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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영성의 최고봉에 섰던 수도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

기사승인 2024.09.09  02: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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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의 ‘기고만장’(基古萬張,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 32

안녕하세요, 채수일의 ‘기고만장’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절정과 몰락을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를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14세기 유럽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흑사병, 교황권과 황제권 세력 간의 결전으로 인한 교황의 권력약화, 교회 권위 추락, 국가권력의 강화와 민족주의의 대두, 르네상스와 근대의 자연과학적 사유와 인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중세 후기 유럽사회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지요.

이와 함께 스콜라 신학도 점차 소멸해 갔는데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스콜라 신학의 소멸에 대한 역사적 배경의 하나는 신비주의의 등장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비주의는 스콜라 신학의 소멸에 기여했는가?

14세기 유럽 신비주의의 특징은 교회의 권위보다 개인적인 신앙체험을 통해 신과의 관계를 구축하면서, 성직자라는 중개자 없이 직접 신과 소통하여 영적 진리를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도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영적 성장을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신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일체감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을 발견하려는 것이 신비주의의 특징입니다.

신비주의는 매개 없이 신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제도권 교회와 남성중심의 성직주의에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종교가 권위주의적인 교권체제로 굳어지는 시대에는 언제나 신비주의가 형태를 달리하면서 등장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서도 개인적 영성과 직접적인 신체험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도 한국교회의 교권주의에 대한 평신도들의 도전 혹은 대안적 영성 추구의 시도라고 생각됩니다.

유럽의 13세기 중엽부터 14세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명의 유럽 신비주의자들이 등장했습니다. 막데부르그의 메히틸드(Mechthild von Magdeburg, 1210-1280)(1), 네덜란드 출신의 하데베이흐(Hedewijch, 1260년 무렵)(2), 독일 여성 신비주의자 헬프타의 제르트루다(Gertrudis, 1256-1302)(3), 네덜란드 도미니크회 수도사이자 신비주의적 저술은 남긴 얀 반 뤼스브p(Jan van Ruusbroec), 그리고 독일의 마이스터 폰 에크하르트(Meister von Eckhart, 1260-1328) 등인데요, 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은 에크하르트였습니다.

물론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앞에서 언급한 여성 신비주의자들인데요, 당시 기부장적 사회 안에서 특히 낮은 신분의 여성은 교육받을 기회도 거의 없었고, 여성 수도회는 전적으로 남성 수도회의 통제를 받던 상황에서 여성 신비주의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가 여성과 특별히 관련되어 나타나는 현상은 초대 그리스도교, 7세기 이슬람의 여성신비주의자, 14세기 유럽의 여성신비주의자, 한국교회 초기 기도원 운동에서 여성 지도자들이 나타난 역사적 맥락과도 잇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주목할만한 여성 신비주의자들은 그러나 다른 기회에 소개하구요, 오늘은 마이스터 폰 에크하르트를 살펴보겠습니다.

에크하르트의 삶에 대하여

에크하르트의 외적인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의 탄생년도는 물론 그의 삶의 중요한 사건이나 시기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에크하르트는 1260년경 중부 독일 고타(Gotha)에서 그리 멀지 않은 튀링엔(Thueringen) 지방의 호흐하임(Hochheim)에서 기사 가문의 후예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4)

에크하르트는 15살(1275년?) 정도의 나이에 에어푸르트(Erfurt)에 있는 설교자 수도회인 도미니코회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됩니다.(5) 수도회 규정에 따라 에크하르트는 1년간의 허원기를 마치고 정식으로 입회한 후 2년 동안 수도회의 규칙과 전례를 배우면서 라틴, 논리학, 성서 등 기초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6)

도미니코회는 3년의 기초교육을 마친 에크하르트 수사를 1300년 경(40세?) 당시 서양의 정신적 중심지였던 파리 대학에 있는 생 쟈크 수도원학교로 보냅니다. 도미니코회 규정에 의하면 3년의 기초교육을 마치 수도승은 그 후 5년의 철학 교육과 3년의 신학 수업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7) 당시 파리에는 스페인의 이슬람 철학자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 1126-1198)(8)를 통해 매개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중세 신학과 철학을 주도해 온 플라톤 철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철학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9)

