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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짐은 가벼워야 합니다”

기사승인 2024.10.02  02: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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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존재 이유(베드로전서 4:7-11)

베드로전서는 박해서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정한 박해의 국면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 환영받지 못하는 로마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있는 서신입니다. 당시 지배적인 사회질서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공동체의 질서와 가치관이 긴장하고 있는 정황 가운데서 기록된 서신입니다.

그 수신인은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들입니다(1:1). ‘나그네’(파라코이)는 로마의 시민권자는 아니지만 전적으로 떠돌이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체류중인 나그네들’ 또는 ‘거류민’을 나타냅니다. 완전히 사회에 통합된 사람들도 아니고 전적으로 배제된 사람들도 아닌 일종의 경계인이라고 할까요?

오늘날 ‘이주민’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이들은 그 불안정한 지위 때문에 늘 의심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당대의 일반 사람들과 구별되는 생활을 하였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심쩍은 종교를 갖고 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습니다.

수신인들의 그 성격 때문에 베드로전서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당대의 지배적 사회질서를 넘어서는 급진적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긴장 가운데서 의미심장한 신앙의 유산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따라야 할 삶의 태도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생활률, 곧 실천적 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엄연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공동체를 형성한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일깨웁니다. 특별히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한계를 넘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일러주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 말씀은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흔히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하면, 계산 가능한 시간상 확정된 어느 날로 생각하기 쉽지만, 성서의 세상 종말은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로서 기다림을 가르치는 것이 종말 신앙의 핵심입니다.

바로 내일 이 세상 끝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의 태도가 어찌 될까요? 물론 어떤 사람들은 자포자기하거나 극도의 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이루려고 할 것입니다. 내일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한 명언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종말 신앙은 바로 그런 태도로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믿음입니다. 부정적인 세태를 따르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꿈꿨던 그리스도인의 희망입니다. 무엇보다도 바로 그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었습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라는 점에서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을 ‘나그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라고 하면 방관자의 이미지를 연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신앙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오직 저세상만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어딘가에 집착하지 않고 걸어야 할 길을 걷는 사람, 베드로전서는 ‘나그네’라는 말로 그것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주어진 세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지만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으로 길을 걷는 나그네로서 그리스도인은 늘 깨어 기도에 정진하여야 합니다(4:7).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 행위로서 자기를 뛰어넘는 길의 첩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기를 뛰어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렇게 깨어 기도하는 태도는 구체적인 생활의 윤리를 동반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뜨겁게 사랑하십시오.”(4:8) 사랑은 타인에 대한 배려요, 상대와 나와의 일치입니다. 성서에서 사랑의 계명은 가장 우선이 되며 기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행하시고 일깨워주신 것이며(마가 12:31),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도 일관됩니다(로마 13:8, 갈라 5:14).

이 말씀은 잠언의 말씀을 그대로 환기합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준다(잠언 10:12).” 잘잘못을 가리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 태도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감화로 사람을 죄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것(야고 5:20)은, 성서의 가장 중요한 요체입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4:8).”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더욱 구체화한 권면입니다. 초기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삶의 구체적 형태로서 서로 손님처럼 우대하는 행위에 커다란 가치를 뒀습니다(마태 25:35, 로마 12:13, 히브 13:2, 디전 3:2). 환대의 공동체 정신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이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로서 살았던 그 삶의 방식에서 서로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 자체를 나그네로 부르고 있는 만큼, 나그네가 나그네의 형편을 잘 알지 않느냐 하는 것을 일깨우고 있는 셈입니다.

“불평 없이” 그렇게 하라는 것은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실제로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그것으로 스스로 또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찌 보면 그렇게 평범한 삶의 진실을 구현하는 것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세상 가운데서 펼쳤습니다.

▲ Gustave Dore, 「The Wandering Jew」 ⓒWikipedia

‘서로 사랑하라. 서로 대접하라.’ 이 말씀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를 일깨워준다면, 이어지는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의 본분에 관해 일깨워줍니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습니다. 아멘.”(4:10~11).”

이 말씀은 공동체 안에서 그저 기능적 역할 분담으로서 봉사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로서 봉사에 관해 일깨워줍니다. 나아가 자기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는 근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일깨워줍니다. 그야말로 누구나 선한 살림꾼으로서 몫을 다하라고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도, 봉사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로 알고 하라고 합니다.

이는 초기 교회 안에 분화되어 있던 두 가지 일을 암시합니다. 주로 말씀을 전하는 역할과 남을 돕는 역할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이미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므로 오만하게 누구에게나 강요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나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소홀히 할 수 없으며 가벼이 할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교회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여 그 이름을 더럽힌 경우도 있습니다. 일반 사회의 특정 세력보다 더 심각한 독선에 빠지거나 보편적인 윤리의식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부끄러운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닙니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님의 일을 하듯이 움직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그런 삶의 태도를 익히고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또 그 신앙을 가진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이루는 사연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상황을 겸허히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말씀’을 붙잡고 그 의미를 나누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 처해 있는 조건,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상황을 인정하고 경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실리적인 효율성으로 따진다면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입니까? 남들 안 하는 일 해야 하고, 시간도 내야 합니다. 그뿐입니까? 물질적 정성까지 들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상황을 인정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롭고 가치 있게 된다는 진실, 궁극적으로 구원의 길을 향할 수 있다는 진실을 알기에 우리는 그렇게 남들이 하지 않는 ‘비용’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일상적인 직업으로 생각한다면 역시 무모한 ‘직업’입니다. 그 어떤 직업이든 만만한 게 있겠습니까마는, 내가 알고 있고 내가 훈련을 받은 범위 내에서 능력을 활용하는 의미에서의 직업이라면 ‘못할짓’입니다. 성서에 관한 전문가라지만 공부하고 공부해도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만을 확인합니다.

사람을 다루는 일이라지만 어디 사람 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 마음 제대로 알아줍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은 또 얼마나 잘 알 수 있을까요? 게다가 스스로 특별히 고매한 인격을 갖춘 것도 아니라는 자괴감이라도 들면 더더욱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는 그 경험의 묘미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진실 때문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신앙은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게 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한계를 뛰어넘는 것으로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세상의 평화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또한 평화를 누립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며 대접하는 가운데 이루는 삶의 평화, 세상의 평화입니다.

교회는 그 믿음을 실현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그것은 밖을 향해 뭔가 엄청난 일을 해서만은 아닙니다. 스스로 그 믿음을 실현함으로써 세상에 희망을 주는 데 근본적인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직업 활동 이외에도,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여러 단체나 조직에서 활동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 돌이켜보고 우리의 삶이 저마다의 한계를 뛰어넘는 삶이 되기를 염원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저 사회의 많은 선한 단체들 가운데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삶의 근원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체현하는 샘물과 같은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 진실을 자각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삶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인정하고 대접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 모두 그 놀라운 체험을 누리는 가운데 진정한 삶의 기쁨을 맛보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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