라지고, 믿음(信) 대신에 허무나 절망, 아니면 잘못된 환상만이 남게 된다는 가르침을 동아시아 易은 지시해준다는 것이다.

그 천지의 易을 『중용』은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理)”이라는 ‘낳고 살리는 마음과 원리’의 “지속성(誠)”이라는 말로 좀 더 분명하게 밝혀주었다. 조선 신유교적 사고는 그 易과 천지생물의 마음을 바로 “인간의 마음(人心)”이라는 ‘인(仁)’으로 밝혀 강조하면서, 그것을 “낳고 살리는 본성(生之性)”과 “사랑하고 보살피는 원리(愛之理)”로 드러내고자 했다.(22) 여기서 인간(人)의 낳고 살리는 마음(仁)을 ‘원·형·이·정(元亨利貞)’, 봄·여름·가을·겨울의 첫 번째 우주적 시작의 기운(氣)이라고도 했다. 또한 그것을 ‘생지성(生之性)’, 즉 살리는 ‘본성 내지는 자연(性)’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인간 마음의 ‘덕(德)’, 즉 ‘행위력’이라고 칭했다는 것은 이러한 조선의 사고에서는 ‘자연세’와 ‘인간세’, ‘생물권’와 ‘인류권’, 또는 ‘자연’과 ‘도덕’, ‘존재’와 ‘실존의 자유’가 하나로 연결되고 통합되는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밝혀주는 의미라고 본인은 해석한다.

베르댜예프가 그러한 일원론적 경향을 우주의 매혹이라고 끊임없이 비판했고 경고했지만, 그러나 ‘좋은 인류세’는 궁극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합동과 어우러짐을 통해서 그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바, 서구 기독교의 인간세 이해보다 이 통섭과 화합의 가능성이 좀 더 높으면서도 거기서 인간세의 행위력과 정신적 주체력의 창발성이 약화되지 않는 조선 신유교의 덕이야말로 ‘좋은 인간세’, 참다운 인간세를 이끌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국 인학(仁學)의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이번 주제를 통한 성찰에서 본인은 다시 셋 내지는 넷의 ‘인’이라는 단어가 어우러진 일군의 언어 쌍을 얻었다. ‘人·仁·忍·認’이 그것이다. 그것은 ‘인간(人)’의 본래 규정은 ‘사랑(仁)’이고, 창조하면서 서로 함께 하는 것이고, 그러나 그렇게 낳고, 살리고, 함께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각자는 자기 전체주의의 유혹을 도려내는 칼을 품은 것 같은 ‘인내(忍)’의 덕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오랜 기간 창조와 사랑과 인내의 덕으로 살아가면서 서로를 인정하고 알아볼 때(認), 거기서 참다운 하나됨과 새로운 창조가 가능해지며, 그것이 바로 만물을 낳고 또 낳으면서 살리는 易의 길이라는 것이다.

베르댜예프가 우주에의 매혹과 자연에의 노예성을 경고했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미 얻었고 이루어진 것을 ‘자연’이나 ‘우주’라는 이름으로 영구화하고 고착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전 세계적으로 인종(race)이나 성(sex), 거기서의 더 세밀한 성 정체성 문제 등으로 혐오를 조장하고, 폭력이 난무한다는 것은 바로 오늘의 인간이 조장하는 또 다른 형태의 자연에의 노예성이라고 생각한다. 그 자연의 결정성에 굴복하여서, 옆의 사람은 거기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주체로, 인격과 정신의 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을 혐오하고,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은 심지어 지금까지 가장 보편적으로 인간 사이의 관계와 차례를 정하는 기준이 되어온 ‘나이’라는 것도 비인간적으로 고정화된 방식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지는 상황인데도 그러하다.(23)

이와는 달리 최근 소녀시대의 가수 티파니 영은 자신은 성소수자들과 연대한다는 표현을 공개적으로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녀는 “사랑과 친절이 이긴다는 걸 보여준 티파니에게 감사”한다는 신문 칼럼의 주인공이 되었다.(24) 또한, 50대의 성전환자 김비 씨는 성 정체성으로 인해서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겪어온 혐오와 소외,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내가 먼저 건넨 인사를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인사(人事)’, 인간의 일, 종종 인간 ‘언어(言)’로 이루어지고, 표정과 몸짓, 내가 먼저 결정하고 택하는 ‘신뢰와 믿음(信)’의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인사야말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내 온 길이라고 고백하였다.(25) “실체가 아닌 불안 앞에서”, 자연이 아닌데도 자연이라고 낙인찍힌 데서 오는 性의 다름으로 인해서 그렇게 불안해하지 말고, 폭력을 저지르지 말자는 것이다.

