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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에큐메니즘의 전개와 李信 신학 2

기사승인 2018.11.03  14:3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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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오늘도 여전히 이신(李信)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가?

2. 믿음의 ‘고독’(性)에 대하여

믿음의 행위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고, 과정을 다시 뒤로 돌릴 수 없으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과거나 미래와 관계하는 일이므로 현실에서 많은 장애와 어려움을 만난다. 그것은 시간과 시대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런 믿음의 삶에서 ‘가족’은 어떤 의미가 될까? 믿음 삶의 또 다른 근거일까 아니면 한없는 장애와 걸림돌일까? 우선은 믿음의 사람에게도 가족은 자신의 길을 가는데 가장 가까이에서 위로를 주고, 이해와 힘을 주는 지지대와 기반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이해를 얻지 못하고 비난 받는다면 그 실망과 좌절은 가장 클 것이다.

아버지 이신의 경우도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는 신학대학을 가기 위해서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고, 그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부모님을 통해서 혼인하게 된 아내와 자신의 생각을 깊이 나눌 수 없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두 분은 서로 무척 애틋해 하셨지만 자주 다투셨다. 사실 아버지 이신은 부인뿐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찬찬히 길을 설명하고 그들의 의견을 듣고 이끄는 분이 아니었다. 자신 동생들과 자식들의 삶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중요한 선택들을 주도하셨지만 갈등이 있었고, 반목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어서 가족을 꾸리고 나름의 뜻을 붙들고 살려다 보니 아버지 이신의 고통과 좌절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더 잘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믿는 자가 겪는 어려움 중에서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받는 괴로움이 제일 큰 것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면 믿는 자는 그래서 참으로 ‘고독한’ 자이고, 그런 면에서 고독을 가장 친한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가족’이라는 것은 사실 믿는 자로 하여금 가장 강하게 ‘현재’에 함께 할 것을 요구하는 자이고, ‘일상’을 청하는 존재이므로 그 충돌을 잘 예상할 수 있다.

이신은 1970년대에 저술한 신학 논문「고독과 저항의 신학-키에르케고르와 본회퍼 신학의 비교 연구」에서 키에르케고르를 초월자 앞에서의 열정과 믿음의 삶을 위해서 “세상의 그 어떤 고독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뇌가 따르는” 삶을 산 자로서 소개하고 있다.(미주 1) 많이 회자되듯이 키에르케고르는 어느 날 인지하게 된 자신 가계(아버지) 내의 ‘죄’에 대한 첨예한 의식으로 깊이 사랑하던 약혼자와의 결혼도 포기하고, 자신의 이름을 숨기면서 철저한 고독 속에서 신앙의 의미와 기독자의 믿음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일에 몰두했다. 믿음을 지니고 산다는 일은 과거와 미래를 여기 지금에 가져와서 그 의미성을 현재적으로 살아내는 일이기 때문에 이 신앙의 “동시성”으로 인해서 일반적인 합리성에 균열을 일으키고, 스캔들을 일으킨다. 이신은 두 사상가를 특히 이러한 ‘신앙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와 동시대에 사는 것처럼 그의 믿음과 다시 그에 대한 믿음을 우리 시대에 우리 각자의 신앙으로 재현하는 일이고, 그러기 위해서 지독한 고독과 고통도 참아내야 하는 일이라고 키에르케고르는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이란 그저 값싼 은총이 아니라 아주 값있는 것이고, “영원한 심각성”을 지니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기독교는 영적인 것이다. 영적이란 내면성이요 내면성은 주체적인 것이요 주체적인 것이란 근본적으로 열정적인 것이다. 그 최고 정점은 영원한 행복 속에 있는 무한한 인격적인 열정적 관심 그것이다.”(미주 2)

이렇게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을 위한 고독을 기독교의 정수로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이 고독을 따르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어떻게든 거기서부터 벗어나고자 하고, 그것은 질병과 연약함으로, 그 반대로 유대와 친밀과 소속은 선과 강함으로 찬양된다. 하지만 오늘 우리 인류의 삶이 이제 전통적 의미에서의 생물학적 가족적 삶마저도 심하게 흔들리고 있고, 유기체와 비유기체(로봇)의 구분도 점점 더 모호해지는 상황으로 들어가면서 인간적인 고유함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의 물음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다면, 오히려 고독과 단독자로서의 삶을 새롭게 의미화해서 또 다른 차원의 생명적 삶을 탄생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오늘날 참된 믿음이 매우 드물어졌고, 그래서 무엇이든 지속하고 약속할 수 있는 힘이 실종된 상황에서 ‘고독’으로 단련되어 몰두할 수 있고, ‘익명’(anonymity)을 견뎌낼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의 해방된 정신과 영적 자유의 정신으로의 고양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삶이 고독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들어섰다면, 아니 그 고독이야말로 우리 정신의 더 높은 고양(신앙의 동시성)을 위해서 긴요하기까지 하다면,  키에르케고르나 이신의 믿음을 위한 고독의 메시지를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정신의 참된 자유와 영적 성장을 위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르침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믿는 자의 고독에 대한 이야기는 ‘죽음’과 ‘영생’에 대한 이야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신은 1980년 6월부터 1981년 12월 세상을 뜰 때까지 순복음신학교를 통해서 관계 맺게 된 순복음 교회 청년 선교지 <카리스마>에 「카리스마적 신학」이라는 독특한 글을 연재하셨다. 오랜 동안 그가 생각해 왔고, 마침 그것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자 했지만 충분히 펼치고 가지 못한 새로운 조직신학으로서의 “영(靈)의 신학”, “초현실주의 신학”에서 그는 삶과 죽음을 논한다. 거기서 그는 밝히기를, 사실 사람은 “생리적으로 종족적으로 혈통적으로”는 오히려 죽지 않고 영속적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생물학의 유전법칙에 의해서 그의 유전인자는 계속적으로 자손이나 종족 등을 통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참 죽음이란 바로 그의 “인격”이 죽는 것을 말하는데, 그에 따르면 사람은 인격적인 존재로서 그것은 “생리적인 법칙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것은 유전적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것이 아니요 그 근원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순전히 정신적인 영역이요 자유의 영역으로서 말하자면 영원한 곳에서 날아 들어옴이요 그 인간이 갖는 독특성이요 유일회적인 것”이라고 서술한다.(미주 3)