에크하르트는 2년 뒤인 1302년(42세?) 파리 대학 신학부에서 마이스터, 곧 교수자격 학위를 받고 같은 신학부 도미니코회 교수직에 취임하게 됩니다.(10) 이는 에크하르트가 그 당시 학문 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대 사람들이 그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고 부른 것도, 그의 학문적 성취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이스터’(meister)는 라틴어 ‘마지스테르’(magister, 선생)가 중세 고지대 독일어로 와전된 것입니다.(11)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파리 체류는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1303년(43세) 당시 하나였던 독일 도미니코회 관구가 북쪽 작소니아 관구와 남쪽 튜토니아 관구로 분할됨에 따라 에크하르트는 47개의 수도원을 지닌 작소니아 관구장이 되어 1311년까지 봉직합니다. 이 시기에 그는 3개의 수녀원을 신설했고, 1307년(47세)에는 도미니코회 총장 대리자로서 보헤미아 지방의 수도원을 개혁하는 일에도 헌신하게 됩니다. 우리는 에크하르트가 단지 신비주의적 명상가만이 아니라 매우 활동적이고 행정에서도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12)

1310년(50세?) 나폴리의 수도회 총회는 에크하르트를 파리 대학 교수로 임명하여 두 번째로 파리에 파견합니다. 그것은 당시 도미니코회가 프란치스코회와 첨예한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도미니코회에서 가장 명석하고 대담한 두뇌의 소유자였던 에크하르트를 파리로 보낸 것이지요.(13) 두 번씩이나 파리 대학의 교수직을 맡은 것은 도미니코회에서 오직 토마스 아퀴나스만이 누렸던 영예인데, 에크하르트도 그랬으니 행정가로서만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에크하르트의 실력과 명성을 다시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14)

1314년(54세?)부터 에크하르트는 독일 신비주의의 중심지였던 슈트라스부르그의 도미니코 수도원 총장 대리로 일합니다. 이 시기 에크하르트는 도미니코회 소속 수녀원들을 비롯해 남부 독일과 라인 강 상류의 여성 수도단체들이나 일반 신도들을 지도하는 설교자로서, 혹은 영성 지도자로서 크게 명성을 떨쳤습니다. ‘고귀한 인간에 대하여’를 비롯하여 그의 독일어 설교의 많은 부분이 이 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15)

1323년(63세) 말 에크하르트가 예순을 넘겼을 때 수도회는 에크하르트에게 쾰른에 있는 수도원 학교의 교수직을 맡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에크하르트에게 불행한 운명이 닥칩니다.(16) 쾰른의 대주교 하인리히 폰 비르네부르크(Heinrich von Virneburg, 1304-1332 재임)가 1326년(66세?), 에크하르트가 대중에게 독일어로 설교를 하면서 신앙에 위험한 가르침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이유로 이단 심문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17) 폰 비르네부르크 대주교는 당시 널리 퍼지고 있던 이단적 운동들, 특히 베긴(Beguines)(18)이나 베가르(Beghards)들(19), 그리고 이른바 ‘자유정신의 형제들’(20)을 단속하는 데 열성이었습니다.(21)

이단 조사관들은 에크하르트의 라틴어 작품들, 《신적 위로의 책》(22), 독일어 작품 등에서 이단 혐의가 있는 49항목을 발췌해 에크하르트로 하여금 입장 표명을 위한 변론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2차 조사 과정에서는 독일어 설교에서만 가려 뽑은 59개 항목에 대한 입장 표명과 변론을 하게 했습니다.(23)

에크하르트는 당당하게 개개의 항목들을 하나하나씩 논박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24) 이단이란 지성보다는 의지의 문제이며 자기가 오류를 범했을는지는 몰라도 결코 이단이 될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대주교는 교황의 판결을 위해 혐의가 있는 조항들을 에크하르트의 해명과 함께 아비뇽으로 보냅니다.(25) 그러나 조사관들은 그의 소송 사건을 질질 끌고 갔고, 에크하르트는 1327년(67세?) 1월 24일 반박 문서를 작성해 아비뇽의 교황청에 항소합니다.(26)

