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조절 여섯째 주일/세계성만찬주일/군선교주일(레 21:1-9; 고전 10:14-22; 눅 11:1-13)
1. 거룩한 제사장 행동 규정
계속해서 창조절기에 새 창조의 시작으로 가족과 그 확장인 영적 공동체에 관한 말씀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가족 구성의 기본이 되는 결혼과 이의 확장인 영적 공동체의 구성, 그리고 복음 전파를 통한 영적 가족과 신앙공동체 확장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러한 영적 공동체가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살펴보게 됩니다.
구약 말씀을 통해서는 공동체의 영적 리더가 되는 제사장의 행동 규정을, 그리고 서신서 말씀을 통해서는 공동체의 영적 결속을 위한 성찬(오늘이 세계성만찬주일이기도 하죠?)과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에 관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음서 말씀을 통해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과 기도하는 원리와 자세에 관해 살펴보게 됩니다. 이것은 새로운 공동체의 중요한 실천 사항입니다. 이렇게 신앙공동체가 제대로 서야만 지금 우리 세상에 새로운 창조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 제사장 위임(화목제)과 성막 내 사역 모습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그의 살붙이인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그의 자매로 말미암아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레 21:1-3)
오늘 구약 말씀인 레위기 21-22장은 성막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이 지켜야 할 규례에 대한 말씀입니다. 특히 21장은 선택받은 제사장들의 거룩한 생활에 대한 규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22장은 성물과 재물 규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일반제사장들에 대한 규례가, 10-15절까지는 대제사장들이 지켜야 할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 핵심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제사장들에 대한 규례가 일반 백성들에 대한 것보다 더욱 엄격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사장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이기 때문에, 윤리·도덕적인 면에서 더 거룩하고 절제된 삶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일반제사장에 관한 첫째 규례는 “죽은 자를 만지지 말라.”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죄의 결과로 온 하나님의 심판이자 저주이기 때문입니다(민 19:14-19). 부정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과 같은 부정한 것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장례식 외에는 시체를 멀리했습니다. 우리도 옛 어른들이 장례식장 다녀오면 소금을 뿌리는 정결 의식을 하죠? 제사장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기에, 부정한 것에서부터 자신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원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영생의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첫 인간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죽어야만 하는 존재로 변질했습니다. 이렇게 죽음은 심판의 결과이고 이것은 부정하기에 제사장은 죽은 자를 만지지 말아야 하며 그의 가족(살붙이)도 그리해야 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말지니라.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하지 말며 자기의 수염 양쪽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그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들의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그들은 부정한 창녀나 이혼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함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그는 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나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어떤 제사장의 딸이든지 행음하여 자신을 속되게 하면 그의 아버지를 속되게 함이니, 그를 불사를지니라.”(레 21:4-9)
마지막 9절 말씀을 보니, 제사장의 딸이 행음하면 불사르라고 하는데, 지금 적용하기는 어려운 말씀이죠? 이렇게 구약 말씀(은 물론, 신약도)은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안 되고 그 배경과 맥락,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의 의미는, 제사장은 거룩하라는 뜻이죠? 이렇게 일반 제사장의 두 번째 규례는 “거룩하라”입니다.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하느님께 양식을 바치는 사람, 공동번역)’이기 때문에 거룩하라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에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구약의 제사장은 오늘날로 말하면 목회자나 사역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은 거룩하고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정결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2. 대한예수팔아장사회의 얍삽한 양반 목사들
하나님께 양식을 바친다고 하니, “많은 세 끼(多)를 다 먹지 않고 저녁(夕) 한 끼만 먹는다”라는 뜻의 다석(多夕)이라는 호를 가진 한국의 위대한 개신교 사상가인 다석 류영모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그 문하에서 배운 임락경 목사님이 있는데, 자칭 ‘대한예수팔아장사회’ 소속 ‘망할교회’ 목사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목사님은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양반 상놈으로 나눴던 시대는 그 계급을 없앤 사람이 훌륭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이 훌륭했다. 해방 이후엔 우리가 빈손이었으니 근검절약하고 열심히 일한 사람이 훌륭했다. 독재 정권에선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훌륭했고,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서 사회복지가들이 훌륭한 이들이다. 지금은 지구 위기가 심하니 환경운동가들이 훌륭하다. 시대를 넘어서는 그 어느 때나 남들이 안 하는 일, 가장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하다. 설거지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하다.”
