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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단, 일제의 꼭두각시였다

기사승인 2022.07.23  14: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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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간도, 동만특위의 반민생단 투쟁 (6)

▲ 민생단 사건 당시 조선 유격대원들의 모습. ⓒ한국농정신문(http://www.ikpnews.net)

‘반민생단 투쟁’(미주 1)은 북간도 지역에 세워진 상위의 공산당조직인 동만특위 내에서 1932년 10월에 시작되어 1936년 봄까지 계속되어 중국공산당에 의해서 조선공산당원들 500여명이 민생단 첩자로 몰려 억울하게 학살당한 대사건이다.

일제는 친일파들에 의해 세워진 민생단과 간도협조회를 통하여 동만특위에 밀정을 잠입시키거나 거짓 문서와 루머를 통하여 중공공산당원과 조선공산당원을 이간질하여 와해시키는 공작을 벌였고 동만특위의 중공공산당 한족(漢族)간부들은 진위를 구별하지 않고 수많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학살과 도망과 변절로 몰아갔다.

민생단의 정체

일제는 세계적인 경제공항과 식민지 경영의 실패를 만주 침략을 통해 만회하기 위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의 침략으로 ‘삼중의 고난’(2)에 처한 재만 조선인들은 중공공산당에 속속 가입하여 “홍5월투쟁”과 “길돈폭동”, “춘황”투쟁과 추수투쟁으로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동만주의 조선인들은 민족을 보존하고 혁명을 성취하려는 열정으로 항일유격대를 만들고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견지하였다. 1932년부터 만주국의 대토벌에 맞서 싸웠던 항일유격대는 1934년 동북인민혁명군으로 발전하였고 동북인민혁명군은 1936년에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하여 1940년 초까지 일제와 만주국을 상대로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민생단은 일본의 관동군이 만주 침략을 기획하여 만주사변을 일으킬 때 일본제국주의 관료들이 친일파 조선인들을 앞장세워서 만든 친일단체로 용정에 본부를 두었다. 일제는 1931년 9월에 “갑자구락부”의 이사 조병상과 ❮매일신보❯ 부이사장 박석윤을 북간도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간도주재 일본총영사관의 지시아래 북간도의 친일파 김동한, 김택현 등을 모아서 1932년 2월 15일에 일본육군 포병대좌였던 박두영을 단장으로 하여 “민생단”을 출범하였다.

일제의 조작

민생단은 처음에 ‘조선인들의 생존권 확보’와 ‘조선인들의 자치’를 주장하여 동만조선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군이 항일투쟁을 하는 조선인들을 토벌하는 것을 변호하며 중공공산당이 지도하는 항일투쟁단체들을 “비적집단”이라고 매도하였다. 더 나가서는 일본군의 토벌을 간도지방의 치안유지와 양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것으로 정당화하였다. 민생단은 조선인자치의 깃발을 걸고 일제의 만주침략에 적극 협조하여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의 눈에 벗어나 증오의 대상이 되어 핍박과 배척을 당하게 만들었다.

중공동만특위는 1931년 9월 30일에 통고(通告)로 “일본 영도 밑의 이른바 조선인자치운동을 반대하고 통치계급들이 민족감정에 쐐기를 박아 이간시키는 것을 반대하며 모든 주구단체들의 기편과 협잡을 반대하여야 한다”고 호소하였다.(3)

1932년 3월 1일 다시 중공동만특위는 민생단은 “일본제국주의의 지휘 밑에 … 일본 및 중국 군경들을 방조하여 한민족(韓民族)들을 체포하고 또한 한민족들을 투항하게끔 한다. 이는 완전히 중한민족의 연합전선을 분열시키고 중한민족혁명운동을 파괴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단체라는 것”이라고 지적하는 동시에 “중한민족은 무기를 들고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모든 제국주의를 때려 부수자.”고 호소하였다.(4)

같은 날에 중공왕청현위도 “격문”을 발표하여 일본제국주의가 민생단 등 주구조직들을 지시하여 “중한노고대중들의 연합전선을 파괴하고 압박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대중들을 착취하려함”을 폭로하고 단결하여 강도 일본제국주의를 때려잡자고 부르짖었다.(5)

1932년 “춘황투쟁” 가운데 각지의 당조직들에서는 민생단을 타격하는 투쟁을 중요한 과업으로 삼았다. 연길현 구수하, 상의향, 팔도구, 옹성라자, 로두구, 동불사, 소영자, 왕우구 등지의 조선인대중들은 민생단 간부들을 엄격히 징벌하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여 지역마다 민생단 가입을 취소하고 떠나는 자가 급격히 증가하여 민생단은 존폐 위기에 놓였다. 그리고 일제가 세운 괴뢰만주국의 국세가 굳건하여졌고 민생단이 내세우는 “조선인 자치”도 더 이상 일본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게 되자 민생단은 1932년 7월 14일에 해산을 선포하였다.

미주

(1) 한국에서는 “민생단 투쟁”으로 호칭하나 연변의 사가들은 “반민생단 투쟁”으로 호칭하고 있다.

(2) 조선인의 뒤를 따라와서 일본이 만주를 침략했다고 생각하는 중국 관료와 군벌과 중국인들의 핍박, 일제 군경의 핍박, 친일파들의 회유와 핍박으로 1930년대 재만 조선인 특별히 북간도 조선인들은 다른 지역의 조선인들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다.

(3) 김춘선, 김철수 외 10인, 『중국조선족통사 중권』 (연변인민출판사, 2009) 138.

(4) 양소전, 차철구 외 3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2009), 401, 402.

(5)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저, 『연변조선족사 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11) 304.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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