그리고 교황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에크하르트는 도미니코회 회원 몇 명과 함께 아비뇽으로 향합니다. 에크하르트는 아비뇽에서 이단 심문을 받기 위해 불려온 영국의 프란치스코회 회원이자 서양철학사에서 유명론(唯名論) 철학자로 명성을 떨친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1287-1347)과 함께 판결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에크하르트는 1328년(1월28일), 예순 여덟 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합니다.(27)

그런데 1329년, 그러니까 에크하르트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에 이단 조사단은 28개 항목으로 에크하르트의 이단 혐의를 압축하고, 이 가운데 17항목은 이단적이고 나머지 11개는 이단의 혐의가 있는 것으로 판결하면서, 이 항목의 명제들을 확산시키는 사람은 누구나 이단자로 취급한다고 선언합니다. 에크하르트는 죽은 후에 이단으로 단죄된 것이지요.(28)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공표된 ‘주님의 밭에서’(In agro dominico)라는 최종 판결문은, 에크하르트가 ‘자신이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 이상을 알고자 하여 교회라는 밭에 엉겅퀴와 가시를 심은 사람 중의 하나’라고 단죄합니다.(29)

에크하르트 사후, 그의 사상과 가르침의 전통을 계속 발전시킨 누군가가 있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어쩌면 이단으로 정죄되고,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사람도 이단으로 단죄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의 신비 사상과 영성은 생명력을 상실하지 않고 그의 제자 헨리쿠스 수소(Henricus Suso, 1295?-1366)(30)와 요한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31), 그리고 로이스브뢰크(Jan van Ruysbroeck, 1293-1381) 등 이른바 독일 라인 강변과 네덜란드 지방의 신비주의자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졌으며, 그 후 독일 신학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32)

길희성 교수가 보는 에크하르트의 현대성

에크하르트의 영성신학, 신비주의에 대한 평가와 오늘 우리 시대를 위한 의미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저는 길희성 교수(1943-2023)(33)의 평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째, 길희성 교수는 전통적이고 통상적인 그리스도교 신관이 현대인에게 더 이상 설득력이 없게 된 현실에서 에크하르트의 신관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신관에 의하면 창조주이며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과 피조물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신과 자연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을 차단하고, 자연은 인간의 도구적 이성의 지배를 받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하느님 관념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에크하르트를 만난 길희성 교수는(34), 전혀 다른 신관을 주장하는 에크하르트에게서 실마리를 찾은 것이지요.

에크하르트는 만물을 품고 있는 신, 만물의 모태와도 같은 신을 말합니다. 인간을 비롯한 세계 만물이 신성의 깊이로부터 출원하고, 그리로 환원하는 창조론을 말하면서, 신과 인간의 근원적 일치를 주장한 것이지요.(35)

길희성 교수는 전통적인 인격적 신관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인격적 신관은 인간의 인격성과 인간적 가치들에 신적 깊이와 존엄성을 담보해 주는 긍정적 의미도 있지만, 무한한 신을 인간과 같이 하나의 제한된 인격적 존재로 생각하는 유치한 관념도 문제라는 것입니다.(36) 그런데 인간이 인격적 신을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위험성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의식한 사람이 에크하르트였습니다. 인간이 수단으로 부리는 종과 같은 신, 도구적 신을 떠나 오직 우리 존재의 근원이자 귀착지인 신만을 순수하게 사랑하라고 에크하르트는 주장합니다. 에크하르트는 신에 대한 집착에서 인간의 집요한 욕망의 교묘한 작용을 간파하며,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체의 경건하고 선한 행위에서 뿌리 깊은 인간의 이기심을 읽어냅니다. 신을 위해 신을 놓아버린다는 말, 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는 그의 기도는 바로 이런 통찰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37)

에크하르트가가 바라는 신은 결코 인간 밖에 존재하는 타자로서의 신, 대상적 신, 내가 필요에 따라 소유하고 버릴 수 있는 신이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로서의 신, 내 안의 신, 나 자신보다 나에게 더 가까운 신, 아니 나의 참 자아로서의 신입니다.(38)