이신은 인류 문명의 과학적 성과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라 과학으로 아직 들추어내지 못한 ‘인격’과 ‘영’과 ‘초현실’의 차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죽음 이해도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생물학적인 죽음은 이제 “생리적으로” 허구이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죽음인 인격의 죽음에 대해서 관심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임을 밝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의 믿음에 대한 강조와 고독을 받아들이는 입장, 몸은 불사하지만 오히려 인격의 죽음을 말하는 모든 이야기가 오늘 ‘인공지능’(AI)과 ‘초인간(transhuman)’을 말하는 시대에 더욱 의미 있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돋아나고 또 자라는 생리적인 것의 죽음이 아니라-어차피 이런 생리적인 것은 죽지 아니하는 것이고-그러한 인격의 무한한 가능성의 요소의 멸절滅絶이요 알기 쉽게는 역사적 시간적으로는 그 영원한 씨(種子)가 한 번도 싹터보지 못하고 무서운 혹한 때문에 고사枯死하는 것이요 생존경쟁의 싸움터에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무한한 위력을 가진 불발탄인 것인데 사실은 누구나 다 이런 인격의 영원성을 갖고 있는데도 생존경쟁의 하찮은 이런 일 저런 일 때문에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아깝게 사장死藏되어버리는 것이요 또 이어가는 이 역사의 휘몰아치는 추위 때문에 한 번도 인격의 아름다운 싹을 틔워보지 못한 채 시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미주 4)

앞의 아렌트도 오늘날 사람들이 “영원성”(eternity)에 대한 관심을 모두 잃어버리고 너나없이 모두가 자신의 생물학적 생명에만 관심하는 노동자가 되어버렸다고 지적하였다.(미주 5) 또한 이와 유사한 근대 부르주아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베르댜예프에게서 확실하게 들을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부르주아는 자기를 초월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초월은 그가 지상에 정착하려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에게서의 신앙과 종교는 “항상 유한한 종교이며, 유한에 연결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종교의 질은 그것이 이 세상의 조직에 헌신하는 봉사, 이 세상에서 그의 지위의 보존에 대한 봉사에 의해서 측정된다.”(미주 6) 베르댜예프는 이러한 부르주아 인간의 문제는 단순히 사회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에 의하면, “부르주아는 피안적 세계의 존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아무런 감각도 없다. 그들은 종말과는 인연이 없는 무리들”이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미주 7)

그런데 사실 서구 역사에서 우리는 이미 플라톤에게서 매우 유사한 관점의 이야기를 들었다. 즉 그가 이상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넘어야 하는 세 가지의 파도로서 그 중 그 하나를 ‘처자공유’를 통한 생물학적 가족주의를 넘어서는 일로 지적했다면, 베르댜예프나 이신의 삶과 죽음, 인격에 대한 이야기도 이와 유사한 흐름 속에 놓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신은 사람이 생리적으로 사는 것은 “다만 생식하고 번식하는 것으로 이어가는 삶”이라고 지적했는데, 베르댜예프는 그의 『인간의 운명』에서 이와 유사하게 ‘속’(屬, genus)을 통한 생명의 연속은 “임신을 통해 계속되는 삶을 알 뿐 영원한 삶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일종의 성적(性的) 범신론”이라고 비판했다.(미주 8) 여기에 대해서 베르댜예프는 “인격”personality)이라는 개념을 한없이 고양시켜서 바로 그렇게 생리적으로 계속되는 세계의 삶에 대해서 인격은 “침노”해오며, “돌입”해 와서 그 세계를 “정복”하고 “초극”하는 또 다른 “우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그 인격이란 “우주의 일부가 아니고 오히려 우주가 인격의 일부이며 그 질”이고, “인격은 예외이지 법칙이 아니다.”라고 선포했다.(미주 9)