▲ 대한예수팔아장사회 망할교회 임락경 목사 |
알기 쉽게, 또한 역사적으로 기독교 사상의 핵심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임락경 목사님은 현재 개인주의가 팽배해 공동체성이 무너지고 있는 이때, 그 책임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묻고 있는데, 종교인들에게 관해서도 이렇게 한 말씀 합니다.
“류영모는 조선 왕조가 망한 것은 불한당인 양반들이 땀을 흘리는 것을 천하게 여긴 관존민비(관리는 높고 백성은 낮고 천하다는 생각) 사상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종교인들이 양반 노릇을 한다. 불교는 고려를 망쳤어도 올곧은 수행자들이 있어서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유교의 양반들이 조선을 망쳤지만, 청빈한 선비들이 있었기에 그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다. 기독교도 나라를 망치기 전에 목사들이 양반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사실, 한국인의 남다른 정은 ‘두터운 정’인데, 오늘날 이것이 ‘얍삽한 정’으로 전락했음을 안타까워합니다. 임락경 목사님의 말처럼, ‘얍삽한 양반 목사들’이 판치는 세상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저 역시 이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거룩하고 부정한 것을 멀리하고, 정결하고 순결해야 할 제사장이, 목회자들이 예수팔아장사회, 기독교팔아장사회로, 교회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 되는 영적 공동체의 리더인 제사장(목사)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교회에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대로 된 영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 제대로 된 성찬, 곧 밥상공동체를 나눠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성찬과 먹는 것 때문에 심각한 분열이 생긴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3. 먹는 것으로 무너지지 말라!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4-17)
‘축복의 잔’과 ‘우리가 떼는 떡’은 성찬(εὐχαριστία)을 뜻합니다. 이것은 성만찬(The Holy Communion) 또는 ‘주님의 만찬’이라고도 합니다. 기독교 성례전(성사) 중 세례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예전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자기 죽음을 기념하여 빵과 포도주를 나누라고 하셨다는 복음서 말씀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실 성찬이 없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닙니다. 역사신학자인 장신대 임희국 명예교수님은 예배를 중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2,000년 기독교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독교는 예배를 드리면서 탄생했다. 신약 성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의 역사로 예루살렘에서 생성된 신앙공동체가 기독교 역사의 첫걸음이었고, 이 신앙공동체는 예배에서 시작되었다. 이때의 예배는 강론(설교), 기도, 떡을 뗌, 시편 찬송, 신앙 고백, 축복 기원, 송영 그리고 아멘으로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강론(설교)은 구약 성서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성육신, 공생애,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선포되었습니다. 이것은 두 본문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초대교회가 아니기에, 초대교회의 탄생과 성장, 박해 상황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공동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한 본문을 포함, 세 본문 설교를 하면 제대로 된 강론이 될 것입니다.
아무튼, 사도 시대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바로 ‘떡을 뗌’입니다. 당시의 성찬인 “떡을 떼며”는 종교의식으로서 예전 형태가 아니라, 실제로 먹고 마시는 식탁 교제를 말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때가 바로 예수께서 떡을 떼셨을 때입니다(눅 24:30-31). 여기서 성찬은 부활의 식탁입니다. 성찬, 곧 떡을 뗌을 통해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은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코로나 상황 이후 식탁 교제가 끊어졌고, 최근 다시 시작되었지만, 식당 봉사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세상 식당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여신도들의 책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배 가운데 있는 성찬식은 그나마 중요시하는데, 예배 후 식탁 교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단순히 밥을 먹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사도 시대는 후자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예배는 이렇게 밥을 준비하고 함께 먹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에 남녀 구별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성찬에 관한 말씀 이후,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는 법에 관한 교훈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용이 쉬운 공동번역으로 이어지는 말씀을 볼까요?