둘째, 길희성 교수는 에크하르트가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매우 이질적인 두 종교가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제시한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선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제공하고 훌륭한 매개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39) 내용적으로는 초탈과 방하를 호소하는 에크하르트의 사상과 무념, 무주의 세계로 가는 길을 말하는 선사상, 모든 상을 여읜 순수하고 투명한 지성을 말하는 에크하르트와 맑고 밝은 거울과도 같은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불성(佛性)을 말하는 선불교,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고 자유로운 삶을 바라는 에크하르트와 무심, 무사의 경지를 추구하는 선불교, 성속의 거추장스러운 분별을 벗어버리고 단지 한 진정한 인간으로 살라는 에크하르트와 무의(無依)도인, 무위(無爲)진인의 삶을 호령하는 당나라의 임제 선사(臨濟, ?-866)가 같다는 것입니다.(40) 더 나아가 길희성 교수는 에크하르트 영성 사상은 비단 불교만이 아니라, 전 동양사상과도 만날 수 있다고 평가합니다.(41)

끝으로 길희성 교수는 성장과 성공 신화에 매달려 크고 화려하고 풍요로운 것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면서 물신주의에 빠진 한국의 기독교의 변화를 위해서는 초탈 혹은 초연이라고 부르는 가난의 영성을 실천한 에크하르트의 삶과 영성 사상을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세상과 자신에 대한 집착은 물론 심지어 하느님마저 놓아버리는 철저한 가난의 영성은, 보이는 것에 눈이 멀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을 상실한 한국 기독교에 강한 호소력과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42)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삶을 연구한 레이몬드 B. 블레크니는 에크하르트의 특이한 사상들 가운데 매우 혁명적인 것들이 있다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만일 에크하르트의 활동이 정치, 사회적 변화나 제도화된 종교 구조에 여향을 끼쳤다면, 그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또는 그가 의도하지 않은 사이에, 또는 그의 동의 없이 발생한 것임을 지적합니다.(43

종교적 사유의 혁명성과 사회적 실천의 혁명성은 에크하르트의 경우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의 신비체험의 혁명적인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는 교회의 충실한 수도자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악습이나 개혁에 관한 그 어떤 비평도 가하지 않았고, 정치문제에도 아무런 견해도 피력하지 않았습니다.(44)

그리고 에크하르트가 라틴이 아니라 독일어로 수녀들과 베긴회 회원들을 포함하는 평신도 청중들에게까지 설교하고, 교육의 부족과 지성의 부족을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그랬기 때문에 에크하르트가 여성 영성의 지지자였다거나(45), 민중에 의한 사회적 개혁 열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46)고 조심스럽게 블레크니는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사상가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맥락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에크하르트도 중세라는 시대정신과 이단 심문이라는 정황에서 파악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그런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 사상의 혁명적인 요소들은 오늘도 제도권 종교의 본질이 물어지고, 추구되는 곳에서 강력한 길잡이가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미주