나는 이 이야기들에서 모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남성가치 위주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흔적을 본다. 물론 베르댜예프 자신도 분명히 밝히기를 자신의 인격주의는 헤겔의 일원론보다는 칸트의 이원론에 더 가깝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19세기 이후의 서구 생철학이 세계 이해에 나름으로 기여했지만 그것은 “우주적이며 사회적인 과정 속에 인격을 해소시킨다”. 대신에 자신의 인격주의는 그에 비해서 그 안에 “모순과 역설”을 담지한 “종말론적 전망”이고, “신비”라는 것이다.(미주 10) 그는 분명한 어조로 “신적-인간성의 이 신비를 동일철학, 일원론, 내재론의 빛 아래서 이해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며, “신-인성God-humanity에 관한 진리는 교의적 신조나 신학적 교리도 아니며 경험적 진리 곧, 정신적 체험의 표현이다”라고 언명한다.(미주 11)

이렇게 베르댜예프나 이신이 강조하는 믿음의 종말론적 성격과 인격적 신비의 의미를 나 자신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며, 특히 오늘날은 온갖 과학주의의 비등으로 정신이 철저히 객체화되고, 기계화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인격’과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특히 지금 이곳의 ‘몸’의 현실이 없으면 ‘힘없는’ 또는 ‘잔인한’ 관념일 뿐이며,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잘 불러오지 못한다는 것을 그의 ‘딸’로서, 그리고 동아시아의 ‘여성’과 ‘엄마’로서 경험해왔기 때문에 순전히 그저 그들의 입장에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미주 12) 아니 어쩌면 이신 자신도 이러한 인격과 자유와 자기초월에의 한없는 비상과 가치매김에도 불구하고 여기 이곳의 현재로부터 더 온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무척 괴로워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유학 시절에 고국에 남기고 간 병든 딸이 죽자 「딸 ‘은혜’(恩惠) 상(像)」이라는 시를 지으며 고통스러워했고, 그 이전에 6.25이후 모두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으며, 가족들의 생계와 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죽을 때까지 몸으로 고생하며 가족적 삶을 지켰다. 그 덕분에 우리는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나는 그처럼 신학자가 되어서 그의 생각을 밝히고 이어가는 일을 고민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오늘 우리 시대가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몰두하고, 대신에 ‘믿는다’는 것이 아주 드물어지고 어떻게든 고통과 아픔은 피하려 하고, 그래서 ‘죽음’은 더욱 외면당하고 억눌려지는 상황에서 진정으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영생’과 ‘부활’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관심을 촉구하고 대면하도록 초대한다. 이신은 인격성의 핵심인 자유는 “고난을 감내하고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며, “고뇌에 대한 능력이 없으면 인격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자신의 삶으로 전한다. 그의 믿음의 고독은 “출발”이라는 제목을 가진 다음의 시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나로서는 그것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다:

<출발>

운명을 전당잡고
풍진을 긁어모아 새로운 조형을
마련하려고 적막한 공지(空地)를 향해 출발하나
지평이 너무 낮고
하늘이 묵념만 반복하니
행려자의 가슴은
더욱 심연의 주변만 맴돈다.

길이 아무리 멀어도
자연이 전설을 고수하는 한
초속(超速)의 물체가
시간을 침식하는 논리는
심야의 기적 소리마냥
요란스럽게 굴러가고
증명이 불가능한
이 시대의 예언이
과학의 고독 때문에
오히려 찰나적 충동 속에서
질풍처럼 전달된다.

사색이 어떤 지점으로 고양되면
불투명한 풍토가
비극의 대안(對岸)을 환상적 토질로
변모케 하고
시대적 풍조 때문에
권력을 세낸 무리들이
몽롱한 달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투쟁을 계획한다.

이때 그렇게 오랫동안
기도하는
새 풍토에의 출발이
마지막 기적 소리 때문에 결단을 내리고
정오의 태양을 쪼이며
빈손마저 뿌리치고
홀로 떠난다.
그러면 가로수의 그늘이
명상의 은거지를 마련한다.(1968/8/8)(미주 13)

미주

(미주 1)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193쪽.
(미주 2) Soeren Kierkegaard,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8, p.33,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190쪽 재인용.
(미주 3) 李信 지음,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 306쪽.
(미주 4) 같은 책, 309쪽.
(미주 5)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같은 책,
(미주 6)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252쪽.
(미주 7) 같은 책, 252쪽.
(미주 8) N. 베르쟈에프, 『인간의 운명』, 이신 옮김, 현대사상총서, 1984, 322쪽.
(미주 9)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이신 옮김, 28-30쪽.
(미주 10) 같은 책, 8-12쪽, 44쪽.
(미주 11) 같은 책, 58-59쪽.
(미주 12) 이은선, 「한국 페미니스트 그리스도론과 오늘의 기독교」, 『한국 생물生物여성영성의 신학』,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1, 97쪽 이하.
(미주 13) 이신 지음, 『李信 詩集 돌의 소리』, 이경 엮음, 동연, 2012, 33-34쪽.

이은선(한국信연구소, 세종대 명예교수)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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