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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죽음들

기사승인 2022.06.18  16: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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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간도, 동만특위의 반민생단 투쟁 (1)

▲ 조선인-중국인 연합 유격대의 대표 사례인 동북항일연군(1936년 결성)

“반민생단 투쟁”은 북간도 지역에 세워진 상위 공산당조직인 동만특위 내에서 1932년 10월에 시작되어 1936년 봄까지 계속된 중국공산당이 조선공산당원들 500여명(1)을 민생단 첩자로 몰아 억울하게 학살한 대사건이다. 일제는 친일파들에 의해 세워진 민생단과 간도협조회를 통하여 동만특위에 밀정을 잠입시키거나 거짓 문서와 루머를 통하여 중공공산당원과 조선공산당원을 이간질하여 와해시키는 공작을 벌였고 동만특위의 중공공산당 한족(漢族)간부들은 진위를 구별하지 않고 수많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을 학살과 도망과 변절로 몰아갔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연길에서 『연변조선족사』, 『중국조선족통사』와 각종 역사 서적을 읽으며 새롭게 안 사실이 몇 가지 있다. 조선인들의 만주에로의 이주는 1910년 한일합방 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를 끝으로 북간도를 비롯하여 만주 전체에서 독립운동의 주도권이 민족주의 계열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1930년대에 만주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대세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추수투쟁과 훈황투쟁을 벌였고 항일유격대,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으로 변화, 발전하며 일본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을 끈질기게 주도해갔다.

물론 30년대 만주 일대에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자유시참변 이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연달아 세워져 독립운동을 이어가며 통합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민족유일당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계열은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는 혁신의회를 거쳐 한국독립당 그리고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였고, 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는 1929년 4월에 국민부를 형성하였고 산하에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두었다.

1933년 한국독립당의 한국 독립군이 동녕성전투를 끝으로 중국 관내로 이동하고 1934년 조선혁명당의 조선혁명군 양세봉 사령이 죽고 1936년 당수인 고이허가 총살을 당함으로 실질적으로 민족주의 계열의 만주에서 독립운동은 끝이 났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1940년 말에 동북항일연군이 일제와 만주국의 대대적인 토벌전과 삼광정책(2)으로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소련 경내로 피신하기 전까지 치열하게 일어났으며 만주 한인들의 항일투쟁의 중심과 선봉에 서있었다.

막연히 알고 있던 지식과 다른 역사적 사실을 책에서 확인하였을 때 고통과 충격이 컸으나 두 그룹의 독립운동가들이 우리의 선열, 조상으로서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친 희생은 어떤 이유로도 폄하될 수 없으며 등가(等價)라는 사실을 긍정하면서 역사가 새로운 세대에게는 과거의 일이 되어서 묻히고 잊히기에 뭇 많은 나라들의 역사전쟁이 가능하며 학자들과 독재 권력자들에 의해 역사 찬탈과 위조와 세탁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분과 죽음들

만주와 러시아에서 있었던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가슴 아팠던 것은 민간인 또는 독립군의 억울한 죽음, 억울한 희생들이었다. 나라를 잃은 국민들은 초상집의 개만도 못하지만 독립군 또한 마찬가지로 속수무책으로 강대국 사람들에게 개처럼 당하였다.

일제 36년 기간 중에 일본군, 중국공산당, 러시아와 코민테른의 군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우리 조상들, 독립군들이 가장 많이 죽은 사건은 4,600여 명의 민간인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간도참변❯ 또는 ❮경신참변❯으로 불러지는 대학살사건이다. 그 다음으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북간도, 동만특위 안에서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500여 명이 학살당한 반민생단투쟁 사건이다. 그 다음은 ❮자유시참변❯ 또는 ❮흑하사변❯으로 불러지는 참변으로 러시아의 자유시에서 코민테른의 개입 하에 우리 독립군끼리 싸운 전투에서 최하의 37명에서 100여 명의 독립군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3)

❮경신참변❯은 잔인무도한 일본군이 직접 간도 조선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이고 ❮자유시참변❯은 일본의 위협을 받고 있는 러시아가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조선독립군을 배신하는 과정에서 독립군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 상해파 공산당을 이용하여 같은 독립군끼리 총질하여 서로를 죽이게 만든 뼈아픈 사건이다. 한 마디로 이는 외세에 휘둘려서 우리 편끼리 싸운 참변으로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최악의 비극이다.

두 참변은 우리에게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으나 금번에 다루고자 하는 “동만특위의 반민생단 투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 지도부에 의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일방적으로 민생단 첩자로 몰려서 학살을 당한 사건이므로 정리도 쉽지 않다. 북간도, 동만특위의 반민생단 투쟁을 말하기 전에 먼저 북간도, 동만주(4)에서의 공산주의 사상 전파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항일운동 그리고 조선공산당 해체와 조선공산당의자들의 중국 공산당 가입 그리고 중국공산당과 함께 하는 힝일투쟁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미주

(1) 김영만, 리송영 외 11인, 『연변조선족사 상권』 (연변인민출판사, 2011), 314.

(2) 삼광정책은 일제가 만주에서 조선독립운동을 초토화시키기 위하여 전투지와 군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마을에서 빼앗고, 불 지르고, 죽인 정책이다.

(3) 자유시참변의 피해 상황에 대한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재북간도 항일단체 성토문”은 사살 72명, 익사 37명, 기진해 사망한 200여명 행방불명 250명, 체포 91명으로, ❮독립신문❯은 사살 40명, 탈출 100여 명, 포로 900명으로, “고려군정의회”는 사망 37명, 도망 50명, 포로 900명으로, “전로 고려혁명군대 연혁”은 사망 36명, 도망 30명, 행방불명 59명, 포로 864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재판과 포로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독립신문❯과 고려군정의회의 기록이 정황에 부합함을 알 수 있다. 자유시참변 이후 만주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투쟁 독립운동이 세력을 만회하지 못하였고 만주는 특별히 연변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무대로 바뀌었다.

(4) 북간도는 조선인들이 사용한 개념이다. 함경북도 회령이나 종성에서 볼 때 북쪽에 있으므로 북간도라고 칭하였고 압록강 상류 위쪽을 서간도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북간도를 동만주, 요녕성 일대를 남만주, 연변지역을 제외한 길림성 위쪽과 흑룡강성을 북만주라고 부른다. 북간도와 동만주는 같은 지역의 다른 이름이다. 연변은 북간도에 안도현과 돈화현이 더해진 개념이다.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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