(1) 메히틸드(1210-1280), 독일 출신 베네딕토회 수녀. 독일어로 신비 체험을 전하고, 타락한 수도회와 재속 성직자들을 비판하여 비난을 받아. 그녀의 신비주의는 불가사의하고 기이하며 비밀스런 종교체험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구원을 찾고,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영 안에서 누리는 내적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교회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이 아니라, 신과의 합일을 통한 영적 자유를 주장. 많이 배우지 못한 낮은 신분의 귀족출신이지만,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빛’게 관해 여섯 권의 책을 펴냈음.
(2) 하데베이흐(1260?-?), 네덜란드 출신의 시인이자 여성 신비주의자. 평신도 수도회였던 베긴회 소속이었던 하데베이흐는 네덜란드어로 글을 쓴 최초의 신비주의 작가 가운데 한 명.
(3) 제르트루다(1256-1302), 독일 출신 베네딕토회 수녀이자, 신비가, 신학자. 세속학문과 지성에만 열중하던 중 1280년 극도의 고통에 시달리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발현을 체험하고 치유. 그후 영성생활을 추구하면서 성서와 신학 연구에 몰두.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이해.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으로 그들을 위한 기도를 촉구. 그녀가 속했던 아이스레벤 근교의 헬프타 수녀원은 13세기 신비주의의 중심이었다.
(4) 레이몬드 B. 블레크니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이민재 역 (서울: 다산글방, 1994), 141.
(5) 도미니코 수도회는 1216년 이단적 가르침을 척결하려는 목적으로 창설된 수도회로서, 기도와 노동에 힘쓰는 전통적 수도회와는 달리 수도자들로 하여금 설교와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노동의 의무로부터 풀어주고 도회지를 중심으로 탁발수도와 순회설교 활동을 하도록 만든 수도회였다.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경북 왜관: 분도출판사, 2003), 48 참조.
(6)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47-48.
(7) 레이몬드 B. 블레크니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42.
(8) 아베로에스(아랍 명은 이븐 루시드, 1126-1198). 스페인의 아랍계 철학자, 의학자. 코르도바의 유명한 법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신학, 법학, 의학, 철학 등에 깊으 교양을 쌓아는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의 주해를 완성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가장 바르게 복원하는 것을 그의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보존하고 발전시켜 유럽의 르네상스에 크게 공헌했다.
(9)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53.
(10)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57.
(11) 레이몬드 B. 블레크니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45.
(12)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58.
(13) 요셉 퀸트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설교 1⟫, 이부현 역 (서울: 누멘, 2009), 14.
(14)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58.
(15)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60.
(16) 요셉 퀸트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설교 1⟫, 15.
(17) 요셉 퀸트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설교 1⟫, 16.
(18) 베긴회(Beguines)는 유럽 12세기 말과 13세기 초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의 여러 도시에서 일어난 최초의 여성 영성공동체 운동이었다. 주로 상류층 내지 중산층의 미혼 여성들이 모여 다양한 종교적 활동은 물론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회봉사활동을 했다. 이들 가운데 여성 신비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기존 남성 수도회에 이들을 통합시켜 수도회의 감독을 받게 했다. 이들 여성 신비주의자들은 영성적으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며 종교적 권위와 책임을 공유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19) 베가르(Beghards)는 남성 평신도 공동체를 일컫는 말. 베가르회는 교회의 지도와 감독을 떠나 공동생활과 탁발을 시행했고, 민중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가톨릭교회의 성직위계제도를 비판했다. 그리하여 베긴회와 베가르회는 1312년 교황 클레멘스 5세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20) ‘자유정신의 형제들’은 12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범신론적 신비주의 단체이다. 가톨릭교회의 형식적 또는 교리적인 신앙보다 단순하고 내적인 경건을 주장하여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았지만 독일 신비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21)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61.
(22) ‘신적 위로의 책’은 남편을 사별한 헝가리 왕비 아그네스(Agnes)를 위해 헌정한 책인데, 높은 신학적, 철학적 사변을 담고 있다.
(23) 요셉 퀸트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설교 1⟫, 16.
(24) 에크하르트의 변론은 레이몬드 B. 블레크니가 편역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이민재 역, 다산글방, 1994), 44-132에 실려 있음.
(25)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61.
(26) 요셉 퀸트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설교 1⟫, 17.
(27)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62; 레이몬드 B. 블레크니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53.
(28) 요셉 퀸트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어 설교 1⟫, 18.
(29)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62; 레이몬드 B. 블레크니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55.
(30) 헨리쿠스 수소는 에크하르트의 뛰어난 제자로, 독일 남서부 슈바벤의 콘스탄츠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콘스탄츠의 도미니코회에 입회, 신비 생활과 신적 사랑을 통한 강한 영적 변화를 체험한 후, 18세에 영원한 지혜와 영적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고 수도생활에 전념. 독일 신비가들 가운데, 어쩌면 모든 신비 저술가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31) 요한네스 타울러, ⟪완덕에의 길⟫, 엄성옥 역 (서울: 은성, 2014); 요한네스 타울러, ⟪영혼아 성령의 외침을 들으라⟫, 이준섭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20).
(32) 레이몬드 B. 블레크니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59.
(33)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34)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10.
(35)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11.
(36)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13.
(37)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15.
(38)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16.
(39)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18.
(40)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19; 임제 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유명한 말로 우상파괴와 참사람(무위진인)을 강조했다.

(41)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20.
(42) 길희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사상⟫, 22.
(43) 레이몬드 B. 블레크니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61.
(44) 레이몬드 B. 블레크니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62.
(45) 레이몬드 B. 블레크니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62.
(46) 레이몬드 B. 블레크니 편역,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63.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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