7. 마무리하는 말: 예수의 세례요한 해석, 자연에 대한 탈노예성의 극진한 예

오늘 한국 사회에서 심각하게 행해지고 있는 각종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 통과가 특히 한국 보수 기독교 교회에 의해서 저지되고 있는 현실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그들이 믿는 예수가 어떻게 이미 범례적으로 우리 인간의 자연에의 노예성을 논파했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마태복음 11장의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고’,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그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라고 하셨다. 하지만 예수는 이어서 곧바로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마태 11:11)라는 선포와 함께 “세례자 요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힘을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한다”라고 하셨다. 나는 이 선언이야말로 바로 예수가 자연의 결정론을 급진적으로 깬 큰 자유적 주체의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제 세례요한 이후로 하늘나라의 차지는 결코 자연, 아무리 그 자연이 낳은 가장 위대한 과거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의 자유로운 결단과 행위에 달려 있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와 동시에 오늘 우리가 대면할 악도 점점 더 어떤 물리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보고, 이제 우리 공동체 삶에서 그러한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혐오와 배타, 차별과 무시, 거짓을 걷어내는 힘을 오는 세대가 자신들의 ‘사유’를 통해서 기르기를 원한다. 그 악에 대한 저항과 거기로부터의 벗어남은 결코 자신 스스로에게 절망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자살 등의 방식으로도 안되고, 대신에 정신적인 주체의 힘, 사유와 성찰의 인간적인 힘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 되는 관건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와 더불어 오늘 심각한 기후위기 앞에서도 우리가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지만 ‘절망’을 선전하는 선언들에도 굴복하지 말자고 권하고 싶고, 그러한 자연에의 노예성을 벗어날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오늘 지구 생태계는 좋은 인류세, 이제 그 지구의 각자가 인격과 자유와 정신으로 주체와 중심이 되는 ‘인동설’의 ‘좋은 인류세’로 진입했다는 것을 예수의 이러한 세례요한에 대한 선언은 지시하고 있다고 여긴다.

미주

(미주 1)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이신 옮김, 늘봄 2015, 127쪽.
(미주 2) 같은 책, 126쪽.
(미주 3) 같은 책, 126쪽.
(미주 4) 같은 책, 128쪽.
(미주 5) 같은 책, 128쪽.
(미주 6) 같은 책, 129쪽.
(미주 7) 같은 책, 131쪽.
(미주 8) 같은 책, 132쪽.
(미주 9) 같은 책, 134쪽.
(미주 10) 같은 책, 133쪽.
(미주 11) 같은 책, 135쪽.
(미주 12) 얼 C. 엘리스, 『인류세』, 김용진/박범순 옮김, 교유서가, 2021, 167쪽.
(미주 13) 같은 책, 184-188쪽.
(미주 14) 같은 책, 249쪽.
(미주 15) 같은 책, 248쪽.
(미주 16) 같은 책, 245쪽.
(미주 17) 같은 책, 246쪽.
(미주 18) 같은 책, 218쪽.
(미주 19)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같은 책, 132쪽.
(미주 20) 이은선·이정배, 『현대이후주의와 기독교』, 다산글방, 1993, 36쪽.
(미주 21) 얼 C. 엘리스, 『인류세』, 262쪽.
(미주 22) 이황, 『성학십도』, 이광호 옮김, 홍익출판사, 188쪽.
(미주 23) 이은선, “한국 천지생물지심의 영성과 기독교 영성의 미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6, 189쪽 이하.
(미주 24)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타파니 영의 LGBTQ+와 함께 걷기”, <한겨레> 2021.6.19., 16면.
(미주 25) “김 비의 달려라, 오십화(好)-불안과 같이 사는 법”, <한겨레>, 2021.6.19., 18면.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leeus@sejong.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