“이스라엘 백성의 관습을 생각해 봅시다. 제물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제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알아들으십니까?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이나 우상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이교도들이 바치는 제물이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귀들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마귀들과 상종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잔을 마시는 여러분이 마귀들의 잔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또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마귀들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질투하게 해드려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보다 강하단 말입니까?”(고전 10:18-22)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뒷부분 말씀을 포함하여 전체 내용을 살펴보면, 바울은 이웃 사람들에게 초청받았을 때, 묻지 말고 음식을 먹다가 누가 “우상에 바쳐진 음식이다(고전 10:28).”라고 말하면 자신과 타인의 양심을 위하여 음식을 먹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우상에 받쳐진 제물(제사 음식)을 먹어도 상관없습니다. “땅도 주님의 것이요, 그 안에 가득히 있는 것도 다 주님의 것(고전 10:26)”이기 때문입니다.
▲ 몰렉신에게 아이를 바치는 모습과 유교 전통 제사상, 고린도에는 온갖 신들에게 바친 제물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것을 자유롭게 먹어도 되지만, 믿음이 없는 이들이 시험을 받을 때는 먹지 말라고 하는 바울의 생각이다. 따라서 유교 제사 음식은 먹어도 되나, 혹 믿음이 연약한 이가 시험받으면 먹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가 믿음이 성장할 때까지! |
그러나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다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이익’을 도모(고전 10:24)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의 영적 결속을 위해 자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자기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먹는 것으로 무너지지 말라는 말씀이죠? 이제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중요한 실천 사항을 살펴볼까요?
4. 세례 요한의 기도를 이은 예수님의 ‘주기도문’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 11:1-4)
누가복음 11장은 기도장으로 유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처럼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눅 11:-4)’과 ‘기도의 원리와 자세(눅 11:5-13)’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기도 핵심인 ‘회개’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입니다.(1)
먼저, 주기도문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인 고백(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과 사명(나라가 임하시오며) 이후에, 먹을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구약은 제사장이 하나님께 양식을 바치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신약에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와 시험에 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영적 공동체는 이렇게 먹을 것에 무너지지 말고(만나와 같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이어지는 말씀에 나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눅 11:5-8)
▲ 간절한 기도 |
벗 됨으로 인하여 주지는 않을지라도 간절함으로 응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간절한 기도도 필요하지만, 나누고 사랑하고 베푸는 것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푸는 공동체의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나아가 간구하는 자녀에게 악한 부모라도 좋은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으로 볼까요?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1-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세계성만찬주일입니다. 먹을 것(자원) 때문에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쟁과 갈등이 끝없습니다. 오늘은 군선교주일이기도 한데,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세계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 한 뜻을 가진 형제자매입니다. 십자가 군대입니다. 이것은 남을 죽이는 군대가 아니라, 남을 위해 자신이 죽는 군대입니다. 이렇게 용서하고 이해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 창조의 시작인 영적 가족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팔아장사회의 얍삽한 목회자들이 아니라, 경건하며 거룩하고 윤리·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영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야 합니다. 이렇게 작은 가족 공동체로부터 시작하여 지역 교회 공동체, 나아가 국가로 확장될 때, 세상의 심판은 더디 올 것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정의의 성령님’을 주시는 주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또한 지구촌 모든 구성원에게 이러한 지혜를 나눠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
(1) ‘세례 요한이 가르친 기도’는 당시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곧 와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주로 정치적인 왕)가 하나님 나라(무너진 다윗 왕조)를 세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먼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새롭게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습니다. 종말, 혹은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는 부흥 운동이죠? 그러한 단체가 많았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러한 운동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들은 죄를 회개하고,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면 메시아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를 요구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또 다른 운동으로 ‘바리새인의 운동’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 중산층에서 일어난 평신도 운동입니다. 그리고 은둔 공동체로 에세네파가 있습니다. 1947년 이스라엘 사해 근처에 있는 쿰란 동굴에서 발견한 사해 문서에 따르면, 에세네파는 쿰란 동굴에 은거하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과 에세네파,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과 이념을 담은 기도문을 작성해서 가르쳤습니다. 현재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사용했던 기도문은 남아 있지만, 세례 요한이 사용했던 기도문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주기도문을 통해 요한의 기도문이 ‘회개’와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종파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
최병학 목사(종교인문학연구소 소장) hak-9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