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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의 만주총국 설립과 항일투쟁

기사승인 2022.07.02  16:4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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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간도, 동만특위의 반민생단 투쟁 (3)

▲ 1927년 10월 “제1차간도공산당사건”에서 체포된 조공당만주총국 조직부장 최원택(앞줄 오른쪽), 동만구역국 책임비서 안기성(앞줄 가운데), 위원 리주화(뒤줄 왼쪽), 김지종(뒤줄 오른쪽), 김소민(앞줄 왼쪽). ⓒWikipedia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설립과 동만구역국의 항일투쟁

서상파(미주 1), 화요파, M.L파 세 개 파로 구성된 조선공산당은 1926년 3월에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조직)으로 부터 인정을 받아 코민테른조직의 한 개 지부로 등록되었다. 조선공산당은 같은 해 5월에 흑룡강성 주하현 일면파에 조봉암과 최원택을 보내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을 설립하였다. 만주총국은 총부를 영고탑에 두었으며 산하에 동만, 북만과 남만 3개 구역국을 설치하였다.

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은 1926년 10월에 김용락을 책임비서로, 김인국을 조직부장으로, 이순을 선전부장으로 하여 용정촌에서 설립되었다. 동만구역국은 설립 후 용정, 평강, 화룡, 국자가, 동불사, 왕청, 라자구, 훈춘 등지에 17개 기층조직을 세웠으며 기관지로 ❮불꽃❯을 연변지구에서만 2,000여부나 발행하여 일반 대중들을 항일투쟁의 여세로 몰아갔다. 1927년 통계에 의하면 당시 동만주에 모두 9개 기층당조직과 116개 외곽단체에 소속된 당원이 무려 9,776명이나 되었다.

만주총국은 농민들이 전개한 향약을 개선하는 운동을 통하여 지주, 토호 또는 이미 입적한 조선인지주들을 제치고 민의 대표자를 향약의 책임자가 되게 하여 조선 농민의 정당한 권익을 보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략에 맞서 “관세자주운동”과 “길회선 철도부설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들은 동만구역국에서 주도를 하였으며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동만주에서 세 차례에 걸쳐 간도공산당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1927년 5월 1일에 동만구역국에서는 용정을 중심으로 인근의 수백 명 조선 청년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항일시위를 힘차게 벌였다. 같은 해 10월 2일, 만주총국과 동만구역국은 대규모의 항일시위를 계획하였으나 큰 비로 인하여 다음 날로 연기하였다. 그날 밤, 총국과 구역국 간부들이 동만구역국 책임비서의 집에 모여서 시위방안을 토의할 때 이 상황을 탐지한 용정일본총영사관의 군경들이 안기성의 집을 급습하여 회의에 참가한 29명의 간부들을 체포하였다. 다음 날 그 사실을 알게 된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의 학생들이 “일제 침략자를 반대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항일시위를 벌이면서 100여 명에 달하는 항일단체 간부들과 일반 대중이 체포되었거나 구금되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이다.

제1차 공산당사건으로 최원택 등을 비롯한 수십 명의 간부들이 일제에게 검거된 후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은 와해되었다. 따라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내의 세 파는 각기 독자적인 만주총국을 만들어 서상파는 길돈지방을, M.L파는 반석현을, 화요파는 아성현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3일 국제청년절을 기념하기 위해 M.L파 만주총국은 연변지구 용정, 국자가 등지에서 수천 명의 청년학생들을 조직하여 항일시위를 벌였다. 일제는 시위 군중을 탄압하고 72명의 청년학생들을 체포하였다. 이것이 제2차 간도공산당사건이다. 결과적으로 조선공산당  M.L파 만주총국이 큰 타격을 받았으며 다른 항일단체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코민테른의 “1국1당”원칙과 조선공산당의 해체

코민테른은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화요파, 서울파, M.L파 등의 조선공산당의 내부 분열과 갈등을 문제 삼아 1928년 7월에 열린 제6차 대회에서 의결권이 있는 조선대표의 출석을 불허하였다. 그리고 동양비서부(동양서기국)에 조선 문제를 검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2월에 ‘12월 테제’로 불리는 ‘조선 문제에 대한 결의’와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하여 조선공산당의 국제지부자격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당내에서 파쟁과 갈등을 극복하고 소자산계급의 울타리를 벗어나 노동자와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건강한 볼셰비키 당을 재건할 것을 촉구하였다. 조선공산당 해산을 선포한 것이다.

조선공산당은 해산되었으나 만주의 서상파, 화요파, M.L파 만주총국들은 여전히 조직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근거하여 상해와 만주(미주 2)에서 각 파별로 당 재건위원회를 세웠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당 재건 운동은 일제의 간도공산당 탄압과 각 파간의 의견 분열로 유야무야되었다.

제6차 대표대회는 각국 공산당의 통일적인 조직과 지도를 강화하기 위해 ❮코민테른 장정❯을 수정하여 “1국1당”의 원칙을 강화하였고 코민테른 각 지부의 당원들은 반드시 자국 공산당중앙위원회의 비준을 거쳐야만 다른 나라로 이주할 수 있으며 다른 나라에 이주한 공산당원은 반드시 해당국가의 공산당 지부에 가입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만주의 전 조선공산당원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해야 하는 문제 직면하였다. 이는 동북지구에서 조선공산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량이 약한 중공만주성위에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1923년 7월에 하얼빈에 중국사회주의청년단 하얼빈지부가 세워지고 10월에 동북지구 최초의 중공당조직인 중공하얼빈독립조가 조직된 이래, 중국 공산당은 동북지구에서 2개의 지위, 30여개의 지부, 500며 명의 당원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1927년 장개석이 4•12정변을 일으켜 공산당원과 진보인사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자 동북지구의 군벌정부도 공산당조직과 노동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여 1927년 8월에 500여 명이었던 당원이 100명으로 급격히 감소되었다.

중공중앙위는 동북당조직의 복구와 통일적인 지도체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진위인을 파송해서 중공만주성위를 세웠다. 1927년 말에 중공만주성임시위원회는 30여 개의 지부, 273명의 당원을 확보하였다. 진위인은 27년 12월에 동북지역의 진행상황을 중공중앙위에 보고하면서 동북지구의 조선농민들의 비밀 조직, 항일무장단체와 합작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28년 1월에도 한국당 활동을 소개하면서 한국당과 연계를 강조하였다.(3)

1928년 2월에 중공만주성임시위원회에서는 연변지구에 당 조직을 건립하기 위하여 주동교를 파견하였다. 주동교는 연변에 와서 ❮민성보❯라는 진보적인 신문을 중심으로 해서 당조직 작업을 시도하였다. 중공용정촌지부를 건립하고 용정촌기층지부를 세운 뒤, 1928년 8월에 중공동만구위를 세웠다. 동만구위는 팔도구, 국자가, 광제욕, 옹성라자, 훈춘 등에 선후로 기층 지부를 설립하였으나 중공대련당 부서기인 곡문수가 배포한 ❮5•1 선언문❯ 배포사건에 연루되어 동북지구의 중공당원 수는 120명 정도로 축소되었다.

연변지구는 1929년 1월에 중공동만구위 서기 주동교가 용정에서 체포되고 2월에 대리 서기직을 맡았던 유건장이 체포되면서 수많은 당원들이 흩어져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동만특위를 급히 만들어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미주

(1) 서상파는 서울파와 상해파의 첫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한상파로 불리기도 한다.

(2) 만주는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에서 따온 이름으로 중국 본토에서 볼 때 동북방에 위치에 있기 때문에 동북지방, 동북삼성, 동북지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3) 중공중앙위는 만주성위가 제기한  항일연합문제를 돕기 위하여 29년에 조선인 공산당원 홍남표, 오성륜, 이극화, 이진동을 동북지구에 파견하였다.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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